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수, 뱀파이어 슬레이브 <사진제공=오디컴퍼니(주)>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을 고통 속에 살아오던 한 남자. 신의 저주를 받아 신선한 피를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불사의 존재, ‘드라큘라’. 악마(Nosferatu)라 불리는 그에겐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 바로 그녀의 환생과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다. 

아름답고도 애절한 판타지 로맨스, 뮤지컬 ‘드라큘라’가 4년 만에 더욱 새롭게 돌아왔다. 이번 작품은 오디컴퍼니가 제작한 브로드웨이 버전으로, 지난해 개막했던 메이커스프로덕션의 체코 버전과는 등장인물부터 스토리라인까지 완전히 다르다.  

뮤지컬 ‘드라큘라’는 아일랜드 소설가인 브램 스토커가 흡혈귀 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시킨 동명 소설(1897년 작)을 원작으로 한다. 땅에 묻혔던 시체가 되살아나 사람들을 공격하는 흡혈귀 이야기는 이전에도 소설화된 적이 있으나 구전 설화와 다양한 문학 작품을 종합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드라큘라’ 원형을 만들어내긴 이 소설이 처음이었다.

소설은 등장인물의 일기와 메모 형식으로 실감나게 작성돼 있으며, 연인 엘리자벳사를 잃은 드라큘라 백작이 초능력을 토대로 영원한 삶을 이어가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피를 얻는 과정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끌릴 수밖에 없는 드라큘라의 매력은 이번에도 확실하게 통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모든 감각을 일깨우고,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하는 캐릭터가 선사한 황홀경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작품 속 등장인물이 된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공포 문학의 원류이자 흡혈귀 문학의 고전으로도 손꼽히는 그의 작품은 이렇게 뮤지컬로 새로이 태어나면서 또 다른 생명력을 얻었다. 
   
특히 이번 브로드웨이 뮤지컬 ‘드라큘라’는 신비로운 분위기와 극적인 전개, 압도적인 무대를 선보이며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드라큘라 신드롬’을 예고한다.

김준수, 임혜영, 이충주 <사진제공=오디컴퍼니(주)>

작품은 2001년 미국 샌디에이고 라호야 플레이하우스(La Jolla Playhouse)에서 첫 공연을 올린 후 다양한 수정과 워크숍을 거쳐 2004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입성했고, 한국에서는 2014년에 초연됐다. 드라큘라 캐릭터에 대한 설정이나 해석은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 작품에선 영원한 사랑을 갈구하는 드라큘라의 욕망과 고뇌를 주요하게 담았다.

빅토리아 시대가 끝나갈 무렵, 트란실바니아의 영주 드라큘라가 영국 토지 매입을 대신해 줄 변호사 조나단과 그의 약혼녀 미나를 성으로 초대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미나를 처음 본 순간, 오래도록 기다려온 엘리자벳사의 환생임을 직감한 드라큘라는 연인을 되찾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미나 역시 낯선 상황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드라큘라를 향한 본능적 이끌림을 완벽하게 거부하지 못한다.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결국 드라큘라는 미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루시를 이용한다. 갑작스레 변해가는 루시를 치료하기 위해 ‘드라큘라 헌터’ 반 헬싱 교수가 찾아오게 되고, 그는 이 모든 일의 원인에 드라큘라가 있음을 지목하며 드라큘라를 제거하지 못하면 엄청난 재앙이 다가올 것이라 경고한다. 좁혀오는 포위망에 위기를 느낀 드라큘라와 뒤늦게 깨달은 사랑을 지키려는 미나. 죽음조차 가르지 못한 두 사람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환상적인 전설의 세계로 이끈다. 
 
고전미를 살린 클래식 선율에 팝과 록이 더해진 음악은 뮤지컬 ‘드라큘라’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웃는남자’로도 많은 사랑을 받아온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을 맡아 오래전부터 전해진 드라큘라 전설에 현대적인 감각 뿐만 아니라 세련된 스타일까지 살렸다. 특유의 화려하고 중독성 있는 넘버는 작품 전체에 녹아들며 관객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진다. 흥미로운 스토리라인을 타고 흐르는 멜로디가 반복적인 리듬을 따라 서정적이고도 강렬하게 각인되는 느낌도 좋다. 

<사진제공=오디컴퍼니(주)>

더욱 섬세해진 무대 구성과 연출 역시 인상적이다.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를 압축해서 옮길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은 바로 장면 간 개연성이다. 원작을 미리 접한 관객이나 재관람 관객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인물의 감정선을 완벽하게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드라큘라’처럼 적지 않은 내용을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 풀어내기란 더더욱 쉽지 않다. 이에 뮤지컬 ‘드라큘라’는 세심한 수정과 보완작업을 통해 전체적인 상황과 관계성을 눈으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도록 관련 소품을 추가하거나, 주요 넘버와 함께 과거의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무대 위로 풀어놓으면서 최대한 이해를 도왔다. 또, 변경된 무대 세트를 앞으로 당겨 관객과의 거리를 좀 더 가깝게 좁혔다. 

하지만 다소 아쉬움이 남는 장면도 분명 있다. 안개 낀 밤, 드라큘라에게 매혹되는 루시의 모습은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어진 미나의 대사를 통해 그녀가 평소에도 깊이 잠들지 못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으리라 미루어 짐작이 가능한 정도다. 드라큘라의 분노로 희생양이 되고 만 루시지만, 미나를 향한 드라큘라의 감정에 서서히 몰입하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약간의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 지점이다.

