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지난 시간에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개개인의 사고와 선택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런 관점이 우리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사람들이 사회 체계에 참여하고 반응할 때만 가능합니다. 가장 작은 사회라고 하는 가정에서 부터 학교, 일터, 종교 기관 등 모든 사회 기관은 개인들이 그 조직과 어떻게 관계 맺고 어떤 역동을 만들어 가는지에 따라 많은 것들이 결정됩니다.

‘명백히 틀린 대답이라도 피실험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오답을 말하면 피실험자도 오답을 말할 확률이 75%나 된다’는 유명한 애쉬의 동조 실험(Asch conformity experiments, 1950s)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 비해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말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상황이 아닐 때조차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동조(순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사람들이 권력관계 하에 있지 않을 때도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맞추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면, 권력관계 속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요? 무엇이 ‘옳다’는 것을 알아도 그 선택을 하지 못할 경우는 없을까요? 자신이 지금 하고자 하는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것이 자신에게 사회, 정치, 경제 등 어떤 측면으로든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사회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구조가 개인의 행동을 만든다는 것과 개인의 선택이 모여 다시 사회구조를 만든다는 것, 개인과 사회구조의 관계는 쌍방향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 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모양을 갖춰 갑니다. 사회화 과정이란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말합니다. 사회화 과정을 통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 편견, 낙인 등을 배우기도 하지만 ‘사회화 과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신호등의 빨간불은 멈추라는 뜻이다’,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면 안 된다’ 등의 사회적인 약속, 규칙, 도덕 등을 배워서 체화하는 것도 사회화라고 합니다.

가족, 학교, 직장, 종교기관, 미디어 등을 통해서 양육자, 교사, 또래그룹, 상사, 동료, 종교인, 정치인, 언론인 등이 보여주는 언행을 통해 그 사회에서 해야 할 행동과 하지 않아야 할 행동, 허용되는 행동과 허용되지 않는 행동, 사람들이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생각/태도/평가 등 가치관을 배우게 됩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유별난 존재’로 걸러지지 않기 위해서 그 사회에서 ‘보통이다’, ‘정상이다’,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정해놓은 ‘정상의 기준’ 범위 내에서 행동하기 위해 어떤 언행이 사회에서 인정, 수용되는지 배우고 따르게 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학적인 용어로 ‘가장 저항이 적은 길(paths of least resistance)’을 선택하게 됩니다.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도서관이나 극장에서 소리 지르지 않기’와 같은 공중도덕을 배우고 따르게 되는 것도 포함하지만, 남성들끼리 모였을 때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만 여기는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 쉽사리 ‘불편하다’, ‘그런 이야기 하지 말자’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도 포함됩니다. 잘못된 언행을 멈추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놀림당할까 봐’, ‘앞으로 나를 끼워주지 않을까 봐’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차별적인 표현의 발화자가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자신의 승진, 임금 혹은 재계약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상, 지위, 안위 등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서 그냥 침묵하는 것이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지만 사회구조는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규정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종, 민족,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장애, 외모, 지역, 나이, 학력/학벌, 고용의 형태, 경제력 등의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지를 파악하게 됩니다. 사회에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행동,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행동 등을 파악하게 됩니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을 비롯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영역에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고학력, 고학벌, 고소득, 비장애인, 비성소수자, 선주민, 50-60대 남성일 때 이는 사회적으로 어떤 메시지로 환원될까요?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비청소년(성인)들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에게, 비성소수자들은 성소수자들에게, 선주민들은 이주민들에게, 고소득층은 저소득층에게 자신이 사회적 특권그룹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억압그룹에 속해있는 사람들을 지배, 통제, 억압, 차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만들어 주는 메시지로 전달됩니다.

사회구조가 사회적 특권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특권을 합리화하고 권력을 용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사회적 억압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처해 있는 차별과 억압의 상황을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권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사회문제들을 구조적인 관점으로 볼 수 없게 만듦으로써 문제를 개인화하고 문제의 구조적인 원인을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능력이 없어서 구조를 탓하는 사람들’로 보이게 만듭니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형성될 때 사람들은 사회구조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해서 이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만 생각하게 됩니다.

한날한시에 같은 시험지로 시험을 칠 기회만 모두에게 주어지면 그것이 ‘공정’이고 ‘평등’인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그저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밖에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입시 없는 세상, 대학 안 가도 되는 세상, 모든 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이 주어지는 세상, 집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요구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 지배그룹 버전의 세상을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억압그룹에 속한 사람들마저 현재 우리가 가진 사회구조가 ‘차별’적이라고 보는 게 아니라 ‘질서’가 있는 것이라고 보는 지배그룹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현 상태를 어지럽히지 않고 순응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다음 칼럼에서 이어 갑니다.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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