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전태일 열사’는 부당한 노동현실 가운데서 노동자가 존중받는 세상이 도래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육신을 화염 속에 내던지는 희생도 서슴지 않았죠.

그의 숭고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열악한 노동현실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사각지대 안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저임금과 장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며,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다 목숨을 잃곤 합니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노동존중사회에 대한 희망에 숨을 불어 넣어 줄 새로운 노동정책이 필요한 때, <투데이신문>은 ‘우리가 바라는 근로기준법’을 기획했습니다. ‘전태일기념관’을 방문한 시민들께서 ‘내가 바라는 근로기준법’ 게시판에 손수 남긴 의견들을 토대로 실제 노동현장 최전선에 있는 노동자들이 원하고 바라는 노동정책을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전태일기념관’을 방문한 시민들이 ‘내가 바라는 근로기준법’ 게시판에 남긴 글 ⓒ전태일기념관<br>
‘전태일기념관’을 방문한 시민들이 ‘내가 바라는 근로기준법’ 게시판에 남긴 글 ⓒ전태일기념관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추가근무수당을 이미 포함하고 있어 야근 수당은 없답니다.”

최근 ‘신의 직장’으로 불리는 카카오에서 노동관계법 위반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중부지방고용노동청 성남지청이 지난 4월 카카오를 대상으로 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카카오는 그간 △일부 직원 주 52시간 이상 근무 △임산부 시간외 근무 △일부 직원 연장근무 시간 기록 금지 △퇴직자 연장근무 수당 지급 지연 △직장내 성희롱 교육 의무 위반 등을 자행해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여러 위반 사항 가운데서도 시간외 근무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MBC> 보도에 따르면 카카오에는 월 300시간 이상 근무하는 직원이 매우 많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2018년 한 개발자는 월 309시간을 근무했는데요, 30일 중 8번의 휴일을 뺀 나머지 22일을 근무일로 계산하면 그는 매일 14시간 이상의 근무를 한 셈입니다.

살인적인 노동강도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초과근무에 대한 수당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포괄임금제’ 때문이었습니다.

포괄임금제는 근로형태 또는 업무 특성상 추가근무수당을 정확히 집계하기 곤란한 경우, 수당을 급여에 미리 포함하는 형태의 근로계약입니다. 근로기준법 등으로 규정된 제도는 아니지만 정확한 노동시간 산정이 어렵거나, 회계상의 비효율성 등을 고려해 법원에서 인정하고 노동부에서도 ‘노사 합의로 이뤄진 임금체계’라고 해석하고 있는 계약 체계입니다.

예를 들어 야근이 예상되는 생산직 노동자나 관리자의 관리 영역에서 밖에서의 근무로 인해 근태관리가 어려운 외부 근무 빈도가 높은 영업직 등의 사정을 고려합니다. 비수기 등 정상근무가 어려울 때도 월급의 일정 부분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래 근무할수록 노동 효용성이 높아지는 직업이 아닌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업이거나, 직책이 높은 고위경영진 인사들에게 포괄임금제가 적용될 경우 더 효율적이라고 평가됩니다.

문제는 사무직 등 추가근무시간을 명확하게 산정할 수 있는 직군에서 추가근무수당을 주지 않기 위해 악용되고 있는 점입니다. 

201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2017년 매출액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포괄임금제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195개 응답기업 가운데 113개사(57.9%)가 포괄임금제를 도입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포괄임금제 적용 직군으로는 일반 사무직이 94.7%(107개사)로 가장 많았고 △영업직 63.7%(72개사) △연구개발직 61.1%(69개사) △비서직 35.4%(40개사) △운전직 29.2%(33개사) △시설관리직 23.0%(26개사) △생산직 13.3%(15개사) △경비직 8.0%(9개사) △기타 4.4%(5개사) 등 순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 초과근무 산정이 명확한 일반 사무직에서 가장 많이 포괄임금제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추가근무시간 산정이 어렵지 않은데 포괄임금제를 적용하는 것은 위법사항입니다.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시간에 따른 임금지급 원칙이 적용돼야 하며, 포괄임금제를 체결하는 것은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근로시간에 관한 규제를 위반하는 사항이므로 허용될 수 없다는 2010년 대법원 판례가 있습니다.

노동계는 그간 포괄임금제에 대해 ‘21세기 노비문서’라고 비판해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0대 국정과제 안에 포괄임금제 규제에 관한 내용을 포함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노동부는 2018년 포괄임금제 오·남용 지도지침을 발표할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6·8월 두차례나 발표를 연기했고, 2019년에도 빠른 시간 내에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아직까지도 지침은 마련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포괄임금제 개선을 약속한지도 어언 3년 7개월이 흘렀습니다. 약속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는 정부의 태도에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1년에 2000시간에 가까운 살인적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임금을 낮은 수준으로 묶어놓기 위한 각종 제도 때문에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은 처참하게 낮다. 사용자들은 노동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임금을 정하고, 연장·야간·휴일노동 등 각종 초과노동에 대한 수당을 정확히 계산하고 지급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괄임금제’를 이유로 각종 수당을 누락시키고, 노동시간을 허위로 계산해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고 있지 않다. 노동을 착취하고 저임금을 고착시키려는 재계와 정부는 지금 당장 각성하고 저임금 유발 제도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 -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 2021 부산차별철폐대행진단

“포괄임금제 규제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다. 하지만 정부는 당초 2017년 10월로 예정됐던 포괄임금제 규제 지침 발표를 수차례 연기했고, 집권 5년 차에 들어선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포괄임금제를 규정하는 내용은 노동관계법령에 없고, 대법원 판례를 지침으로 관행처럼 사용돼 왔다. 대법원 판례는 노동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포괄임금제를 허용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으나, 노동시간 산정이 가능한 사업장 다수가 초과근로수당 비용을 줄이기 위한 편법으로 포괄임금제를 오남용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포괄임금제를 규제하는 지침의 발표 시점을 3년 7개월째 반복해서 연기해왔다. 업종을 가리지 않고 만연한 포괄임금제로 장시간 노동, 공짜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시급히 규제해야 한다.” - 참여연대

참여연대에서는 포괄임금제 규제 지침 발표 연기 이유, 구체적인 발표 일정 계획 등에 관한 질의서를 지난달 31일 노동부에 전달했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부의 포괄임금제 폐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포괄임금제 폐지를 한 기업들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된 카카오와 삼성 SDS·SK C&C 등 대기업 계열사, 넥슨·넷마블·엔씨소프트 등 게임회사 등 국내 굴지의 기업들에서 이미 포괄임금제를 폐지하고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포괄임금제 폐지만으론 문제를 완벽하게 바로잡을 수 없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연장근무 시간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거나, 퇴근 후나 주말 휴일 중 메신저를 통한 업무지시 등 ‘비공식 초과근무’에 대한 수당 산정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에 따라 누군가에겐 효율적인 임금체계일 수 있는 포괄임금제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장시간 노동, 공짜노동을 야기할 수 있는 불필요한 포괄임금제는 정부에서도 문제를 인지하고 있는 만큼 시급한 반드시 규제돼야 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포괄임금제 폐지 이후에도 발생할 수 있는 편법에 대한 장치도 반드시 병행해 마련돼야 합니다.

‘더 일하고 덜 받는’ 부당한 관행은 이쯤에서 끊어내고 ‘일한 만큼 보상받는’ 당연한 개혁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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