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추억에 새로운 색을 입힌 ‘뉴트로’가 대세입니다. 소비자에게 오랜 기간 사랑받아 온 기업들은 촌스러움을 훈장처럼 장식한 한정판 레트로 제품들을 앞다퉈 내놓고 있습니다. 비단 물건 뿐 아니라 옛 세탁소나 공장 간판을 그대로 살린 카페 등 힙한 과거를 그려낸 공간 또한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래된 기록이 담긴 물건과 공간들은 추억을 다시 마주한 중년에게는 반가움을, 새로운 세대에게는 신선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기자는 켜켜이 쌓인 시간을 들춰, 거창하지 않은 일상 속 ‘추억템’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왼쪽부터 1980년대 공장 모습과 백양 메리야스 직매점 [사진제공=BYC]
왼쪽부터 1980년대 공장 모습과 백양 메리야스 직매점 [사진제공=BYC]

메리야스, 아버지의 셔츠 속에 비친 순백의 런닝셔츠나 핑크색 내복처럼 편안함을 갖춘 홈웨어를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언뜻 일본어 느낌이 나지만 메리야스는 스페인어 ‘메이아스(Meias)’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해요. 

이를 부르기 쉽게 변형하면서 국내에선 ‘메리야스=속옷’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말이 개화기에는 양말을 통칭하는 말로도 쓰였다고 하죠. 그런데 뜬금없이 왜 양말이 속옷으로 분류됐을까요?

이 배경에는 국내 속옷 기업의 맏형 격인 BYC가 있습니다. 창업주인 한영대 회장은 BYC의 전신인 한흥 메리야스 공장을 77년 전인 1946년에 세웠습니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등의 영향으로 경제 전반의 어려움과 함께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기였습니다.

백양 구로공장 [사진제공=BYC]
백양 구로공장 [사진제공=BYC]

따라서 큰 편물을 짤 기계를 들일 여력이 없었던 한 회장은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양말 직조 기계 몸통을 개조해 내의를 만드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결국 양말 편직기에서 만든 속옷이 메리야스가 됐고, 자연스레 양말도 메리야스에 속하게 된 거죠. 

BYC가 한국 속옷 브랜드의 대명사로 불리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은 촌스럽게 느껴지지만 고유의 백양 마크가 붙은 새하얀 내의는 당시 끊임없는 연구의 결실이었습니다. 1958년 국내 최초로 아염소산소다 표백 기술을 도입해 변색이 적고 내구성이 높은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죠.

기성 속옷을 다양한 사이즈로 세분화한 기여도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1950년대 후반까지 속옷은 ‘대인용’과 ‘소아용’으로만 나뉘어 생산돼, 표준 사이즈 속옷에 몸을 맞춰야 했거든요. 

이에 1960년대 초부터는 국민의 가슴둘레를 조사해 성인용 제품 사이즈를 85·90·95·100cm의 4단계로 규격화했죠. 이후 국민 체격을 반영해 105와 110cm 등 대형 사이즈가 추가된 체계는 현재까지도 국내 패션업계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런닝셔츠와 팬티 디자인이 적용된 빼빼로, 질러 패키지 제품 [사진제공=BYC] 
런닝셔츠와 팬티 디자인이 적용된 빼빼로, 질러 패키지 제품 [사진제공=BYC] 

실제 1975년 상장 이후 적자를 낸 적이 없는 BYC의 효자템은 새하얀 런닝셔츠로, 여전히 수백만 장이 팔리는 등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 속옷 기업도 달라진 유통 산업 환경으로 인한 어려움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해외 SPA 브랜드와 속옷 직구 인기 등의 영향으로 성장은 차츰 둔화하는 데다 대리점 또한 줄고 있기 때문이죠.

이에 BYC는 신제품 연구·개발에 매진하는 등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기능성 신소재 ‘솔라터치(Solar Touch)’ 원사를 사용해 패션과 보온 기능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발열웨어 ‘보디히트’나 고기능성 냉감웨어인 ‘보디드라이’가 대표적입니다. 

BYC 모델 아린 [사진제공=BYC]
BYC 모델 아린 [사진제공=BYC]

신선한 얼굴을 활용한 홍보와 뉴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마케팅을 병행하기도 했습니다. 낡은 브랜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1999년생 가수 아린을 전속 모델로 기용하고 각종 협업에 나서고 있죠.

창립 73주년을 기념해 출시했던 추억의 빨간 BYC 양말 3종 한정판 1000세트는 일주일 만에 완판되기도 했습니다. 인기 육포 브랜드 질러와의 협업을 통해 내놓은 합작 DIY 팬티 ‘소리벗고 팬티질러’나 2020년 편의점 CU와 함께 내놓은 ‘BYC 빼빼로 패키지’에서도 하얀 런닝셔츠와 팬티, 빨간 내복 등 추억의 BYC 제품들이 패키지 디자인에 담겼죠.

지난해 6월에는 CU, 오비맥주와 협력해 수제맥주 ‘백양BYC 비엔나라거’를 새롭게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BYC가 1980년대에 사용하던 사명 백양이 그 시절 폰트와 이미지 그대로 디자인 돼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왼쪽부터 BYC 런닝셔츠, 반려견용 메리야스 [사진제공=BYC]
왼쪽부터 BYC 런닝셔츠, 반려견용 메리야스 [사진제공=BYC]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지난해 출시된 반려견용 ‘쿨런닝’과 ‘FW제품’입니다. 개가 사람보다 1~2도 체온이 높고, 몸에 땀구멍이 없어 무더위에 취약한 점을 고려해 특수 제작한 반려견용 쿨런닝은 메리야스와 개의 합성어, ‘개리야스’라는 별칭을 얻으며 빠르게 품절됐습니다.

친숙한 브랜드 감성을 물씬 살린 해당 제품들은 1990년대 이후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로부터 신선하다는 반응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계절 홈웨어 런닝셔츠부터 통풍성 좋은 소재로 무더운 여름을 책임지던 시원한 모시메리,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선물하던 빨간 내복. 

이처럼 77년간 실생활 깊은 곳에 스며 있던 토종 브랜드 BYC가 젊은 감성을 기반으로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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