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 시간 기록 없는 ‘해외출장’ 사각지대...“물도 못 껐다”
산재 처리 돕겠다던 회사, 연락두절...입증 책임은 유족 몫
장시간 노동 1위권 한국…과로사 늘고, 산재 인정은 줄어
“유족 책임 완화 위해 ‘출퇴근기록’ 법적 보유·제출돼야”
CJEU, 사용자에 근로시간 기록·입증 의무 부과 판결도

지난 4월 과로로 숨진 홍상민씨의 장례식 제단. [사진제공=유족]
지난 4월 과로로 숨진 홍상민씨의 장례식 제단. [사진제공=유족]

【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최근 상장한 공조 설비 기업 C 주식회사에서 격무에 시달리던 홍상민(55·가명)씨가 지난 4월 9일 사망했다. 사인은 허혈성 심장병. 지병이 없었던 고인은 해외출장 중 욕실에서 물도 끄지 못한 채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됐다. 회사는 처음에는 산재 처리를 돕겠다고 나섰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락을 받지 않았다. 유족들의 희망은 고인의 휴대전화에 설치해 둔 위치 공유 어플리케이션과 통화 녹취록뿐이었다.

상민씨의 유족은 25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아버지는 평소 건강했지만 몇 달간 무리한 업무와 연속된 해외출장으로 몸이 극도로 소진됐다”고 밝혔다. 그는 “고인은 말레이시아에서 근무하던 중 브라질 출장까지 지시받았고 가족들은 무리한 일정이라며 만류했지만 회사는 개인 사정 고려 없이 업무만 강요했다”고 말했다.

유족은 상민씨가 말레이시아와 한국, 브라질을 오가며 장기간 과중한 해외 현장 업무에 시달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민씨는 임시 파견된 오창 현장에서 주 평균 57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하루도 휴식하지 못하고 32시간 비행 후 브라질 현장에 즉시 투입되는 등 극심한 누적 피로와 업무 부담을 떠안았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출장 시 지역 간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은 근무시간에 포함되는 것이 타당하다. 유족들은 비행 시간을 합산할 경우 고인의 업무시간은 주 83시간에 달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두 국가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총괄하며 인력·예산·일정 문제까지 단독으로 처리하라는 회사의 무리한 지시와 지원 부재가 과로사로 이어졌다고도 호소했다.

이들은 “지난 4월 인사관리팀의 직원이 유족에게 산재 신청과 후처리를 도와줄 것을 약속했지만 장례식 이후 몇 달이 지나도 돌아오는 사측의 답변은 없었고, 사과도 없었다”며 “한 달 뒤 받은 회사의 연락은 앞뒤 두서없이 고인의 퇴직 처리를 했으니 퇴직연금을 수령하라는 내용뿐이었다”고 했다.

고인의 사위인 김종현(32)씨는 “우리 가족은 욕실에서 물소리를 듣는 것조차 힘든 일이 됐다”면서 “이 나라에서 더 이상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이 같은 문제를 세상에 꼭 알리고 싶다”며 비통함을 토로했다.

투데이신문은 C 회사 측과 수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지난 4월 과로로 숨진 홍상민씨의 근로시간 산정표. 주 평균 57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과 32시간에 달하는 비행 시간이 더해져 주80시간이 넘는 총 업무시간이 기록돼 있다. [사진제공=유족]
지난 4월 과로로 숨진 홍상민씨의 근로시간 산정표. 주 평균 57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과 32시간에 달하는 비행 시간이 더해져 주80시간이 넘는 총 업무시간이 기록돼 있다. [사진제공=유족]

최근 과로사 산재 승인율, 2018년 법안 개정 이후 계속 하락세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우리나라의 연간 근로시간은 1927시간으로 멕시코·코스타리카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것으로 나타났다. 장시간 노동은 매년 500명 이상의 과로사 문제로 이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과로사는 업무상 과도한 육체적·정신적 부담과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뇌·심혈관계 질환이 새로 유발되거나 기존 질환이 악화돼 발생하는 돌연사·사망을 말한다. 국제적으로는 뇌혈관질환(뇌출혈·뇌경색)과 심장질환(심근경색·협심증 등)이 주요 원인으로 분류되며, 고인의 사인으로 확인된 허혈성 심장병 또한 대표적인 과로사 원인으로 꼽힌다.

