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전태일 열사’는 부당한 노동현실 가운데서 노동자가 존중받는 세상이 도래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육신을 화염 속에 내던지는 희생도 서슴지 않았죠.

그의 숭고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열악한 노동현실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사각지대 안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저임금과 장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며,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다 목숨을 잃곤 합니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노동존중사회에 대한 희망에 숨을 불어 넣어 줄 새로운 노동정책이 필요한 때, <투데이신문>은 ‘우리가 바라는 근로기준법’을 기획했습니다. ‘전태일기념관’을 방문한 시민들께서 ‘내가 바라는 근로기준법’ 게시판에 손수 남긴 의견들을 토대로 실제 노동현장 최전선에 있는 노동자들이 원하고 바라는 노동정책을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전태일기념관’을 방문한 시민들이 ‘내가 바라는 근로기준법’ 게시판에 남긴 글 ⓒ전태일기념관<br>
‘전태일기념관’을 방문한 시민들이 ‘내가 바라는 근로기준법’ 게시판에 남긴 글 ⓒ전태일기념관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유리천장은 언제 쯤 확실하게 무너질 수 있을까요”

책 <82년생 김지영>에는 이런 문단이 등장합니다.

둘이 비슷한 시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김지영씨는 부모님과 함께 살아서 용돈 이외에 따로 생활비가 들지 않았는데도 모아 놓은 돈은 정대현씨가 더 많았다. 정대현씨의 연봉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회사 규모도 차이가 나고, 김지영씨의 업계가 워낙 열악한 곳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차이가 클 줄은 몰랐다. 김지영씨는 조금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 책 <82년생 김지영> p129

82년생 김지영씨와 92년생인 기자가 겪는 성별 간 임금격차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3월 8일 한국CXO연구소가 국내 주요 30개 대기업의 1999년 대비 2019년 남녀 성비 및 평균 보수 변동 현황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이 받는 연간 평균 보수는 20년 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남성의 1인당 평균 연간 보수를 100이라고 가정한다면, 여성은 남성 대비 1999년 65.8%, 2019년 66.7%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20년 동안 고작 0.9%p 상승했습니다.

지난해 상반기 통계청 지역별 고용조사 분석 결과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임금 차이는 크게 나타났습니다. 전국 임금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남성 325만7000원인 반면 여성 207만8000원에 그쳤습니다. 월 100만원 이상 차이 나는 셈입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서도 성별 임금격차가 매우 큰 국가라고 평가됩니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의 남녀 임금 격차는 32.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했습니다.

과거와 비교해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고, 남녀 간 학력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음에도 불하고 성별 간 임금격차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일과생애연구본부 김난주 부연구위원은 고임금 직종과 고위직에서의 여성 노동자 부재를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여성가족부가 2020년 1분기 사업보고서를 낸 2148개 상장기업 임원의 성별 조사를 실시한 결과 여성 임원이 있는 기업은 33.5%(720곳)에 불과했습니다.

또 전체 기업의 여성 노동자는 293명당 1명, 남성 노동자는 40명당 1명이 임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즉, 여성과 남성의 노동자 대비 임원 비율의 성별 격차는 7.3배에 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당 조사를 진행한 CEO 스코어 박근주 대표는 “조사를 시작한 2012년 이후 주요 기업이 여성 임원을 선임한 사례가 가장 크게 나타난 것은 고무적이다”라면서도 “노동자 대비 임원수의 남녀 격차가 7.3배 벌어진 점은 개선사항이 여전히 많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지적했습니다.

성별 간 임금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성임원할당제, 임금공시, 고용률 개선 등이 지목되고 있습니다.

기업 여성임원할당제는 2003년 노르웨이에서 처음 도입됐습니다. 노르웨이가 공기업과 상장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을 최소 40%로 의무화한 것입니다. 이후 미국에서도 ‘이사회 다양성 연합체(ABD)’를 구성했고,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상장회사가 여성이사를 두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밖에도 이스라엘·인도·캐나다 퀘벡주 등에서도 여성임원할당제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성 평등 국가로 잘 알려진 노르웨이에서도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세계 최초로 여성할당제를 도입했어요, 하지만 한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2015년부터 주권상장법인의 여성임원 비율을 발표하고 있는데요, 100명 중에 3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개정 자본시장법에 따라 2022년 8월부터는 총액 2조원 이상의 주권상장기업은 최소한 1인 이상의 여성 이사를 포함해야 합니다. 갑자기 변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첫 삽을 떴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일과생애연구본부 김난주 부연구위원

정부는 현존하는 남녀 간의 고용차별을 없애거나 고용평등을 촉진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특정 성을 우대하는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A, Affirmative Action) 제도를 2006년 도입했는데요, 여기서 특정 성은 사실상 여성을 의미합니다.

공기업 및 일정 규모 이상의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기업은 매해 직종별, 직급별 남녀근로자 현황과 시행계획을 만들어 노동부장관에게 내야만 합니다. 또 남녀근로자현황을 분석해 동종 업종 및 규모에 비교해야 합니다.

특히 여성을 적게 고용할 경우 여성고용목표를 세워 시행토록 하고, 실적이 우수한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주기도 합니다.

정부는 올해 3월 성별업종분리를 해결하기 위해 AA 제도에 절대평가 요소를 도입한다고 밝혔습니다. 중공업·건설 등 여성 노동자 비율이 낮은 업종의 여성 고용률을 높이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동안은 동종업계 여성고용률의 70%만 도달하면 AA 제도를 준수했다고 인정했어요. 이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면, 예컨대 건설 분야의 여성 근로자 비율은 10% 정도예요. 그럼 12% 고용한 기업은 AA를 준수한 게 되는 겁니다. 반면 복지 분야는 여성 근로자 비율이 50%에요. 이때 12% 고용한 기업은 기준 미달이 되는 거죠. 산업별로 쪼개서 볼 것이 아니라 전체 산업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절대평가 도입은 잘했다고 봐요.” -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일과생애연구본부 김난주 부연구위원

김난주 부연구위원은 관련 제도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AA 제도를 도입 당시부터 강화했다면 성별 간 임금격차 문제가 지금보다는 호전됐을 거란 평가입니다. 덧붙여 임금 실태 파악을 위한 임금공시도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견고하게 다져진 유리천장을 깨부수는 일은 앞으로도 쉽진 않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조금의 희망은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한국도로공사는 기관 최초로 여성 사장을 임명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해병대 최초 여군 헬기 조종사가 배출됐습니다. 또 올해 1월에는 순경 공채 출신 첫 여성 대전경찰청장이 임용됐다고 합니다.

조금 깨진 유리천장 틈으로 새어 나오는 한줄기 햇살이, 무너진 유리천장에서 뻗어 나오는 햇발로 나아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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