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성선설과 성악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로 대표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은 흥미롭습니다. 폭력과 부정의가 판치는 세상에 대해서 고뇌하다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인지 질문하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질문을 하는 이유와 그 질문을 통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의 배경에는 전쟁이 난무했고 폭력이 일상이었던 춘추전국시대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고민을 했던 이유는 ‘전쟁과 폭력을 멈추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이 본래 선한 존재라면 선함을 확산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인간이 본래 악한 존재라면 악함을 억제하고 선함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을 찾아서 전쟁과 폭력을 멈추고자 했던 것입니다.

차별과 혐오의 원인

현대 사회에서도 차별과 혐오의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사실은 낯선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죠.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고요. 그런데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결과에 집중을 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인종(특히 유색인종),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가난한 사람/비위생적으로 보이는 사람 등을 보면 ’생존본능‘ 때문에 피하는 게 당연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연결은 차별과 혐오의 원인을 찾아 해소하려는 방향이 아니라, 합리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존본능이 있다는 것’과 ‘누군가를 위험으로 인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누군가가 그의 언행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만으로 위험으로 인식되고 있다면 그 사람을 위험으로 인식하게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에 대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그 낙인 자체가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뇌의 작용’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뇌는 뇌가 하는 일을 줄임으로써 뇌의 피로도를 줄이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날 때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새롭게 알아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징(성별, 장애, 인종/민족 등의 사회적 정체성 등)을 파악해서 과거의 경험이나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선입견이나 고정관념 등)를 기반으로 판단하는 것이 빠르고 에너지를 적게 쓸 수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동하는 것이 ‘뇌의 기능’이기 때문에 인간이 고정관념과 편견의 영향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뇌가 그렇게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뇌의 작동 방식’을 근거로 고정관념과 편견부터 시작되는 차별과 혐오를 합리화하는 태도는 지양돼야 합니다.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우리가 이제 집중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정보’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평소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어떤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접하고 있는지와 사회적 소수자와 평소 긍정적인 경험을 나눌 수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평소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정보라고는 혐오에 기반한 가짜뉴스 밖에 없고 나의 일상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이주민, 장애인, 성소수자 등)을 만나 볼 기회가 별로 없다면 제대로 된 정보도 긍정적인 경험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그런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뇌가 효율을 위해서 빠른 판단을 내리려고 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나 긍정적인 경험이 부재하기 때문에  판단의 대상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 이외에는 나올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부정적인 반응’이란 부정적인 생각에서 부터 시작해서 차별적인 언어와 행동 그리고 폭력과 살인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미국에서 백인 경찰들에 의해 유색인종(특히 흑인)에 대한 과잉진압과 살인이 자주 발생하는 원인을 여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뇌와 남성의 뇌는 다르다?

박근혜 정권 때 교육부가 6억을 들여 만든 ‘국가 수준의 성교육 표준안’이라는 공교육 내 성교육 가이드라인이 있습니다. ‘(성범죄로부터) 안전한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을 고르라’는 등 성범죄 발생 시 피해자를 비난하게 만드는 피해자유발론의 내용 등 부적절한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여성의 뇌와 남성의 뇌가 다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성의 뇌에는 외모, 수다, 옷, 화장, 쇼핑 등을 써 놓았고 남성의 뇌에는 축구, 운동, 게임, 먹을 것 등을 써 놓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단 두 가지의 성별로 나누고 여성과 남성은 완전히 다른 별에서 온 다른 종족처럼 여기는 사고는 성차별과 성폭력의 사회구조를 유지하게 됩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와 같은 책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별에서 온 것처럼 다르다는 내용으로 상대방의 뇌 구조와 사용하는 언어의 특징을 알지 못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생각에 기반한 문화는 지금까지도 도처에 퍼져있습니다.   

사고하는 방식, 언어 습관 그리고 신체의 크기나 근력까지 ‘여성의 평균’과 ‘남성의 평균’이라는 평균값을 구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평균값이 유의미한 자료가 될 수 있는 사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균값은 평균값일 뿐 이를 근거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의 평균 신장’이 ‘여성의 평균 신장’ 보다 크다고 해서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보다 키가 큰 것은 아닙니다. 남성들 중에는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여성들 중에는 상냥하게(정중하게) 말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모든 남성은 단호하게 말한다’ 혹은 ‘모든 여성은 상냥하게 말한다’는 결론을 낼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남자는 키가 커야 한다’, ‘여자는 아담해야 한다’ 혹은 ‘남자는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여자는 상냥하게 말해야 한다’는 억압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여전히 특정 분야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학 과목에서의 실력 차이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국 사회를 예를 들어 살펴보면 실제로 초중고 기간 동안 남학생들의 수학 성적의 평균이 여학생들 성적의 평균보다 높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성평등 지수가 높은 나라에서는 이런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여학생들은 남학생들과 초중고 기간 내내 수학 성적에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성평등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하는 아이슬란드와 스웨덴과 같은 나라에서는 오히려 여학생들의 수학 성적의 평균이 남학생들 수학 성적의 평균보다 높습니다. 이렇게 여전히 성별에 의한 격차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어져 오던 수학 실력과 같은 분야조차 생물학적이거나 유전적인 차이 등 선천적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성차별의 결과로 드러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인종’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은 단일 ‘종(種)’입니다. 인간 안에 서로 다른 종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종 구분은 사회학적인 구분일 뿐이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인종차별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기 위해 사용될 뿐입니다. 그럼 인종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피부색을 기준으로 우월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만든 사람들은 누굴까요?

제국주의 유러피안 백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침략해서 땅을 빼앗고 식량과 재산을 수탈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때 그들은 ‘인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습니다. 다른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사고 파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자기 자신에게도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부색과 같은 유전적으로든 그 무엇으로 보든 전혀 중요하지 않은, 지극히 피상적인 차이를 자신들의 인종적 특권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프로그램화 된 로봇이 아니다

인간을 정체성별로 나눠서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면 다양한 사람들이 삶 속에서 실제로 어떤 경험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볼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인간은 본래 어떠어떠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사고도 위험합니다. 우리는 유전자나 염색체에 갇힌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이고 우리가 이 사회의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주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미리 설정된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는 로봇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연의 질서’나 ‘유전자의 명령’ 따위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라는 명령을 끊임없이 받는 가망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두가 포함되는 평등한 사회를 향해 나아간다’는 대전제에 동의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더 평등해지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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