특히 과로사가 산재로 승인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 문제적이라는 지적이 있어 왔다. 과로사 유족들은 근로시간·업무강도 등 핵심 자료를 기업이 제출하지 않거나 축소하는 바람에 입증 책임이 사실상 가족에게 전가되는 구조적 한계를 반복적으로 호소해 왔다.

이에 2018년 정부는 국내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과로사를 예방하기 위해 산재 인정기준을 개정하며 기준을 손질했고, 그 결과 승인율이 한때 상승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개정된 ‘뇌혈관질병 또는 심장질환의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은 기존의 장시간 노동 기준을 조정하고 야간·휴일근로, 교대제 등 노동 강도를 높이는 다양한 요인을 함께 고려하도록 해 인정 범위를 넓혔으며 업무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엄격한 의학적 판단에만 의존하지 않고 사회통념상 상당인과관계를 반영한 것도 중요한 변화로 꼽혔다.

하지만 이후 흐름은 반대였다. 개정 직후인 2018년 과로사 산재 승인율은 약 43%대로 반등하며 제도 개선 효과가 나타나는 듯 보였지만 2019년 승인율은 40% 초반으로 떨어졌고, 2020년(39.1%)과 2021년(36.8%)을 지나며 30%대 중반 수준으로 추락했다. 지난 6월 기준으로는 32.1%를 기록했다. 과로로 사망한 이들 3명 중 1명만이 산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셈이다.

기준이 일부 완화됐다고는 하지만, 노동자가 과로로 숨졌다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는 여전히 ‘근로시간’이다. 동시에 과로사 유족들에게 가장 큰 장벽 또한 이 근로시간을 입증하는 일이다. 과로사가 발생하면 기업들이 근로시간 기록 제출 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관행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입증책임, 여전히 유족에게...‘해외출장자’는 최소한의 기록조차 없어

런던베이글뮤지엄에서 과로사한 20대 청년의 사례에서도 나타났듯 대부분의 기업들은 근로시간 입증에 있어서 굉장히 소극적이다. 그들에게는 근로기준법상 ‘입증책임’, 즉 노동자들이 얼마나 일했는지 직접 증명할 책임이 없는 탓이다. 런던베이글뮤지엄 측은 20대 청년의 유족이 근로시간 기록을 요청하자 “출퇴근기록 지문인식기기가 고장났다”는 이유로 넘겨주지 않았다. 유족들은 메신저 기록과 교통수단 이용 내역을 통해 직접 고인의 근로시간을 산정해야만 했다.

상민씨의 유족 역시 과로사로 산재를 신청하려 했지만 사측에서 연락을 돌연 끊어버린 바람에 입증책임을 떠안게 됐다. 이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는 “가족끼리 함께 쓰는 위치 공유 어플리케이션과 비행기 티켓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겨우 근로시간을 추정할 수 있었다”고 했다.

특히 고인의 사위 김씨는 본보에 “기업들은 해외출장자의 근로시간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면서 “현재 대기업에서 일하는 중이어서 알고 있다.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많은 대기업에서도 해외출장자에 대한 근로시간은 ‘출장 중’으로 기록할 뿐 전혀 관리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해외출장자의 경우 현지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이 어렵고 국내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에 비해 고립되기 쉬워 업무 강도는 올라가지만 근로시간을 입증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장거리 출장의 경우 이동만으로도 법정 근로시간인 주 52시간 한도를 넘기기 쉽고 긴 시간의 시차가 발생하는 만큼 근로시간을 어떻게 산정할지부터 난관에 부딪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노동인권실현을위한노무사모임(이하 노노모) 김은풍 노무사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국내 사업장은 지문인식기기처럼 근로시간 기록 시스템이 적게나마 갖춰져 있지만, 해외출장자는 그런 시스템이 일체 없어 근로시간을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해외에 현지 법인이 있는 기업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지만, 단발성·단기 출장의 경우에는 관리가 부실한 게 일반적”이라고 설명했다.

