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장애가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

오늘은 인어공주와 라푼젤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목소리를 잃어 자신이 왕자를 구했다고 말하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공주 이야기는 여전히 그림책과 영상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단 일차적으로 처음 본 사람에게 운명을 걸기 위해 누군가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주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선택을 했다면 필담을 나눴다든지 수어를 배운다든지 소통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비장애인 중심적으로 쓰인 이 이야기는 음성언어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을 무력한 존재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라푼젤은 어떨까요? 라푼젤의 탑에서 떨어진 왕자가 가시에 눈을 찔려 실명하지만, 라푼젤의 눈물로 인해 다시 눈을 뜨게 됩니다. 장애가 사라져야 행복할 수 있는 전제의 서사가 진행되면서, 장애를 가지고 각자의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워집니다. 왕자가 시각장애인이 되어서도 라푼젤과 잘 살았다는 방식으로 서사가 바뀌었다면 어땠을까요? 유아기부터 접하게 되는 동화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인정, 존중받을 수 있는 다양성과 포함이라는 문화의 기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 봅니다. 인어공주와 라푼젤의 관점에 의문을 가져보지 못하고 성장하게 되면 비장애중심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존의 ‘장애인은 무력하다, 장애를 가지고는 행복할 수 없다, 장애는 극복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강화시키게 됩니다.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가 좋던데?

장애극복의 서사는 ‘아름다운 스토리’로 포장되며 대개 비장애인으로부터 환호를 받습니다. 이는 장애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유년기 때부터 익혀온 사고방식이 익숙하고, 그렇게 사회화되었기 때문입니다. K 통신사의 ‘목소리 찾기’ 프로젝트는 ‘장애 극복’의 서사를 광고의 소재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광고는 농인 김소희씨가 ‘가졌을 것이라 추정되는 목소리’를 IT기술을 통해 만들어내고, 문자로 작성한 내용이 만들어진 목소리를 통해 가족에게 전달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광고를 보고 많은 비장애인들은 기술이 만들어내는 감동에 환호했습니다. 김소희씨는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이며, 법적으로 수어는 한국어와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광고는 가족들이 수어를 배워서 소통할 수도 있다는 점과 김소희씨는 이미 가족들과 필담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게 합니다. 청인중심사회는 음성언어를 강요하고 이를 기술로써 구현합니다. 장애를 극복하는 방식의 서사는 장애인에게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의 삶을 인정하지 않고 비장애인처럼 돼야 한다는 관념을 강요하는 억압이 됩니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존중하지 못하는 문화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거봐, 동성애 하니까 죽잖아”

권력이 만들어내는 ‘정상’을 기준으로 ‘비정상’을 교정하려 드는 폭력은 너무나도 만연합니다. 소수자를 ‘고쳐야 할 병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실제로 고치겠다고 나서며 폭력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혐오를 부추기며 이를 자신들의 동력으로 삼는 집단도 있습니다. 성소수자의 경우 비성소수자에 비해 자살비율이 매우 높게 나타납니다. 자살을 하게 되는 이유는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 때문이며, 이 때문에 자살이 아니라 혐오에 의한 사회적 타살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차별과 혐오로 인해 많은 성소수자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가운데서도,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한 종교계는 외려 ‘거봐, 동성애 하니까 죽잖아’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쌓아 올리는 혐오의 무게로 인한 죽음 앞에서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며 ‘사랑하니까 반대한다’고 말합니다.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를 ‘반대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만 존재를 반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의견에 대한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집단 안에서 성장하는 청소년들의 경우, 혐오표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보지 못하고 이를 학습하게 되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진행했던 다양성훈련에서 만난 한 청소년이 생각납니다. 그 청소년은 모든 참가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훈련이 진행되는 내내 함께 많이 웃기도 하고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성소수자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저는 호모포비아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저는 호모포비아가 어떤 의미인지 아는지, 왜 그런 표현을 사용하게 됐는지 질문했는데 그 청소년은 교회에서 성소수자 이야기가 나오면 그렇게 강력히 ‘선포’ 해야 한다고 배워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캠프 참여자 중에 성소수자가 있었는데, “제가 바로 그 성소수자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참 아프네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이 호모포비아라고 말했던 그 청소년은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고, 이내 함께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만나 관계가 형성됨으로 편견이 무너지고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깨닫게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살 수 있는 세상

한국의 교육은 철저하게 대학입시를 목표로 한 교과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장애유무, 질병여부, 이주배경,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등이 다른 친구들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평등한 문화에서 협동하며 지내는 연습을 하며 지내기란 어려운 일이 되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를 느끼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평등한 관계를 맺는 일은 마땅히 일상이 돼야 합니다. 일상에서 소수자와 마주하며, 그들의 존재를 지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은 바로 자신에게도 안전한 세상이며, 다양성훈련이 지향하는 지점입니다. 소수자들과 인간관계를 맺는 일은 ‘선한 일’도, ‘봉사’도, ‘시혜’ 따위도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부담스러운 사람’으로 만드는 방식의 교육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그리고 평등한 사회구조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합니다.

자신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얼마나 만나본 적이 있나요? 생각보다 일상에서 장애인을 만나기도 쉽지 않고, 성소수자를 만났다고 인지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가 비장애인 중심으로 모든 것이 설계돼 있고,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것을 안전하게 밝힐 수 없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장애인 별로 못 봤는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겠다는 ‘권력’의 요구에 따라 소수자들이 보이지 않도록 구조화된 세상이기 때문에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소수자들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고 ‘비정상’의 범주에 놓는 것을 지속하는 문화 또한 소수자의 비가시화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억압이 공고한 사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 한 번도 성소수자를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쉽게 꺼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따져보면 참 슬픈 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곁에 분명히 성소수자가 존재하는데, 그 말은 자신이 자신 주변에 있었던 성소수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장애인과 성소수자에게 ‘비장애인처럼, 비성소수자처럼 살라’는 폭력적인 말들은 결코 아름답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습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과 살아가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세상의 작동 요소들을 하나하나 멈추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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