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출간된 장 콕토의 소설 『앙팡 테리블』의 제목은 ‘무서운 아이들’의 대명사로 여전히 자주 쓰인다. 겁도 없이 발칙하고 젊음으로 무섭게 반짝이는 이들, 이전 세대가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쓸쓸히 반추하며 투영하기에 맞춤한 유망주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실제 콕토의 소설 속 아이들에게 그런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아가 된 남매 폴과 엘리자베트, 그들의 친구이자 역시 고아인 제라르와 아가트로 구성된 네 명의 아이들은 상실된 것을 극복하지 못해, 혹은 서로가 분리되는 것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 영원히 유
태초의 눈은 피부였다. 고대의 해양 생물은 빛에 민감한 피부의 한 부위를 통해 빛과 어둠을 구별할 수 있었고, 먹이를 향해 나아가거나 포식자를 피해 다닐 수 있었다. 빛에 민감한 이 부위가 차츰 발달하여 오늘날의 눈이 되었다. 눈이 항상 소금물에 젖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 기원이 바다에 있기 때문이다. 눈이 물체를 바라보고 색채를 구별해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빛에 민감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에세이스트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학』(작가정신 2023)에서 감각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뽐내며 다음과 같이 설명
라디오에서 성악가를 초청할 때면 진행자는 어김없이 그들을 ‘연주자’라고 칭한다. 그들의 목소리 또한 ‘악기’라는 명백한 사실을 번번이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음악은 어떤 식으로든 악기를 연주하는 행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에, 악기는 곧 음악의 기원과도 같다. 악기는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그 밀도를 달리하여 음률과 높낮이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이 놓인 장소를 전혀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공간 속에 또 다른 공간을 마련하거나, 공간 위에 공간을 포개어놓는다. 악기를 통한 공기의, 공간의 떨림은 언제나 연주자의 몸을 거친다는 점에서 사
동서를 막론하고 모자는 사회적 신분이나 직급을 가리키는 도구였다. 모두가 모자를 쓰고 있다면 어떤 모자를 쓰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테고 그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또한 금세 습득할 수 있을 테다. 이 사람 앞에서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려야겠지만 저 사람을 향해서는 모자를 쓴 채로 턱을 치켜들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모자를 쓰고 있는 와중에 저 혼자만 모자를 쓰지 않은 이가 있다면 어떨까. 그에게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와 저울질하여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늠할 수 있는
시인들에게는 실로 다양한 직업이 있다. 은행원도 시를 쓰고, 교사도 시를 쓰고, 형사도 시를 쓰고, 소방관도 시를 쓴다. 생활인으로서 마주치는 누군가가 어쩌면 시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묘하게 긴장이 된다. 볼일이 끝난 뒤에도 괜히 아무거나 더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는 자신의 생활을,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들여다보고 있을까. 은행 창구의 건조한 친절함은, 교탁 위의 공허한 열정은, 경찰서의 험악한 공기는 어떤 시를 맞이하도록 시인을 이끄나. 문경수의 첫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걷는사람 2024)를
한때 풍문으로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애증’이 성립할 수 있는 까닭이 사랑과 증오가 동일한 뇌 부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과학적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이야기는 듣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견 수긍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사랑을 옅게 희석한 것과 흡사한 관심이 일말이라도 있어야 증오의 감정도 생기는 법이니 말이다. 아주 조금의 관심도 없는 대상을 향해서는 애초에 증오는커녕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는 인터넷상의 오랜 관용어도 같은 이치에 닿아 있다. 애정과 증오가 뒤섞인 이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스 드브레는 그의 대표작인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문자와 언어에 대한 이미지의 우위를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이에 대한 근거로 ‘앨범’이라는 말이 ‘사전’이라는 말보다 어원학적으로 먼저 발생한 점을 짚는다. 