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문제를 명확히 규정하는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이름을 통해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도 무엇이, 왜 문제인지 쉽게 알 수 있게 됩니다. 문제의 이름을 명확히 지칭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기득권자들이 만든 언어로 구성돼 있습니다. 어떤 문제는 아직 이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름이 있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문제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문제를 직면하고 저항하며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은 문제의 이름을 부르며 그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이름을 지어주고 호명을 시작하면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더 분명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글로 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문제에 대해 평소에 고민하고 있었던 사람들, 답답해하던 사람들의 생각이 모일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가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탓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도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 문제가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구조적인 관점을 갖게 되면 그 문제가 자신의 삶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럴 수 있을 때 그 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 문제와 우리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해결 방안을 찾아낼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문제에 이름을 붙이고 그 문제와 관련한 언어를 만들어 가는 것은 보통 그 문제에 의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하게 됩니다. 주로 차별과 억압 등의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로 ‘당사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사회적 소수자들과 약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해 답답한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문제에 명확한 이름이 생기고 그와 관련한 언어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면 아직 그 문제를 문제로 여기고 있지 못한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사람으로 초청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이 정확히 지목하는 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사회적 정체성에서 특권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즉각 부정적인 반응을 내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가부장제, 남성중심사회, 남성특권, 젠더권력, 이성애중심주의, 인종차별, 물질만능주의, 천박한 자본주의, 학벌주의 등과 같은 단어에 ‘분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격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들은 남성특권, 가부장제, 성차별, 미소지니와 같은 단어를, 이성애자들은 이성애중심주의, 시스젠더들은 시스젠더중심주의, 선주민들은 선주민중심주의와 같은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그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정확히 지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 일수록 ‘문제의 이름’을 듣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제공하는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서 그것을 ‘특권’이라고 이야기하고 그 특권이 야기하는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더욱 어렵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저성장 시대는 예전 산업화 시대처럼 ‘평범한’ 비장애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이 열심히 노력하며 성실히 살면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자녀도 낳고 자녀들 학원도 보내고 대학도 보내며 경제적으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에게 어떤 특권이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분 나쁜 이야기,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자신을 바꿔야 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 나오는 반응에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로 애초에 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①원래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 ‘순리’이다.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②예전에는 그런 문제가 있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는 그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성차별을 유지하는 사회구조로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로 이름을 불러가며 이야기 할 때, ‘아버지들이 가정과 사회의 든든한 중심이었던 때는 가정과 사회에 질서와 예의가 있었다. 이제는 남성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가 만들어 진 것이 문제다’라고 주장하거나 ‘우리 어머니 세대나 할머니 세대 때는 그런 일이 있었지만 아직도 성차별 때문에 여성들이 살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서 구조를 탓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시대에 성차별이 어디 있나? 오히려 여성들이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됐다’는 류의 주장들이 첫 번째 방식에 해당됩니다.

