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탁금·선거비용, 청년 정치 가로막는 첫 장벽
‘돈만 준비된 정치인’ 양산하는 불공정한 선거판
선거공영제 확대·모금한도 정비, 제도 해법 시급
청년 정치인 육성 위해 금전적 지원 제도 필요
‘청년 정치’라는 말은 특정 세대의 정치 참여를 강조하기 위해 1980~90년대부터 점차 자리 잡은 표현이다. 그런데 중년 정치, 노년 정치는 없는데 유독 청년 정치라는 말이 그렇게 많이 회자되고 고유명사화 된 이유가 있을까.
사실 ‘청년 정치’라는 명칭은 청년들이 스스로 규정한 자기 호칭이 아니다. 이는 기성세대 정치인들이 그들의 시각과 잣대에 따라 청년이라는 세대를 갖다 붙여 기성 정치의 단점과 부족함을 보충하려는 의미가 더 짙다.
그래서 청년은 늘 변화와 미래의 상징으로 기성세대의 필요에 따라 소비돼 왔다. 기성 정치권은 그들이 곤궁에 처했을 때 청년 정치를 내세워 돌파구를 마련하곤 한다. 그리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청년을 버렸다.
이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청년 정치인을 만나볼 수 없었던 우리 정치의 불행이다. 결국 청년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구호와 장식물로 소비돼 왔을 뿐이다. 투데이신문은 심층기획 ‘청년팔이 정치’를 통해 청년 정치가 처한 구조적 모순과 현장의 목소리에서 그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투데이신문 강지혜 기자】정치에 도전한 청년들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벽은 다름 아닌 ‘돈’이다. 출마를 위해 기탁금은 물론 선거운동에 막대한 비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지난 4·10 총선에서 후보 1인당 평균 지출액은 약 1억6003만원으로 집계됐다. 평균월급(2023년)이 20대가 263만원, 30대가 386만원에 그치는 상황에서 청년에게 정치란 애초에 감당하기 어려운 ‘값비싼 꿈’인 셈이다.
‘억’ 소리 나는 선거판은 필연적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을 낳는다. 공보물, 현수막, 유세차량까지 선거 기간 중엔 숨 쉬는 것 빼고 모두 돈이다. 결국 전문직·부유층·정치인 자녀들이 독식하는 판이 이어지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그나마 가능했던 과거와 달리 오늘의 청년 정치 현실은 개천 자체가 메말랐다. 능력과 열정만으로는 정치 무대에 오르기 어렵고 막대한 자금과 조직을 등에 업은 ‘기득권의 아들’들만이 살아남는 구조 속에서 청년의 정치 진입로는 사실상 봉쇄돼 있다.
‘돈 먹는 하마’ 선거비용
선거에 출마하려면 드는 비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후보 등록 시 내야 하는 ‘후보 등록 기탁금’과 ‘정당 기탁금’이 있다. 이후 선거 운동 때 드는 ‘예비 선거 운동비용’과 ‘본 선거 운동 비용’도 있다. 공보물 제작·현수막 게시·유세 차량 운영·현장 인건비 등은 모두 선거비용으로 환산되며 결국 후보자의 주머니나 후원·조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후보자 난립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도입된 기탁금은 청년에게 정치를 도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공직선거법 제56조에 따르면 기탁금은 대통령선거는 3억원, 지역구국회의원선거는 1500만원,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는 500만원, 시·도의회의원선거는 300만원, 시·도지사선거는 5000만원, 자치구·시·군의 장 선거는 1000만원, 자치구·시·군의원선거는 200만원으로 규정돼 있다.
다만 청년에게는 일부 감면 규정이 있다. 기탁금은 30세 이상 39세 이하면 30%, 만 29세 이하면 50% 할인받을 수 있다. 기탁금 반환 기준은 일반 후보자의 경우 득표율 15% 이상에서 전액, 10% 이상 15% 미만이면 반액을 보전받는다. 만 39세 이하 청년 후보자는 득표율 10% 이상이면 전액, 5% 이상 10% 미만 득표한 경우에서 반액을 보전받을 수 있다. 정당별로 정책은 다르지만 만 39세 이하 청년은 기탁금을 감면받는 경우가 많다.