작품의 웅장한 분위기는 무대 곳곳에서 드러난 19세기 유럽 고딕풍 디자인으로 신비롭게 표현됐다. 곳곳에 스며든 안개도 강렬한 색채의 조명과 대비되며 더욱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무대 위로 자리한 4중 회전 턴테이블과 플라잉 기술(Flying)이 펼치는 입체적 무대예술은 시선을 거둘 틈 없이 긴박하게 전환된다. 9개의 기둥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일정하게 맞물려 돌아갈 땐 짜릿함이 감돈다. 인물의 움직임이나 공간 이동에도 이질적인 느낌이 없으며, 어느새 꿈인 듯 현실 같은 상황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한꺼번에 날아드는 박쥐나, 드라큘라의 그림자 등 영상으로 표현되는 장면들 역시 몰입도를 높인다.  

전동석, 뱀파이어 슬레이브 <사진제공=오디컴퍼니(주)>

캐스팅 또한 화려하다. 먼저 주인공 드라큘라 역에는 김준수와 전동석, 그리고 스페셜 캐스트 류정한이 열연한다. 그중 유일하게 처음 드라큘라 역을 맡게 된 전동석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매력을 선사하며 줄곧 감탄사를 자아냈다. 홀리듯 아름다운 외모에 섬세한 손짓, 굵직하고 안정적인 음성, 어떤 순간에도 주저함이 없던 그의 움직임은 드라큘라의 확신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특히 전동석의 ‘Fresh Blood’는 지금까지 들었던 것과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그들의 과거 이야기가 담긴 ‘She’나 ‘Loving You Keeps Me Alive’를 부를 땐 괴물이나 악마가 아닌, 그저 따뜻한 심장을 가진 한 남자의 간절한 세레나데로 느껴져 더 뭉클하다. 다가올 위험을 알면서도 결국 운명을 받아들인 미나의 결정이 완벽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드라큘라의 영원한 사랑’ 미나로는 조정은과 린지, 임혜영이 캐스팅됐다. 애절한 연기와 아름다운 노래로 초연에서 이미 멋진 무대를 선보였던 조정은은 더욱더 깊어진 감성으로 오랜만에 다시 돌아와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전했다. 세밀한 표정과 울림 가득한 음성에는 복잡한 심경이 모두 담겼다. 뒤늦게 찾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쓰는 모습 또한 몹시 애처롭고 슬프다. ‘Please Don’t Make Me Love You’를 부를 때 감정은 절정에 이른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대단한 무대 장악력을 보여준 조정은의 미나는 마치 한 폭의 맑은 수채화를 그려낸 듯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오랜 기간 드라큘라를 추적하며 그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려 애쓰는 반 헬싱 역엔 손준호가 등장해 극의 긴장감을 높였다. 드라큘라의 숙적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 그는 2막에서 더욱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의지로 가득 찬 눈빛, 사명이라 여긴 일의 끝에서 절규하던 그의 음성은 여전히 잊히지 않을 만큼 묵직하다. 

미나의 절친한 친구로 드라큘라의 첫 희생양이 되는 루시 역 이예은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미나와 달리 밝고 호기심 가득한 모습은 배우의 톡톡 튀는 매력 덕분에 중반부로 갈수록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 또한, 조나단 역 진태화는 신사다운 모습으로 끝까지 미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을 멋지게 그려냈으며, 랜필드 역 김도현 또한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진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뱀파이어 슬레이브의 아찔한 유혹 역시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전동석 <사진제공=오디컴퍼니(주)>

작품을 보고 나온 순간 곧바로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필름처럼 스치는 장면들, 가슴을 울리는 음악이 머릿속에 맴돌며 자꾸만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토록 기다린 사랑에 상처받고 괴로워하던 드라큘라, 다가올 미래를 알고도 기꺼이 그와 운명을 함께 하리라 결심한 미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커다란 깨달음을 얻게된 이들의 마지막 선택은 꽤 오랫동안 진한 잔상으로 남았다.

▲ 최윤영(아나운서/공연 칼럼니스트)

2020년 2월 11일부터 6월 7일까지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되는 이번 뮤지컬 ‘드라큘라’엔 기존 뮤지컬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특별함이 가득했다. 보편적이지만 때론 감춰야 한다 여겨지는 감정들, 때론 위험하게 관능적이면서도 지극히 순수한 사랑의 모습은 잔잔하게 번져가는 파동처럼 일어나 깊은 감동으로 남았다. 본능에 감춰진 진심의 무게가 희생으로 완성될 때, 그 가운데선 영원이라는 가치가 빛나고 있었다.

홀연히 날아든 드라큘라의 초대장. 그 안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담겼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의 손길을 따라 위험하면서도 황홀한 판타지의 세계로 한 번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그에게 한 번 빼앗겨버린 마음을 다시 찾기란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뮤지컬 ‘드라큘라’ 공연장인 샤롯데씨어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감염 방지를 위해 극장 출입구에 열화상 감지 카메라를 설치하여 전 관객을 대상으로 체온을 측정하고 있었습니다. 공연장 내 모든 스태프는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고 있었으며, 주기적으로 특별 방역도 실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에게도 개인 마스크 착용이 권장됩니다.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꼭 동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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