뮤지컬 ‘물랑루즈!’ [사진제공=CJ ENM]
뮤지컬 ‘물랑루즈!’ [사진제공=CJ ENM]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줘, 세상 사람들에게. 그럼 우린 영원할 거야.”

사틴이 연인에게 남긴 마지막 소원은 바로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달라는 말이었다. 사틴은 폐결핵이 악화하는 상황 속에서도 사랑하는 크리스티안을 생각해 참고 또 참았다. 세상과 작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준비한 공연만큼은 반드시 무대에 올려야 했다. 그는 연인이 만든, 그리고 두 사람이 꽃피운 사랑으로 완성된 노래를 모두가 들을 수 있길 바랐다. 간절했던 소원이 눈앞에 현실로 펼쳐진 순간, 사틴은 끝내 크리스티안의 품에 안겨 눈을 감는다. 곧이어 어두워진 무대 위로 열광적인 박수가 가득 쏟아졌다. 곳곳에서 들린 훌쩍임도 함께였다. 그만큼 러닝타임 내내 지켜본 두 사람의 진심 어린 사랑이 마음을 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뮤지컬 ‘물랑루즈!(Moulin Rouge!)’가 어느덧 후반부 공연 일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번 공연은 미국, 호주, 영국, 독일에 이어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선보이는 무대여서, 초연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국내 공개를 손꼽아 기다리던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뮤지컬 ‘물랑루즈!’는 1890년대를 주름 잡은 프랑스 파리 클럽 ‘물랑루즈’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물랑루즈’의 대표 스타 사틴과 미국에서 온 청년 작곡가 크리스티안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데,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아름다운 무대와 환상적인 쇼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일찍이 기대를 모았다.

바즈 루어만 감독이 만든 인기 영화 ‘물랑루즈(2001)’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은 과거 전성기를 맞았던 클럽 일부를 그대로 옮겨오면서도 무대와 어울릴 요소까지 적절히 배합해 더욱 흥미롭게 탄생했다. 줄거리는 영화와 꽤 비슷하게 흘러가면서도 극적인 효율성을 높였고, 일부 캐릭터에는 확실한 변화를 주었다. 예를 들어 사틴과 크리스티안의 사랑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공작은 몬로스 공작이라는 이름과 함께 훨씬 더 젊고 매력적인 인물로 바뀌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갖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캐릭터다. 이뿐만 아니라 물랑루즈 단장 해롤드 지들러나 클럽 댄서 니니 역시 영화와는 조금 다르게 나타나 극에 재미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주인공을 맡았던 니콜 키드먼(사틴 역)과 이완 맥그리거(크리스티안 역)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긴 탓에 한국 초연 출연진에도 일찌감치 관심이 집중됐다. 먼저 ‘영원히 빛날 다이아몬드’ 사틴 역은 김지우와 아이비가 맡아 당대 최고의 스타다운 무대를 선사한다. 그리고 사틴의 연인이자 무명 작곡가 크리스티안 역으로는 홍광호와 이충주가 캐스팅돼 젊은 보헤미안이 품은 이상과 혈기를 그대로 녹여낸다. 이밖에 김용수, 이정열, 손준호, 이창용, 최호중, 정원영, 심새인, 심건우 등이 무대에 올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또 뮤지컬 ‘물랑루즈!’는 장르가 가진 특성을 바탕으로 독특한 변화를 시도했다. 작품에는 원작 영화에 등장하는 음악들뿐만 아니라 레이디 가가, 아델, 비욘세, 시아, 리한나 등 글로벌 스타들이 부른 유명 팝송까지 등장한다. 처음에는 조금 낯선 듯 하나, 워낙 대중적인 음악들인데다 자칫하면 무겁고 어두워질 수도 있는 분위기를 전환하는 역할을 해 들을수록 친숙하게 다가온다. 다만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간혹 있다. 이처럼 온갖 음악 장르가 모여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뮤지컬 ‘물랑루즈!’는 작품이 가진 특성을 살려 신개념 ‘매시업(mash-up)’ 뮤지컬로 분류됐다.

