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지난 2월 26일 대학에 인권센터 설치와 운영을 의무화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름뿐인 인권센터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인권센터의 역할을 제대로 정립해 대학의 문화와 구조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예산, 전문인력, 권한이 필요하다. 둘째로 학내 구성원들이 사회적 특권과 억압(social privilege and oppression)을 만들고 유지하는 권력(power)에 대해 고찰하고, 권력에 도전하고 해체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다양성과 포함(diversity and inclusion)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평등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차별과 혐오가 작동하는 원인 ‘문화적 용인’과 ‘구조적 승인’

대학은 인권과 관련해 선도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기관이지만, 동시에 교수자와 학습자가 기본 관계로 설정되는 공간으로써 권력의 불평등이 일상적으로 점철된 보수적인 사회다.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외형을 갖췄더라도, 사회적 특권과 억압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제도를 갖추지 못한 경우에는 평등한 문화를 만들지 못하고 위계적인 서열문화를 바탕으로 사회적 소수자들이 가진 취약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강화할 수 있다.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 간 교차하는 권력 가운데서 소수자를 향한 고정관념과 편견은 ‘정상’의 기준을 만드는 권력을 무기와 방패로 삼아 손쉽게 차별과 억압으로 이어진다. 인종, 민족, 종교, 장애, 성병,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경제력, 출신지역, 이주배경 등에 따라 교차하는 정체성을 가진 집단 간의 상호작용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다양성 가치를 바탕으로 한 중요한 배움의 토양으로 삼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수자 정체성이 차별의 근거가 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대학은 인권과 다양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의지’와 더불어 실질적으로 구조와 문화에서 인권과 다양성이 기본이 되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과감한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철저한 성찰 없이 차별과 혐오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대학 내 문화적,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고 인권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대학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렵다.

특권(privilege)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회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을 갖고 특권그룹과 억압그룹에 속하게 되며, 그에 따라 교차하는 권력을 갖는다. 교수자이면서 비장애인 선주민 성소수자 여성일수도 있고, 학습자이면서 장애인 이주민 비성소수자 남성일수도 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의 상호작용은 자신의 특권과 교차하는 권력을 이해하지 못할 때 실패하기 쉽다. 특권을 휘두르며 차별과 억압을 수행하는 가해자가 되거나, 자신의 억압그룹 정체성에만 몰두하며 다른 정체성을 배제하는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차별과 혐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다양한 정체성 간에 교차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특권그룹과 억압그룹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함으로써 변화를 만드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억압을 경험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이 억압을 인지하고 그에 대해서 반응하는 모습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배제가 익숙한 많은 소수자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억압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로, 개개인의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능력주의는 개인의 사고방식에 깊이 영향을 미쳐 억압당하는 현실을 ‘능력이 부족한 자신의 탓’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셋째로, 일상에서 차별과 폭력의 가능성에 노출돼 있는 소수자는 일상의 지속이 어려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로서 억압을 인지하게 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차별과 폭력의 중단을 요구하며 생존, 평등, 존엄, 공존을 위한 행동에 나선다. 마지막으로 교차하는 권력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닌, 손쉬운 ‘다른 소수자 탓하기’로 이어진다.

반면 특권그룹의 정체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일상을 편안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특권은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능력주의가 결합되면서 자신의 성과를 노력으로 얻어낸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는 자신의 특권을 인지하지 못하고 불평등한 결과를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도록 하여 불평등을 해소할 의지를 소거한다. 이때 차별과 혐오가 없는 평등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은 사라진다.

‘갑질’과 ‘을들의 싸움’이 만연한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진짜 문제를 발견하고 개입하며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교차성과 특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을 대학 내 구성원에게 제공할 때 비로소 평등을 만드는 첫 단계가 될 수 있다.