2017년 발족한 과로사 OUT 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출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기업 책임 도려낸 과로사예방법,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지난해 6월 더불어민주당 박해철 의원이 대표발의한 ‘과로사 예방 및 근로시간 단축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하 과로사예방법)’은 일본의 ‘과로사 등 방지대책 추진법(2014)’과 그 내용이 닮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체적으로 과로사예방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과로사 예방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책임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마련됐다. 법안에는 고용노동부, 중앙행정기관장 및 시·도지사가 과로사 예방 계획을 마련하고 정책 근거를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이 주축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노동계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정작 과로사와 가장 가까운 주체 중 하나인 ‘기업’에 대한 내용이 “사업주가 법정 근로시간을 단축할 경우 정부가 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한다”는 보조 및 지원 성질의 한 줄뿐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과로사 등 방지대책 추진법은 과로사와 과로 자살의 법적 정의를 마련하고 사회 전반에 예방 인식을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법 제정 이후에도 과로사가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지 않고 산재 승인율마저 하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전문가들은 이런 한계에 대해 기업 규제 같은 핵심 구조적 문제를 다루지 않은 데 있다고 분석한다. 상징적 선언에 그친 입법만으로는 장시간 노동 관행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과로사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며 정부와 국회를 중심으로 출퇴근기록 의무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기업들의 반발에 의무화 시점은 안갯속인 실정이다.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노노모 김 노무사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출퇴근기록 그 자체가 법적으로 보유되고 기록돼야 하며, 기록 의무와 제출 의무가 함께 부여돼야 한다”면서 “필요하면 근로자도 자신의 근로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법제화의 필요성에 대해 “휴게시간, 연장·야간근로 문제까지 모두 근로시간과 관련돼 있다”며 “기록과 제출 의무가 생기면 노동권이 상당히 개선되고 과로사에 대한 유족들의 입증 책임도 완화된다”고 했다.

기업들의 반대 논리에 대해서는 “장시간 근로가 기록되기 때문에 주 52시간제를 무시하기 어려워지고 기업 스스로 자정 효과가 생길 것”이라며 “장시간 근로가 줄면 산재 예방 효과가 있고 불필요한 근로시간이 줄어 인건비 측면에서도 결과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위 김씨 역시 본보에 “국가의 미온적인 대처와 기업의 무책임한 태도가 이어져 오면서 대한민국 청년들이 노동을 더 두렵게 여기게 됐다”며 “근무기록이 없으면 임금을 무엇을 근거로 지급하는지조차 의문”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기업이 출퇴근기록 의무화를 반대하는 것은 책임 회피 외에는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EU 일부 국가에서는 사용자가 근로시간을 기록·입증해야 한다는 판례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근로자의 일정·주간 근로시간 상한과 일일·주간 휴식시간 보장은 기본권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단순히 법률에 ‘근로시간을 제한한다’고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실제 근로시간이 언제, 얼마나 이뤄졌는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스페인 고등국가법원인 아우디엔시아 나시오날(Audiencia Nacional)은 2019년 1월 스페인 대표 노조인 CCOO(Comisiones Obreras)가 도이체 은행에 근로자의 실제 근로시간을 기록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에 대한 법적 판단을 위해 유럽연합 사법재판소(CJEU)에 관련 EU 법령의 해석을 요청했다.

CJEU는 같은 해 5월 이 사건에서 “근로시간을 언제 얼마만큼 일했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면 근로자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며 근로시간 기록 시스템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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