또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산다는 것은 숨을 쉰다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것을, 죽는다는 것은 숨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시력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했었다고 지적한다. 그리스인들에게 누군가의 죽음이란 그가 ‘마지막 눈길’을 거둔 것이었다. 시각이라는 매개를 통해서야 이미지도 존재할 수 있고, 인간 또한 세계에 대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외로울까. 정면의 스크린을 일제히 바라보고 있지만 서로의 얼굴은 끝내 볼 수 없으니까. 시를 읽는 사람들은 모두 외로울까. 같은 시를 읽고 있을지라도 각자의 손에 들린 시집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뿐이니까. 도심의 인파 속을 걸을 때면 그토록 많은 이들이 물리적으로는 공존하면서도 존재론적으로는 철저히 혼자일 수 있다는 사실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실감은 없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바로 옆에 앉아 거의 똑같은 자세로 작은 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무명의 누군가와 내가 아무것도 공유할 거리가 없을 수
박솔뫼의 소설집 『미래 산책 연습』(문학동네 2021)은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사건의 역사적 면면을 치밀하게 탐구하거나 재현하기보다는 그저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산책한다. 화자는 이제는 부산 근대역사관이 된 미문화원 건물에 들어가 내부를 거닐어보고, 그 건물을 창가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아파트들의 내부에 들어가기 위해 부동산 매물을 구경한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구하게 된 집의 소유주 최명환은 젊었을 적 김은숙과 같은 성당에 다녔었던 일이나 사건 당일 근처에서 근무하던 중 불이 타는
개인적으로 심심한 영화의 최고봉은 이윤기 감독의 (2008)라고 생각한다. 1년 만에 불쑥 찾아와 빌려 간 돈을 당장 갚으라는 희주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병훈은 하루 동안 희주와 함께 자신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십시일반 돈을 꾸어 돈을 갚는다. 한때 사랑했었던, 헐렁하고 물렁하기 그지없는 성격의 병훈을 따라다니고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를 향해 한껏 날이 서 있던 희주도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진다. 소극장의 단막극처럼 단출한 장면들을 생동하게 해주는 두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가운데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영화 내내
루마니아 출신 작가 에밀 시오랑은 어느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선고받고 독배를 마시기 직전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 플루트를 부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죽기 직전에 이 곡조를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죽음 직전을 상상하는 것은 어딘지 고약하게 여겨지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그 순간 플루트를 연주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고 전하는 이야기 앞에서라면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다. 나아가 그가 하늘을 바라보거나 새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것은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소설 『메테오르』에서 “행복의 힘은 ‘주어진 것’과 ‘이룩한 것’이 적절한 비율을 지녀야 비로소 발휘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화적 이미지의 글쓰기로 유명한 이 작가의 행복론은 그의 명성과 크게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삶과 죽음, 하늘과 땅, 낮과 밤, 생물과 무생물과 같이 이질적인 양극단의 조화가 세상을 이끌어가듯이, 한 개인의 차원에서도 생의 전면과 이면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주어진 것에 비해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이룩하는 것은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것일까.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서울은 거대한 ‘시내’와 같았다. 지방의 도시에서 외출과 유흥을 위한 시내란 몇 군데로 한정된 데 반해 서울은 마치 도시 전체가 시내인 것처럼 끊임없이 들썩이고 출렁인다. 그러나 매끄럽고 말쑥한 대도시의 용모를 뽐내는 서울일지라도 그 뒷면을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전철과 버스가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승용차는 한 방향으로 간신히 드나들고 스쿠터나 두 다리로나 쑥쑥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잘고 잘은 골목들. 페인트를 두껍게 칠한 대문에 적벽돌로 쌓아 올린 연립주택들이 즐비하고, 각자의 생활이 뱉어낸 쓰레기