둘째로 문제를 명확히 규정하기 위한 ‘문제의 이름’을 왜곡하고 곡해하는 것입니다. 성차별을 유지하는 사회구조로 ‘남성특권’과 ‘젠더특권’으로 이름을 불러가며 이야기 할 때,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지는 특권이 뭐가 있나. 남자가 무거운 것도 더 많이 들고 남자는 군대도 가고 남자가 일도 더 오래하고 산업재해도 더 많이 당한다. 이런 역차별 시대에 남성특권이라니 말도 안된다. 여성들이 훨씬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특권”이라는 용어의 개념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보지는 않고 특권이라는 용어에 대한 반감으로 용어를 왜곡하고 곡해하는 형태입니다. 이런 발언이 큰 문제인 이유는 ‘교차하는 권력’을 사유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노동자를 착취하는 노동구조의 문제와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하지 못하고 있는 노동환경의 문제를 마치 남성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성차별로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면 해결책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또한 ‘젠더’라는 용어의 개념에 대해 정확히 알아보고자 하기 보다는 ‘인간의 성별은 두 가지 밖에 없는데 젠더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성별이 수십 가지 수백 가지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동성애를 인정하기 위한 수단이며 동성애가 인정되면 결국 소아성애와 수간도 인정되는 사회가 된다’와 같이 젠더라는 용어에 대한 무지는 물론이며 성관계와 성폭력도 구분하지 못하는 몰이해를 드러내는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젠더’, ‘젠더 특권’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사회 현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함은 물론, 전혀 사실이 아닌 가짜뉴스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는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셋째로 ‘문제의 이름’을 부적절하게(마구잡이로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등) 사용하여 그 이름이 지목하고 있는 문제를 별 것 아닌 것처럼 만들거나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리벤지 포르노’ 심지어 ‘국산 야동’이라고 불리던 성범죄 영상물들을 ‘디지털 성범죄’로 명명하며 정확한 이름으로 다시 부르기 시작했고,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됐습니다. N번방, 박사방이 세상에 드러난 후 기존의 디지털 성범죄와 달리 피해자에게 직접 영상을 찍어 공유하게 한 범죄를 “성착취”로 명명했습니다. 기존의 법에서 규정하는 “성범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을 촬영하고 공유하게 했습니다. 여성의 몸이 너무나 쉽게 돈으로 교환되는 남성중심의 자본주의사회, 가해자가 아닌 성범죄를 당한 여성을 비난하는 문화가 만나며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약자를 더욱 더 쉽게 마음대로 착취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됐습니다. ‘성착취’는 이 권력의 구도를 포함하고 있는 용어이며 권력의 해체를 해결책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디지털 성범죄’와 ‘디지털 성착취’ 문제가 지속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자, 이를 ‘남성 그룹’을 향한 공격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 개인적인 비난으로 받아들이며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남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자들도 똑같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알페스’를 끌고 와서 ‘여성들도 남성들을 성착취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알페스(RPS:Real Person Slash)는 실존 인물을 소재로 남성(미소년)들의 동성애를 그린 만화나 소설 등의 장르입니다. 알페스는 실존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실존인물에 대한 성희롱이라고 여겨지거나 당사자가 불쾌할 수 있는 내용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페스를 성착취라고 부르며 N번방, 박사방 사건과 동일한 선상에 두려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성착취라고 부는 그거 여성들도 남성들에게 똑같이 한다’라는 의미로 성범죄와 성착취를 젠더에 기반한 심각한 폭력이 아닌, 즉 남성들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은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성 vs 여성’의 갈등 구조로 보이게 하려는 명백한 의도가 있습니다.

넷째로 근본적인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주로, 사회적 소수자를 비난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2016년에 강남역에서 여성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도 이전에 발생했던 여성 살인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화장실 묻지마 살인사건’, 심지어 ‘화장실 변사체녀 사건’으로 불릴 뻔 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그냥 ‘묻지마 살인사건’이 아니며, 이후 더 이상 ‘00녀 사건’으로 명명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인식이 공유됐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 살인사건을 뜻하는 페미사이드(Femicide)라는 용어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건의 이름을 알게 되고 정확한 이름으로 사건을 부르자 그동안 이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여성들이 당하고 있었던 차별, 억압, 폭력의 문제를 잘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은 여성혐오(Misogyny, 미소지니), 페미니즘(Feminism)과 성평등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정치인들과 경찰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사건 혹은 페미사이드라고 명명하지 못합니다. 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하고 명명하면 쉽게 처리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성혐오, 페미사이드와 싸우는 대신에 쉬운 방법을 선택해 ‘성별이 분리 돼 있지 않은 화장실’과 ‘조현병 환자’가 문제였다고 발표합니다. 문제의 본질로 착각하기 쉬운 동시에 자신들이 무언가 한 것처럼 보여주기 쉽기 때문입니다. 성별이 분리 돼 있지 않은 화장실을 없앤다거나 조현병 환자를 빨리 체포하고 가둘 수 있는 법을 만든다든지 말입니다.

가부장제는 ‘나쁜 남성들의 사회’라는 뜻이 아니며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자’ 혹은 ‘남성혐오주의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정확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시작입니다. ‘문제의 이름’을 훼손하고 왜곡하려는 시도와 의도 역시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정확한 이름을 불러야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해결 방안을 이야기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 사회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면 자기 자신 역시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문제의 영향을 받고 있는 그 문제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그 문제에 대한 변화와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의 이름만 들어도 올라오는 거부반응(방어기제)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이 용어들이 가리키는 현상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 밖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사회 속에 자신의 위치와 그 문제를 함께 사고 할 수 있을 때 다시 그 문제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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