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br>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여름이 되면 남구로역에는 새벽에 매일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고는 합니다. 하루 일해서 하루 일당을 받는 ‘안정적이지 않은 일자리’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매일 천여 명씩 모인다는 뜻 입니다. 그런데 그 중 90%의 사람들은 일을 구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안정적이지 않은 일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보다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습니다. 한 달 내내 새벽 4시에 나와도 한 달에 6-7일 정도만 일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문제는 무슨 문제일까요? 이 문제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할까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70%가 넘는 학생들이 대학교에 갑니다. 한 때는 80%가 넘었습니다. “대학교 나와야 사람구실한다”는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시기가 있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학 나오면 “잘” 살게 되나요?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존엄하게 사람답게라도 살게 되나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자금 대출로 빚지고 졸업하는 졸업생들의 평균 빚이 3천만원이라고 합니다. 20대에 취업을 하는 사람들의 20%만 정규직으로 취업이 가능합니다. 이 문제는 무슨 문제일까요? 이 문제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할까요?

남구로역 새벽 인력시장에 모이는 사람들 중 90% 달하는 사람들이 이주민이라면, 이주민들이 한국인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일까요? 이주민들이 없어지면 선주민들의 일자리가 보장될까요? 이주노동자, 이주결혼여성 등의 이주민들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등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 더해서 취업난, 실업문제, 고용의 형태에 의한 차별 등 자본주의사회가 노동자들을 어떻게 착취하고 얼마나 폭력적으로 대하며 취약한 환경으로 내모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 겹치게 되면 구조에 대해서 보지 못하고 소수자들을 비난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한 줄로 줄 서듯 서열화되어 있는 대학들 중 “높은 대학”에 입학한 사람들은 성실한 노력의 대가로 얻어낸 성과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차별을 경험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일까요? 20%라는 비좁은 문을 뚫고 정규직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은 성실한 노력의 대가로 얻어낸 성과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차별을 경험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똑같은 날 똑같은 시험지로 똑같은 시험을 쳐서 그 시험 성적으로만 똑같이 평가받는 것을 “공정”이라고 여기며 “공정한 평가”에서 밀린 사람은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자기관리를 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아도 되는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차별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있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은 ‘시험주의’ 수준에 갇혀버린 ‘공정 담론’을 구할 수 있습니다. 공정, 공존, 평등이 무엇인지 깊게 이야기 나눌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차별인지’ 그리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해 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게 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차별금지법은 공동체를 상상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가게 할 것입니다. “나”를 넘어 “우리”를 상상하게 할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내가 목소리 내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해줄 것입니다.

대선이 일주일 남았습니다. 당선이 유력한 양대정당의 후보 둘은 차별금지법제정에 반대하거나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이 두 정당은 2003년부터 시작해서 거의 20년이 지나는 동안 차별금지법 제정을 직접 반대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의 눈치를 보며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은 정당들입니다. 이들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겪고 있는 부당한 일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지’, ‘차별과 폭력이 무엇인지’, ‘차별과 폭력의 원인이 무엇인지’, ‘평등이 무엇인지’ 알기 쉽지 않은 사회가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이 20년 간 사회에 미친 해악입니다.

차별과 폭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하는 사회에 살다 보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부당한 일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보다 돈이 중요한 사회체제)가 너무나 익숙한 사회 속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에 갇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개인이 노력하기 나름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별은 절대 개인의 탓이 아니며 결코 당연하지 않습니다. 차별의 대상이 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누군가를 차별하도록 만드는 이 사회의 구조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가야만 합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단일한 정체성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 청소년, 청년,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노인 등과 같은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영유아였고 어린이였고 청년이었고 노인이거나 노인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거나 장애인이 되어갑니다. 노화의 과정은 신체와 뇌의 기능이 떨어지는 과정이고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측면에서는 어떨까요?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일용직, 하청 등 안정적이지 않은 고용의 형태로 일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구직 기간을 몇 년씩 갖게 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일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실업 상태에 놓이게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지 않는 자본가 중심, 승자독식의 경제구조에서 차별이나 폭력적인 상황에 평생 단 한 번도 놓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소수자성을 한 번도 가져본적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차별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의 소수자성에 칼을 겨누는 것이 아닌, 모든 차별에 반대하며 차별을 끝내기 위한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복합차별과 교차하는 권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여성이 비정규직이 되기 쉬운 사회문제는 성차별 문제일까요? 아니면 비정규직으로 사람을 쉽게 고용하고 임금을 덜 주고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된 노동문제일까요? 바로 둘 다입니다.

성소수자 노동자가 회사에서 어느 날 별다른 이유없이 해고 됐다면 이는 성소수자 차별일까요? 아니면 사람을 쉽게 자를 수 있는 노동문화 때문일까요? 이 또한 둘 다입니다. 한국은 전 세계 OECD 국가들 중에서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나이에 대한 차별일까요? 아니면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는 노동정책 때문일까요? 역시 둘 다입니다.

한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만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단일한 정체성으로 한 사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남성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위험한 노동환경에서 노동을 하기 때문에 과로사와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비율이 전 세계 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면 이는 성별에 의한 차별일까요? 아니면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일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단순한 것을 좋아하지만 많은 경우 사회문제는 간결하게 설명해 낼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복잡한 사회문제를 최대한 복합적으로 복잡하게 들여다보며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하나씩 해결해 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 해결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서 1)고용, 2)재화/서비스, 3)교육/직업훈련, 4)행정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차별을 경험하지 않아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원칙에도 동의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과연 우리사회를 조금씩 더 평등하게 변화시켜 갈 수 있을까요? 아직도 성장과 발전을 이야기하며 헛된 꿈을 좇게 하는 정치인들이 과연 우리가 직면해 있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며 살인적으로 양극화된 불공평의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을까요?

차별금지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법은 아니지만 ‘우리가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깊게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차별금지법은 ‘차별이 무엇인지’ 그리고 ‘평등이 무엇인지’ 더 잘 살펴볼 수 있도록 더 깊고 더 좋은 질문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 김지학 소장은? 

-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운영위원 

- 대한성학회 이사, 학술위원 

-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사외이사 

- 전) 숭실대학교 외래교수

- 전) 서울예술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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