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의 점검
‘정체성’에 집중하고 호소하는 정치를 점검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의 정체성에 집중하는 전략은 사회적 소수자들을 결집하게 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이러한 전략에 자신의 ‘기준’과 이권을 빼앗긴다고 여기며 분노를 느껴온 사람들을 자극하는 극우 포퓰리즘 역시 효과를 보고 있다는 한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체성 정치’의 방향을 점검하며 모두가 포함되는 세상으로 향해야 할 정치와 사회운동이 퇴보하지 않도록 한계를 직면하고 변화를 고민해야 합니다.
‘소수자 타이틀’ 뿐인 기존 권력체계를 유지시키는 정치인
지난해 4·15 총선에서는 국회의원 300명 중 여성이 57명 당선되며 ‘역대 최다 당선’을 기록했으나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여성 국회의원 비율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성비도 참담하지만, 19%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 국회의원들이 정말 여성을 대표하고 있는지 따져보고 싶습니다. 여성이라는 소수자 정체성을 기반으로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대변하고 있냐는 점입니다. 여타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가부장제, 비장애중심/시스헤테로(생물학적 성별을 자신의 성별로 여기는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성별이 여성인 것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여성뿐만 아닙니다. 장애인이든 성소수자든 이주배경을 가졌든 또는 청년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가진 소수자성을 기반으로 배제된 사람들의 곁에 서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하나의 소수자성은 그저 타이틀일 뿐 자본에 결탁한 권력의 카르텔을 유지하는 정치를 하는/하려는 사람의 ‘소수자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 무슨 일을 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민주화 운동을 했든 인권변호사를 했든 지금은 노동자의 편에 서지 않는, 정치인의 ‘공보물에만’ 있는 이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자신을 여전히 독재정권과 싸우던 약자로 정체화하는 행태는 매우 해롭습니다. 자본의 편에서 현재 권력체제의 중심축이 된 자신들의 모습을 숨기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다루는 것만으로 할 일 다했다는 정치인
정체성 정치를 다양성의 관점에서 비판한다면, 사회적 정체성의 중요성을 다룬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을 다루는 것만으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믿게 만든다’는 것이 비판받아야 할 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치의 역할인 자본에 개입하고 적절한 분배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지 않고/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허락된’ 소수자 정책을 전시하며 소수자 인권이 엄청나게 증진된 것처럼 여기게 만들면서 철저하게 자본가 중심으로 설계돼 있는 체제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정체성 정치와 계급운동의 조우
기존의 자본가 중심의 권력체계와 결탁한 정치는 정체성 정치를 내세우면서도 계급 문제를 해결할 의지는 없어 보입니다. 반쪽짜리에 머문 정체성 정치가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다양성 개념의 큰 핵심가치인 ‘포함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정체성만으로 차별, 소외, 배제, 폭력을 경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리고 중요하지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자원 배분이 적절히 되지 않고 사회·경제·정치적 계급이 형성되고 유지·강화돼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직면할 때 포함사회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정체성과 계급은 같이 이야기돼야만 합니다. 정체성 정치는 계급운동과 조우할 때 비로소 끝없는 배제와 착취 구조의 암막을 걷어내고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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