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의뢰로 1달간 전국 농민 553명 심층대면조사 진행
권리 침해받아도 농민 10명 중 5명은 ‘그냥 넘어갔다’
농업에 대한 국가 책무, 73.4% ‘높은 수준의 책임’ 요구
“121개국 찬성한 농민권리선언, 제도화 실현 논의해야”

농민들이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에서 준비한 ‘기후위기와 식량위기 시대에 필요한 농민권리 실태조사’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제공=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농민들이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에서 준비한 ‘기후위기와 식량위기 시대에 필요한 농민권리 실태조사’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제공=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지구는 만성화되는 기후변화와 식량위기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한 사회분야별 논의는 무르익지 않고 있다. 여러 분야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농업이 그러하다.

유엔은 지난 2018년 12월 17일 총회에서 농민권리선언을 채택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채택한 지 5년여가 지났지만 그 내용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월 19일 이른바 ‘농민기본법’이라 불리는 농민·농업·농촌정책 기본법이 국민동의청원을 거쳐 국회에 회부됐으나 21대 국회 내 통과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대도시에서 살다 보면 농업에 대해서는 시장 장바구니 물가 걱정할 때나 각국과의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시 우리나라가 양보하는 항목 정도로 이해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대중들의 농민권리와 농민기본법에 대한 관심도 역시 낮은 모습이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농민권리선언에 담긴 오늘날 농촌의 현실을 밝히고 농민들 스스로는 자신의 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현장취재와 설문조사 등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한번 훼손된 환경을 다시 되살리기 어렵듯 농업 역시 마찬가지다.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문제를 직시할 때가 됐다.

 【투데이신문 홍기원 기자】 <투데이신문>은 '농민권리를 외치다' 기획보도를 준비하면서 보다 많은 농민들에게 농민권리에 대한 견해를 듣고자 대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농민권리의 실태를 유엔농민권리선언 기준에 비춰 짚어보고 이를 논의하는 공론의 장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고자 했다.

이에 본보는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이하 녀름)에 전국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면 설문조사를 의뢰했다. 녀름은 지난 9월 12일부터 10월 12일까지 한달간 전국에서 농축산물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만 18세 이상 농민을 대상으로 심층적인 설문조사를 전개했다.

녀름은 농민들에게 이번 조사의 목적과 취지에 대한 설명을 진행한 뒤 구조화된 설문지를 통해 대면설문을 전개했다. 총 607명의 농민에게서 설문을 받았으며 이 중 응답률이 낮은 54명을 제외한 553명의 답변을 분석해 ‘기후위기와 식량위기 시대에 필요한 농민권리 실태조사’ 보고서를 만들었다. 설문 결과는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유엔농민권리선언 제도화 방안 마련을 위한 국회토론회’에서 발제로 먼저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실태조사의 응답률은 91.1%이며 오차범위는 95% 신뢰수준에 ±4.0%포인트다. 총 22개 문항으로 구성됐으며 ▲유엔농민권리선언 인지도 조사 ▲농민권리 실태조사 및 대응방법 ▲응답자 기본 인적사항 등을 내용으로 했다. 

응답자 특성을 보면 총 553명 중 남자는 271명, 여자는 277명이다. 연령대별로 보면 30대 이하는 12명, 40대 50명, 50대 223명, 60대 201명, 70대 57명, 80대는 8명이다. 농업 종사기간은 31년 이상이 180명(32.7%)으로 가장 많았으며 주 재배작목은 쌀이 181명(33.0%)로 가장 많았다. 그 외에 식량작물 124명(22.6%), 채소 및 산나물 103명(18.8%), 과수 80명(14.6%), 특용작물‧버섯 43명(7.8%), 축산 17명(3.1%) 순이다. 응답자가 거주하는 지역은 ▲인천경기 145명(26.3%) ▲전북 128명(23.2%) ▲대구경북 75명(13.6%) ▲광주전남 58명(10.5%) ▲대전충남 47명(8.5%) ▲제주 28명(5.1%) ▲충북 18명(3.3%) ▲강원 8명(1.4%)으로 분포돼 있다.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유엔농민권리선언 제도화 방안 마련을 위한 국회토론회에서 전국 농민 553명의 응답을 분석한 ‘농민권리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투데이신문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유엔농민권리선언 제도화 방안 마련을 위한 국회토론회에서 전국 농민 553명의 응답을 분석한 ‘농민권리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투데이신문

유엔농민권리선언, 안다 44.6%‧모른다 29.5%

농민들에게 유엔농민권리선언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자 ‘알고 있다’는 응답은 44.6%(잘 알고 있다 17.7%, 일부 알고 있다 26.9%)로 나타났다. ‘들어본 적은 있다’란 응답이 26.9%였으며 ‘알지 못한다’는 29.5%(알지 못한다 18.2%, 잘 알지 못한다 11.2%)였다. 

