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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 시효의 시작은 성폭력으로 인한 피해가 현실적으로 나타난 시점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19일 ‘체육계 미투 1호’로 알려진 전 테니스 선수 김은희씨가 성폭력 가해자인 테니스 코치 A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1억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씨는 초등학생 시절인 2001년 7월부터 2002년 8월까지 A씨에게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지난 2018년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이는 체육계 1호 미투 사건으로 불렸다.

김씨는 2012년 성인이 된 뒤 미성년자 성폭행의 공소시효가 폐지된 것을 알고 A씨를 고소하려 했으나 증거수집 등 난항을 겪어 좌절됐다.

이후 2016년 김씨는 한 테니스 대회에서 A씨를 우연히 마주친 뒤 피해 당시 기억이 떠올라 두통과 수면장애, 불안, 분노 등의 증세에 시달렸다.

같은 해 6월 병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은 A씨는 2017년 다른 피해자의 증언 등을 확보해 A씨를 고소했다. A씨는 2018년 10월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확정됐다.

김씨는 2018년 6월 PTSD 등 고통을 받았다며 A씨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에서는 A씨가 답변서를 내지 않아 무변론으로 진행됐고, 김씨가 승소했다. 이에 A씨는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며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민법상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는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부터 2년 또는 불법 행위를 한 날부터 10년이고, 범행한 지 10년이 지나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은 김씨가 PTSD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10년까지 손해배상 청구권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손해배상 청구에서 장기소멸시효 기산일은 손해 발생이 현실적인 것이 됐을 때를 의미한다”면서 “원고가 처음 진단을 받은 2016년 6월 손해가 현실화했다고 봐야 한다”고 1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도 “성범죄로 인한 PTSD가 뒤늦게 나타나거나 직후 증상이 발생해도 당시에는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질환으로 진단될 수 있을지 예측이 어렵다”면서 “장래의 손해 발생 여부가 불확실해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고, 장래 손해가 발생한 시점에는 소멸시효가 완성되는 부당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면서 원심 판단이 정당하다고 봤다.

대법원의 이 같은 판단에 여성계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김씨를 지원한 한국여성의전화는 이날 판결 이후 보도자료를 내고 “이번 판결은 성폭력 민사소송에서 PTSD 진단 시점을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의 기산점으로 인정한 최초의 대법원 판결”이라며 “성폭력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평가했다.

이어 “성폭력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현실화한 이번 판결은 단순히 한 사람의 권리구제에 그치지 않는다”면서 “이번 판결을 통해 성폭력 피해자가 민사소송으로 더욱 실질적이고 적극적으로 손해배상청구 권리를 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돈’과 결부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사회의 인식 또한 바꿔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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