젊은 정치인 양성에 나서고 있는 비영리 스타트업 뉴웨이즈가 분석한 실제 출마 비용을 살펴보면(2022년 지방선거 기준), 만 39세 이하 후보자가 지역구 기초의원에 출마할 경우 약 3540만원이 든다. 기탁금 140만원(만 29세 이하는 100만원)과 평균 선거비용 3400만원이 포함된 수치다. 지역구 광역의원 출마 시에는 약 4710만원이 필요하다. 기탁금 210만원(만 29세 이하는 150만원)과 평균 선거비용 4500만원을 합한 금액이다.
반면 비례대표로 출마할 경우 개인 선거운동이 제한되고 정당이 선거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기탁금만 내면 된다. 기초의원은 140만원, 광역의원은 210만원이다.
‘빈익빈 부익부’ 정치 구조
수천만 원에 달하는 선거비용을 대출이나 정치펀드 형태로 마련할 수도 있지만 인지도와 지지기반이 약한 청년 후보가 단숨에 거금을 모으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창석 정치평론가는 저서 <스물 아홉, 취업 대신 출마하다>에서 청년으로서 정치 입문 과정에서의 고충을 절절하게 밝힌 바 있다. 2016년 1월 12일 당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당대표의 영입 인사로 정치계에 입문한 그는 부산 사하(을) 예비 경선에서 승리했지만 최종 낙선했다.
그 과정에서 선관위에 1500만원의 기탁금과 정당 기탁금 200만원, ARS 비용 1600만원이 필요했다. 여기에 정당 점퍼, 홍보용 웹 포스터, 명함 제작비부터 사무실 임대비, 차량 렌트비, 기름값, 밥값 등이 추가됐다.
예비경선 과정에서만 수천만원이 들었고 선관위 기탁금은 일정 득표율 이상이면 반환받을 수 있었지만 정당 기탁금과 ARS 비용은 고스란히 사비로 남았다. ‘예비’라는 문구가 박힌 명함과 점퍼도 본선에서는 사용할 수 없어 비용은 또 추가됐다. 그는 결국 정년을 3개월 앞둔 공무원 아버지의 퇴직금 담보 대출로 비용을 마련했다. 그 결과 2년에 200만원 정도 받을 수 있던 연금은 10년 동안 100만원대로 줄었다.
오 평론가는 저서에서 “정치가 이렇게 금전적 진입장벽이 높다면 신념이나 철학, 정책보다 ‘자금력’을 가진 사람만이 다가갈 수 있는 공간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선거판에 몸담았던 정치권의 한 관계자도 “실제 낙선한 후보 중 빚더미에 앉거나 생계를 위해 정치의 꿈을 접어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전했다.
이처럼 청년이 정치인의 꿈을 이루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른바 ‘금수저’들에게는 충분히 해볼 만한 꿈으로 여겨진다. 억대에 달하는 선거비용제한액을 꽉 채워 쓸 수 있는 금전적 여유로움은 ‘흙수저’ 청년 후보에게는 애초에 공정하지 못한 출발선이다.
출마 선언문이나 공약은 비용만 지불하면 높은 수준의 결과물로 대리 작성이 가능하고 선거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정치과외까지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다. 또한 ‘부의 세습’의 연장선에서 가업 승계의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공적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정치인 만들기’를 택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 컨설턴트는 “출마선언문 하나가 수백만 원에 달하기도 한다”며 “자금 여력이 있는 후보들은 당선만 되면 된다는 식이라 가격을 마음대로 높이기도 한다”라고 귀띔했다. 이어 “이들은 청년이 직면한 취업·주거 문제를 피부로 겪어본 적이 없어 실질적인 법안이나 정책을 내놓기 어렵고 주체적으로 정치에 임하지 않아 기득권 정치인과 다를 바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선거캠프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도 “청년 후보 중 유명 유튜브 채널 출연에 수천만 원을 투입한 경우도 있었다”며 “정책이나 현안 공부보다는 유튜브 출연을 통해 손쉽게 정치권에 진입하려고 한다”고 꼬집었다.