연령대별로 보면 50대의 51.1%는 ‘알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60대도 45.4%가 유엔농민권리선언을 인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70대는 ‘알고 있다’란 응답이 31.5%에 그쳤으며 40대도 인지한다는 응답이 34.0%에 머물렀다. 한편, 남자(인지한다 41.7%)와 여자(인지한다 47.8%)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유엔농민권리선언을 인지하고 있다는 응답자에 한해 인지하게 된 경로를 묻자 ‘교육을 통해서’라는 답변이 62.9%로 가장 높았다. ‘TV, 신문 등 언론을 통해서’는 14.6%, ‘주변인들을 통해서’는 10.8%에 그쳤다.

‘농업생산의 주체인 농민으로서 나의 권리는 보장받고 있다고 생각하냐’는 설문에는 ‘보장받지 못한다’는 부정적 응답이 76.7%(전혀 그렇지 않다 30.6%, 그렇지 않다 46.1%)로 농민 10명 중 8명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보통이다’는 응답은 19.1%였으며 ‘보장받는다’는 긍정적 응답은 4.2%(‘그렇다’ 3.3%, 매우 그렇다 0.9%)에 불과했다.

50대 응답자의 82.0%는 ‘보장받지 못한다’는 권리침해 답변을 선택했으며 ‘보장받는다’라는 권리보장 답변을 선택한 비율은 1.8% 밖에 안 됐다. 지역별로 권리침해 답변이 가장 높은 곳은 대전충남으로 95.7%가 ‘보장받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권리보장 답변이 가장 높은 곳은 인천경기였으나 그 비율은 9.2%에 머물렀다. 이 지역도 응답자 62.0%가 권리침해 답변을 선택했다.

또, 권리침해 답변을 선택한 407명에게만 따로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느꼈을 때 어떻게 대처했나’를 묻자 응답자의 절반 가량이 ‘넘어갔다’고 답했다. 구체적으로 ‘그냥 넘어갔다’는 응답은 47.9%, ‘공공기관에 민원을 제기했다’는 25.8%,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16.2%를 각각 기록했다. 

실태조사를 진행한 녀름은 “농민이 제대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권리를 침해받고 있음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는 국가가 농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설명했다.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느낄 때 대처 방법 설문조사 결과 [자료제공=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느낄 때 대처 방법 설문조사 결과 [자료제공=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적절한 생활수준 보장 못 받아 78% 달해

농민들에게 ‘농지, 자연자원, 종자 등 생산수단을 이용할 권리를 보장받고 있냐’고 묻자. 부정적 응답이 65.0%(전혀 그렇지 않다 24.8%, 그렇지 않다 40.1%)로 나타났다. ‘보통이다’는 27.0%의 응답자가 선택했으며 긍정적 응답은 8.0%(그렇다 7.3%, 매우 그렇다 0.7%)로 나왔다.

‘정책, 개발사업 결정 등의 문제에 참여권을 보장받고 정보를 제대로 제공받고 있냐’는 질문에서도 부정적 응답이 75.0%(전혀 그렇지 않다 30.9%, 그렇지 않다 44.0%)를 차지하며 높은 비율을 보였다. 응답자의 20.1%는 ‘보통이다’를 골랐으며 긍정적 응답은 5.0%(그렇다 4.4%, 매우 그렇다 0.6%)였다.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받고 있느냐’를 묻는 설문 역시 부정적 응답이 69.5%(전혀 그렇지 않다 24.6%, 그렇지 않다 45.0%)로 가장 많았다. ‘보통이다’라는 응답은 24.2%, 긍정적 응답은 6.2%(그렇다 5.3%, 매우 그렇다 0.9%)였다.

수도권인 인천경기지역은 건강권과 안전에 대한 부정적 응답이 42.4%로 ‘보통이다’(40.3%)와 비슷한 응답률을 보였다. 긍정적 응답도 17.3%로 타 지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높은 편에 속했다.

이어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생태, 친환경농업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받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부정적 응답이 68.8%(전혀 그렇지 않다 25.0%, 그렇지 않다 43.9%), ‘보통이다’ 22.0%, 긍정적 응답 9.2%(그렇다 8.1%, 매우 그렇다 1.1%)로 나타났다. 다만 100% 친환경농법을 쓴다는 농민 177명 중 부정적 응답은 55.4%(긍정적 응답 15.3%)로 100% 관행농법을 쓰는 농민 135명 중 부정적 응답 78.5%(긍정적 응답 4.4%)보다 비율이 낮았다. 