차별과 혐오 없는 ‘세이프존’으로의 변모

차별과 혐오가 드러나는 사건이 아예 없으면 좋겠지만, 희망과는 다르게 언제나 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 문제가 생기지 않게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공동체가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훈련이 돼 있어야 한다. 특히 가해자에 대한 엄정한 조치와 징계(교수들의 성폭력과 혐오표현 등),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 공동체의 성장이라는 과정이 선순환 될 수 있도록 대학이 차별과 억압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엄중한 선언을 하고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상의 조정자와 공동체가 빠르게 대응한다면 문제는 빠르게 중단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인권센터의 실무자가 문제를 상담하고 조사하고 조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학내 구성원들이 학내 곳곳에 차별과 폭력에 개입하고 멈추도록 하는 문화를 만들고 훈련된 일상의 조정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그 어떠한 이유와 상황 속에서도 차별과 폭력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도록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특별한 용기를 내지 않아도 문제에 개입하고 중단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단순히 모든 것을 법대로 진행해서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성장을 돕는 공동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차별과 억압, 폭력으로 이어지는 위계문화를 끝내기 위해 대학 내 역할에 따른 교수자와 학습자간, 교수자와 행정가, 행정가와 학습자 간의 관계가 기존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인 협력관계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지침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정체성에 따라 차별과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을 통해 상호 배움이 가능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구성원 개별 역량을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학내 구성원이 교과목 내에서 교양필수과목으로 다양성교육(Human Diversity)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비교과과목으로 인권단체 활동을 지원하면서 권력의 교차성과 특권에 대한 이해를 갖고 일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로 양성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구조적 위계질서와 다양한 정체성과 그에 따른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만들어지는 차별과 혐오를 끝내고 방관자가 아닌 문제에 개입하고 중단시킬 수 있는 일상의 조정자를 통해 변화는 가능할 것이다.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의 경우, 사람과 마주하는 일을 하게 될 학과(예를 들어 법학과, 의학과, 간호학과, 경영학과, 사회복지학과 등)를 전공하는 학생의 경우 첫 학기에 인간의 다양성(Human Diversity) 코스를 필수과정으로 배치하고 있다. 이 코스를 패스하지 못하면 다음 학기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면서 다양성 관점을 갖는 것을 구성원이 갖춰야할 기본역량으로 요청하고 있다.

또한 대학 내 구성원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캠퍼스 건물에서도 정체성에 따른 어떠한 차별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모든 건물의 1층은 성별, 성별정체성, 장애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설치하고 있다. 최소한의 권리로서 보장되어야 하는 ‘오줌권’에서 정체성에 따른 배제가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이와 같은 일상의 공간을 바꾸는 것은, 대학이 어떠한 차별과 혐오도 용납할 수 없다는 선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 교육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대학은 차별과 혐오를 끝낼 수 있다

대학은 인권의 가치를 선도하고 제시해야 하는 곳인 동시에,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위한 적극적인 실험을 해볼 수 있는 지식집단이다. 차별과 혐오를 끊어내는 것은 평등문화를 만드는 일이고, 다양성과 인권이 보장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차별과 혐오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학칙과 교육의 변화를 만들어 낼 때 어느 사회보다도 빠르게 평등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있다.

제도의 마련과 인식향상은 따로 진행되어서는 안 되며, 상향식 접근방법(인식 향상)과 하향식 접근방법(제도 마련)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차별과 혐오를 줄이고 평등, 평화, 인권, 다양성을 증진시키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한 대학 속에서의 실천이 사회 전체에서 이 가치와 목표를 실현시켜 내는 것보다 쉽다. 인식향상을 가져와야 하는 수적인 규모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제도를 만들고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 차원에서도 더 용이하다.

여전히 여러 대학에서 여성과 성소수자 인권 향상 혹은 인권 향상을 위한 노력에 대해 반발하는 사건들(페미니즘 강연 취소, 대관 거부, 현수막 훼손 등)을 접하게 되지만, 대학은 여전히 평등한 문화를,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공간임을 믿는다. 인권은 그저 구호이거나 그럴 듯한 간판이 아니다. 문화, 구조, 제도로서 드러나야 한다.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그리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포함될 수 있는 대학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차별과 억압, 갈등과 폭력으로 점철된 한국사회의 변화가 필요하며 대학은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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