특히 이 작품은 퍼스트 클래스 레플리카 공연으로 오리지널 창작진과 제작진, CJ ENM이 글로벌 공동 프로듀싱을 맡아 눈길을 끈다. 2019년 7월 브로드웨이에서 공식 개막한 뮤지컬 ‘물랑루즈!’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을 분명히 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외부 비평가상, 드라마 데스크 어워즈, 드라마 리그 어워즈를 통해 먼저 좋은 소식을 알린 작품은 제74회 토니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등 총 10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그만큼 작품성과 화제성을 두루 갖춘 뮤지컬 제작에 한국 뮤지컬 제작 노하우가 더해졌다는 사실은 무척 반갑고도 대단한 일이다.

뮤지컬 ‘물랑루즈!’ [사진제공=CJ ENM]
뮤지컬 ‘물랑루즈!’ [사진제공=CJ ENM]

이야기는 무대에 등장한 크리스티안이 과거를 돌이켜보면서부터 시작된다. 이제 막 미국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청년은 보헤미안 정신에 깊이 매료돼 그들과 뜻을 같이하려 한다. 그러다 우연히 물랑루즈 최고 스타 사틴과 얽히게 되면서 두 사람은 운명처럼 사랑을 싹틔운다. 하지만 재정 악화로 폐업 위기에 처한 물랑루즈를 살리기 위해 사틴을 이용해야 하는 지들러와, 사틴을 오직 자신만의 소유로 만들겠다며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몬로스 공작 때문에 몰래 한 사랑은 위기를 맞이한다. 크리스티안은 보헤미안 친구이자 위대한 예술가 툴루즈-로트렉과 힘을 합쳐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보헤미안 랩소디’ 공연을 제작하기로 한다. 그러나 연습이 계속될수록 사틴을 중심으로 한 세 사람의 엇갈린 관계는 더욱 뚜렷해질 뿐이다. 이에 질투심을 감추지 못한 크리스티안이 점점 자신을 파괴하려 들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사틴 역시 또 다른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사랑하는 연인이 다시 고통받길 원하지 않았던 사틴은 폐결핵의 아픔마저 숨기고 크리스티안을 향해 모진 말을 내뱉는다. 결국 사틴의 의지 덕분에 공연은 무사히 무대에 오르고, 연인과 동료들을 위해 펼쳐야 했던 사틴 혼자만의 연극도 막을 내린다.

비록 가진 것은 없을지라도 진실과 아름다움, 자유, 사랑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던 보헤미안의 모습은 눈부시게 화려한 물랑루즈와 한껏 대비된다. 억눌린 관습이나 편견, 부의 막대한 힘조차 보헤미안들이 꿈꾼 이상과 자유를 결코 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들의 외침이 단번에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보헤미안 정신을 자본주의의 향기가 가득한 뮤지컬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상당히 모순적이어서 더 재미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예술가다운 자부심을 잃지 않고, 인간으로서 꿈꿀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자유를 노래한 사람들의 모습은 그래서 또 한 번 빛난다. 물론 사틴 역시 마찬가지다. 어릴 때부터 눈빛이 남달랐던 소녀는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야 했지만, 살아남기 위한 걸음 뒤에 남겨둔 꿈의 그림자만큼은 그대로 남아 긴 그늘을 드리운다.

▲ 최윤영 공연 칼럼니스트·아나운서<br>-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br>-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br>-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br>-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br>
▲ 최윤영 공연 칼럼니스트·아나운서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공연을 말하다’
-클래식, 콘서트 등 문화예술공연 전문 MC
-미디어 트레이닝 및 인터뷰,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전문 강사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 경인방송 FM 리포터

이 밖에도 뮤지컬 ‘물랑루즈!’는 역동적인 춤과 화려한 볼거리, 쉴 새 없이 전환되는 의상 등으로 관객들의 오감을 만족시킨다. 붉게 물든 공연장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물랑루즈!’의 세계로 이끌기 충분할 만큼 실감 나게 연출했다. 공연장 내부 양옆 상단에는 대형 풍차와 거대 코끼리 조형물이 설치돼 있고, 천장에도 붉은 천과 조명들이 가득 매달려있다. 보통 객석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무대 촬영이 제한되는데, 이 작품은 프리 쇼(pre-show)가 시작되기 전까지 자유롭게 공연장 내부를 촬영할 수 있도록 했다. 공연 시작 전과 인터미션 내내 음악이 흐르면서 관객들이 작품에 더 몰입하도록 유도한 점도 눈에 띈다.

지난해 12월 16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개막한 뮤지컬 ‘물랑루즈!’는 오는 3월 5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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