‘여성농민이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게 참여할 권리를 보장받고 있느냐’란 설문에는 부정적 응답이 71.3%(전혀 그렇지 않다 29.5%, 그렇지 않다 40.0%), ‘보통이다’ 20.4%, 긍정적 응답은 7.4%(그렇다 6.2%, 매우 그렇다 1.1%)였다. 응답별 남녀간 차이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남자 비율이 37.9%, 여자 비율은 62.1%였으며 ‘그렇지 않다’는 남자 48.2%, 여자 51.8%였다. 

남녀 모두 여성농민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남자에 비해 여자가 더욱 보장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난 셈이다. 상대적으로 남자는 여자에 비해 여성농민의 권리침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보장받고, 적절한 수입과 생계를 보장받고 있는가’란 설문에는 부정적 응답 78.0%(전혀 그렇지 않다 39.1%, 그렇지 않다 38.9%), ‘보통이다’ 15.7%, 긍정적 응답 6.3%(그렇다 5.2%, 매우 그렇다 1.1%)로 나왔다. 특히 응답자 10명 중 4명이 ‘전혀 그렇지 않다’를 고르면서 소득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줬다.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적절한 수입과 생계 보장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 [자료제공=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적절한 수입과 생계 보장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 [자료제공=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가장 우선하는 문제, 66.1% 생존권 위기 꼽아

이어 농민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대응해야할 권리침해 문제로 생존권을 꼽았다. 이번 실태조사에서 ‘농민권리의 보장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대응해야할 권리침해 문제는 무엇이라 생각하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6.1%가 ‘생산비 폭등, 농업소득 감소로 인한 생계와 생존권 위기’를 선택했다. ‘기후위기로 인한 생산의 어려움, 건강문제 등’도 응답자의 27.7%가 선택했다.

이는 앞의 소득문제 설문와 함께 짚어야 할 대목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평균 농가부채는 2020년 3758만9000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21년 3659만2000원, 2022년 3502만2000원으로 내림세를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부담스러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신정훈 의원이 지난달 농협중앙회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올해 8월말 기준 농지담보대출은 75만4525건, 84조183억원에 달하고 있다. 이 중 미상환은 1만4101건으로 2021년 6109건, 2022년 9400건에서 크게 늘어난 상태다. 

농업에 대한 국가의 책무에 대해서는 ‘높은 수준의 책임’을 요구하는 답변이 73.4%(매우 크다 57.9%, 크다 15.5%)를 차지했다. 특히 30대 이하(72.7%)와 40대 농민(72.0%)은 ‘매우 크다’를 70% 이상이 선택하는 등 나이가 적고 농업 종사기간이 짧을수록(‘5년 이하’에서 매우 크다 75.5%) 농업에 대한 국가 책무를 더 크게 인식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밖에 유엔농민권리선언의 목적과 목표 실현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활동으로는 ‘법률 제정 등 입법활동’이 68.0%로 가장 높았다. 특히 농민기본권 보장을 위한 농민기본법 제정 등의 입법 문제에 대해선 ‘매우 중요하다’가 77.9%, ‘중요하다’ 19.1%로 응답자의 96.9%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보다 산업을 중시하는 기존 제도에서는 농민과 농업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87.1%(매우 그렇다 57.9%, 그렇다 29.2%)가 동의했다. ‘우려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4.4%(그렇지 않다 2.9%, 매우 그렇지 않다 1.5%)로 소수에 불과했다.

녀름 이수미 부소장은 이번 실태조사 결과에 대해 “최근 생산비 폭등 문제와 농축산물가격 불안정 등으로 농업소득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현장 농민들이 엄청난 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총평했다. 그러면서 “유엔농민권리선언은 농민의 권리 증진, 식량주권 실현, 농업의 지속가능성 증진이라는 지향을 담아 이 선언의 확산은 지속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는데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부소장은 “농민과 농업은 지속가능성을 위협받으며 노동간 소득격차, 농농간 양극화, 생존권 침해 등의 위기에 직면했다”라며 “이상기후와 이로 인한 농업재해의 잦은 발생은 영농환경의 불안정성을 더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이는 기후취약계층인 농민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생존권을 위협해 농민과 농업은 복합적인 위기상황에 내몰려 있는 현실이다”고 진단했다. 이에 “국가는 지난 시기 농업의 안정적인 성장이나 농민 보호 및 육성 측면에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유엔총회에서 121개국의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 유엔농민권리선언에서 규정하는 국가 책무의 의미를 잊지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이 부소장은 “유엔농민권리선언이 채택된지 5년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부 차원의 움직임이나 농민권리선언을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없다”라며 “유엔농민권리선언은 전세계가 농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농업과 농촌을 지키기 위한 약속이다. 더 이상 농민의 삶과 생존권이 위협받지 않도록 농민권리를 보장할 적극적인 방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기후위기, 식량위기 시대에 농민 권리보장, 식량주권 실현, 농업의 지속가능성 관점에 기반한 유엔농민권리선언 제도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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