미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한 잡지에 게재한 에세이에서 오늘날의 거의 모든 일들이 실제로는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여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불쉿 잡』(민음사 2021)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의 서문에 실려 있기도 한 이 글에서 그는 실제로 유의미한 무언가를 생산하는 1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는 크게 줄어든 반면, 대중매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며 선망의 대상으로 소비되기도 하는 전문직, 사무직, 서비스직 등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는 크게 늘어난 점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환경미화원이나
어릴 적 놀이터에서 놀았던 기억을 더듬어보자. 계단을 타고 올라간 뒤 미끄러져 내려오는 게 전부이지만 꼭대기를 성채 삼아 함락 작전을 펼치던 미끄럼틀이 있고, 원심력을 이용해 진자운동을 하는 게 전부이지만 각자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두 명의 다리를 꽈배기처럼 꼬아 함께 허공을 달리며 바이킹 놀이를 하던 그네가 있으며, 원숭이처럼 상하좌우로 타고 오르는 게 전부이지만 그 미로 같은 지형을 활용하여 잡기 놀이를 하던 정글짐이 있다. 아이들의 상상력과 협동심, 공동체 의식 등을 자극하고 길러주기 위해 다채롭게 응용하여 놀 수 있게 만들어
1993년 개봉한 영화 는 사이버펑크 영화의 대표작으로서 복제인간 ‘리플리컨트’와 인간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근미래를 그리고 있다.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해 ‘저주받은 걸작’으로도 불리는 이 영화의 백미는 두 진영의 싸움보다도 주인공이 사랑하게 되는 레이첼, 즉 자신이 리플리컨트라는 사실을 모를 뿐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도 그저 인간으로 보이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우리를 향해 던지는 아이러니에 있다.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를 판별하는 테스트에서 그녀는 오히려 인간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기묘
먹는 행위가 숭고한 까닭은 그것이 음식을 씹어 삼켜 피와 살로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언가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 너와 나의 피와 살이 동일한 기원을 나누어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함께 마신 커피가 서로의 혈관을 조용히 타고 흐르는 시간, 함께 먹은 밥이 서로의 뼈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을 공유하는 만큼 서로의 존재는 각자의 육신에 돌이킬 수 없이 새겨진다. ‘같이 밥을 먹자’는 말이 정다운 안부 인사가 될 수 있는 까닭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한 밥상에 정성스레 차려진 음식들을 함께 나누자, 그것들을 서로
마크 스트랜드의 『빈방의 빛』(한길사 2016)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분석한 비평집이다. 호퍼의 그림이 주로 대도시의 고독한 익명의 삶을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받곤 하는 데 반해 그는 이 책에서 그림 속의 기하학에 주목한다. 건물이나 풍경의 선이 화면을 어떻게 구획하고 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빛이 어디서부터 오고 있으며 인물의 시선은 무엇을 쫓고 있는지. 화면 속에 정지한 사람과 사물의 방향성에 집중함으로써 스트랜드는 사각의 평면에 굳어 있는 그림을 안으로 깊이 파고 밖으로 확장시킨다. 그의 비평을 통해 호퍼의 그림은 고독의
자연은 인간 사회의 원료로 전락한 지 오래다.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땅이 파헤쳐지는 것은 예삿일이고 자원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애초의 자연환경과는 무관하게 효율성만을 고려한 농장과 지대가 대규모로 개간된다. 자원은 분자와 원자 단위까지 낱낱이 활용되고, 지구 반대편에서는 버려질 쓰레기가 지구 이편에서는 상품으로 소비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연을 가공하여 이루어진 세계를 자연인 양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는 태초의 자연을 희구하는가 하면, 그야말로 남획되는 자연의 신음에 귀 기울이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자연은 만사의
양영희 감독의 영화 (2022)는 감독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머니 강정희씨는 젊은 시절 제주 4.3 사건의 현장에서 도망쳐 일본에 정착한 뒤, 분단 과정에서 북한 공산당으로 이적하며 당에 의해 아들을 희생당한 기구한 사연을 갖고 있다. 어머니의 복잡한 삶의 행적을 따라 덩달아 상처받아야 했던 감독은 영화라는 매개를 빌려 그런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한다. 4.3 사건에 대한 고통으로 남한을 버리고 북한을 택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사랑하기도 하기에, 감독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