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박세진 기자

【투데이신문 박세진 기자】 우거진 빌딩숲으로 이뤄진 서울은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수도이다. 저 멀리 대구에서 갓 상경한 나는 이곳에서 20대 ‘촌놈’으로 통한다. 그러나 촌놈이 바라본 서울은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부푼 마음을 안고 서울역에 도착한 촌놈은 시끄러운 도시소음에 압도됐다. 공기 가득 찬 매캐한 매연과 희뿌연 시야, 그 속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은 이 곳이 대한민국의 수도임을 실감나게 했다. 그 무엇보다 촌놈의 눈 길을 사로잡은건 서울역 곳곳에 자리 잡은 노숙인이었다.

언뜻 봐도 또래 같은 그들은 종이 박스에 앉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담배를 구걸하거나,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휘황찬란 할 것 같았던 서울의 환상이 보기 좋게 깨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무심코 넘길 법도 했다. 하지만 청년 노숙인을 향하는 나의 시선은 도무지 떠날 기미가 없었다. 이윽고 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거리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을까라는 의문이 온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분명 그들이 그런 환경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본격적으로 ‘청년 노숙인’ 취재를 시작하게 된 작은 원동력이 됐다.

모든 결과엔 원인이 존재한다. ‘원인’은 어떤 일이 일어난 까닭을 뜻한다. ‘결과’는 원인 때문에 벌어진 일을 뜻한다. 참 단순한 법칙이다. 잠시 엉켜버린 실타래를 떠올려보자. 실타래가 엉켜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분명 실타래가 엉켜버린 원인이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엔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엉킨 실타래를 푸는 방법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엉켜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즉 원인을 찾으면 된다. 그다음에는 문제가 된 원인을 풀기 위해 자그마한 노력을 기울이면 된다. 무작정 엉킨 실타래를 풀려 했다간, 더욱더 엉켜버린 실타래를 마주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원인을 찾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실타래를 예시로 든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마주하는 사회 문제도 마치 엉켜버린 실타래와 같다. 어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 원인을 하나하나 살펴봐야 한다. 한낱 실타래를 풀 때도 두 눈 부릅뜨면서 엉킨 실 한가닥부터 찾지 않는가.

이제 우리 사회 곳곳에 숨겨진 노숙인이라는 엉킨 실타래를 떠올려보자. 이들이 노숙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아주 다양하다.

지난해 발표된 ‘서울시 재난 상황에서 노숙인 등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숙인이 처음 비적정 주거를 이용한 이유는 ‘실직이나 사업 실패(46.7%)’, ‘경기 침체 등으로 인한 구직기회 감소(31.5%)’, ‘이혼이나 배우자·부모 사망 등 가족해체(30.1%)’ 순으로 나타났다. 이는 노숙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자, 노숙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키포인트’다.

그렇다면 ‘청년’ 노숙인은 어떨까. ‘젊은 놈이 게을러 빠져서’, ‘무작정 의지하려는 나약한 습성’, ‘인생을 포기한 낙오자’ 라는 부정적 시선과 편견은 잠시 거둬두고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해결을 위해선 그래야만 한다.

아쉽게도, 청년 노숙인이라는 원인을 찾기 위한 사회의 노력은 다소 미흡했다. 문제를 풀기 위한 의지는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들었다. 노숙인이라는 큰 틀이 아닌, ‘청년 노숙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찾기 위한 노력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마치 연례행사처럼 쏟아지는 ‘청년 자살률’, ‘청년 실업률’, ‘대졸 청년 구직률’, ‘청년 결혼율’, ‘청년 월 급여 지표’ 등 그 많고 많은 ‘청년’ 통계 중 ‘청년 노숙인’에 대한 통계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하다. 이는 우리 사회가 청년 노숙인을 바라보는 어두운 실상이자 잔혹한 현주소다.

직접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거리로 나서니 투명 인간 같은 ‘청년 노숙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눈으로 마주한 그들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다. 가난은 생각보다 잔인했다. 그리고 폭력적이었다. 매스컴에서 이따금 보여주는 가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었다.

500원에 자신의 성을 파는 삶을 고백하며 눈시울을 붉힌 그는 이런 삶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의 품에서 사랑받기도 모자랄 나이 15살부터 지하 주차장에 보금자리를 텄던 그도 마찬가지다. 이 외에도 만났던 모든 청년 노숙인들도 이런 삶을 원해서 태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들은 모두 기초생활 수급 신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몸을 뉠 주소지가 없기 때문이다. 현행 제도상 주소지가 없는 노숙자는 수급 신청을 할 수 없다. 거리 노숙자는 공공임대주택이나 주거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임시주거비지원사업이나 노숙자 시설에 먼저 입소해 3개월을 보내야 한다. 신청 후 선정까진 더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 그 절차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신청이 확정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 포기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청년 노숙인 사례를 지켜본 전문가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청년 노숙인에 대한 복지는 사각지대가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이라고.

온기 가득한 사무실 안에서 몇백억 단위의 예산을 책정하면 무엇 하는가. 탁상행정으로 만들어진 눈먼 예산은 차가운 거리에 닿기도 전에 식어버릴 따름이다. 두 손 두 발 들은채 엉킨 실타래가 풀리길 바라는 정부의 오만한 심보는 도둑놈에 가깝다. 올겨울 역대급 추위가 예고된 가운데, 정부의 묘수(妙手)가 필요한 시점이다. 거리의 청년 노숙인은 따사로운 집이 아닌, 차갑디차가운 거리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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