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착취 사회의 위험한 ‘힐링 장사’

2004년 <긍정의 힘>, 2006년 <시크릿>이라는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며 신비주의적인 자기계발서의 유행이 정점을 찍었습니다. 2007년에는 한국에서도 <꿈꾸는 다락방>이라는 책이 그 유행을 이어갔습니다. 세 책의 공통점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마음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면 무엇이든지 현실로 일어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계발서’라기 보다는 ‘종교’에 더 가깝기도 한 이런 책들의 내용은 한국의 전통신앙(샤머니즘)과 한국의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기복신앙적인 정서로 인해 한국 사회에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고 위화감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스며들었던 것 같습니다.

2010년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아무리 성실히 노력해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야. 청춘은 원래 그런 시기야’라는 메시지로 위로했습니다. 2012년에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과 <언니의 독설>이라는 책이 크게 히트합니다. 이 세 책의 저자들은 ‘힐링(위로)’과 ‘채찍질’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시대의 ‘힐링 멘토’로 불리며 시대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20년이 된 지금까지 오면서 이들의 말과 행동은 여러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들이 편승했던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게 하고 개개인의 노력 여부와 선택들이 그 사람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고 믿게 하는 것)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더 강화됐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는 사회

힐링 프레임은 구조를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 속에서 사회계급의 문제를 가리고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구조를 가림으로써 자본가와 노동자의 ‘권력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자들은 시민들이 사회문제를 구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암기/평가/경쟁/입시 중심의 공교육과 문화적인 요소들(책, 강연, 영화, 드라마, 광고 등)을 이용하여 시민들이 기득권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 주변에 시민이 아니라 통치자의 마인드,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이러한 사회는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믿게 만들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사회구조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며 사람들에게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맥락을 살펴보기 어렵게 합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자신을 포함한 다른 시민들과 사회적 소수자(피억압자)들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부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강자(억압자)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탑재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회적 소수자들이 억압을 당하는 약자에 위치에 처하게 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약자들에게 문제의 원인이 있다’는 강자의 시각을 고스란히 가지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요?

전투기와 미사일로 비무장 상태의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폭격하는 이스라엘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의 학살에 맞서 돌팔매질로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마치 동등한 위치에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둘 다 서로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둘 다 잘못이다’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 사이의 정치/경제적 ‘권력의 차이’와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역사와 맥락을 보지 못하게 하는 미디어(정치, 종교, 언론 등)의 메시지를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성이 경험하는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해서 ‘여성혐오(misoginy)’라는 용어로 이야기를 할 때 어김없이 ‘남성혐오도 심하다’, ‘여성혐오, 남성혐오 둘 다 나빠요’, ‘여자 남자 사이좋게 지내요’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여성혐오는 여성이 경험하는 고정관념과 편견부터 시작해서 사회적인 차별과 억압 그리고 폭력과 살인까지 모든 구조적인 폭력을 포함하는 용어입니다. 그에 반해 남성혐오는 여성들을 너무나 폭력적으로 대하는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남성들에게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남성에 대한 사회구조적인 차별과 억압,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특히 ‘미러링’이라는 언어 전복의 운동 방식을 놓고 ‘남성혐오’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미러링은 그동안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들어온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말들을 거울처럼 반사해서 그대로 남성들에게 들려주는 ‘패러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항의 언어’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여성들의 ‘돌팔매질’을 향해 폭력적이라며 비난하기 전에 여성들이 경험하고 있는 미사일 폭격과 같은 구조적 차별, 억압, 폭력을 직면하고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인과 맥락부터 찾는 회복 프로젝트

‘힐링’이라는 용어와 관련해 생각나는 사례가 하나 더 있습니다. 미투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을 때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사들에 의해 경험하는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한 말하기가 이어지며 ‘스쿨미투’도 활발히 일어났습니다. 이때 서울시교육청은 스쿨미투가 나온 학교들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회복 프로젝트>라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스쿨미투가 나온 학교들에서 교사, 학생, 학부모 사이의 신뢰 관계가 깨져있는 것에 대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저 단발성 교육 제공이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습니다. 각 학교들마다 교육 전에 사전 상담과 설문조사 등으로 학교마다 필요한 교육과 상담 등의 지원을 파악하고 제공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개별 사건에 대한 긴 호흡의 조치 뿐 아니라, 학교 공동체의 문화 형성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교사들의 양성에 있어 변화를 만드는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교사를 양성하는 교대, 사대, 교육대학원에서 성평등 교육과 인권교육을 충분히 제공하여 성평등 인식과 인권의식을 갖춘 교사들을 양성해야 합니다. 공교육의 목표 자체가 입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민주시민들이 평등과 협력을 경험하고 연습하는 과정이 돼야 합니다.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재발방지도 불가능할뿐더러 회복은 더욱 불가능합니다. <회복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은 나쁜 게 아니지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과 변화 없이 단발성 특강을 제공하는 것으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힐링(위로, 회복, 화해 등)은 상처내기를 멈춘 후에 가능합니다. 상처를 계속 내고 있는 근본 원인을 방치하고서는 심리적인 외상을 입은 사람을 위한 어떠한 상담이나 약물치료 등을 통해 충분한 효과를 거두기는 어렵습니다. 치유하지 못합니다. 계속해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구조가 개개인들의 삶에 상처를 내고 우리 공동체(사회)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을 직면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바로 볼 수 있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상처의 원인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힐링’의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차별, 억압, 폭력, 혐오를 양산하고 유지하는 사회구조를 직면해야 합니다.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를 회복하며 필요하다면 사죄를 받아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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