결국 지금의 구조는 ‘돈’만 준비되고 ‘정치력’은 준비되지 않은 정치인만 양산하는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다. 자금 여유가 있는 후보는 수차례 도전이 가능하고 정치인으로서의 역량도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들에게는 유리한 구조가 고착화되는 셈이다.
벽 뒤에 벽, 닫힌 문 여는 열쇠는
법 개정을 통해 청년 후보자 지원이 일부 확대됐지만 출마 자금은 여전히 청년 정치의 가장 높은 장벽으로 남아 있다.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청년에게 정치 참여는 여전히 어렵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탁금과 선거비용은 청년 정치에 있어 가장 큰 진입장벽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탁금 제도의 효용성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효연 고려대학교 법학연구원 연구교수는 논문 ‘젊은 세대의 정치적 대표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공직선거법과 정당법 개정의 한계와 개선방안’에서 “국제의회연맹(IPU)은 선거비용 제한과 관련해 각 정당이 젊은 후보자에게 더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해야 선거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다고 권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미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등에서는 기탁금 제도가 없고 운영하는 국가들도 일부를 제외하면 액수가 높지 않다”고 설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일본 중의원 선거(약 3360만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가에는 20만원부터 90만원까지 100만원 이하로 기탁금이 책정돼 있다. 경제력 수준과 기탁금 액수 간에 뚜렷한 비례성은 없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김 연구교수는 “현행 공직선거법은 기탁금을 납부할 수 있는 경제적 자립이 곤란한 입후보자의 상황을 반영한 다른 선택적 수단을 규정하지 않은 점에서 헌법적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기탁금과 실제로 소요되는 선거의 비용은 현재 청소년을 포함한 젊은 세대들에게 정치참여의 진입장벽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공정한 경쟁을 통한 공정한 선거참여 기회를 부여하고자 한 공직선거법상의 취지에도 반한다”며 “젊은 세대의 정치적 대표성이 약한 현 시점에서는 이들의 정치진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참여가 특정계층의 전유물로 활용돼 온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청년 정치인을 위한 선거비용 지원도 다양한 차원의 노력과 변화가 요구된다. 비영리 스타트업 뉴웨이즈는 보고서 ‘젊은 정치인 육성 및 지원을 위한 쟁점 과제’에서 “더 많은 청년 정치인을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서는 출마 시 재정적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자기 자금이 부족한 청년 정치인을 위해서는 법정 정치자금 모금 한도의 증액이 필요하고, 현재 후보자 모금 한도와 선거비용 제한액의 괴리를 해소해 두 상한을 동일하게 맞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가가 선거운동 비용을 일정 부분 보조하거나 보장하는 제도인 선거공영제를 확대하고 현행 득표율을 기준으로 하는 선거비용 보전 기준이 정치 신인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어 하향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의회 선거에서 비례후보자는 후원회를 둘 수 없게 돼 있는데 청년 정치인이 비례대표 비율이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해 비례대표 후보자에게도 후원회를 허용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박혜민 뉴웨이즈 대표는 “기초의원 선거만 해도 평균 2000~3000만원, 억대 비용이 드는 경우도 있다”며 “후원회가 있어도 세력이 없으면 1500만원도 못 모은다. 자금력은 지지 기반에서 나오는데 청년은 그러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결국 청년 정치의 가장 큰 장벽은 ‘돈’”이라며 “더 이상 돈의 논리에 꿈이 좌절되지 않도록 청년들이 독자적인 세력화와 정치인 육성, 자기 경쟁력을 갖추는 시스템과 법적·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