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데이터 과학자 출신 경제학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의 저서 (원제: Don't Trust Your Gut)에는 데이트 앱 분석을 통해 얻은 흥미로운 결과가 소개된다.온라인에서 데이트 신청을 많이 받은 사람들의 특징을 분석한 결과, ‘무난하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보다 극단적인 ‘좋아요’와 ‘싫어요’를 동시에 많이 받는 것이 더 유리했다. 온라인 데이트 시장에서는 ‘싫어요’를 피해 평범한 위치에 머무는 것보다 ‘싫어요’를 감수하더라도 강렬한 '좋아요'를 얻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흔히 피부를 자아와 세계를 나누는 경계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경계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달라진다. 예컨대 드라이버를 손에 쥐는 순간 뇌는 이를 신체의 일부로 인식하여 감각을 전달하는 확장된 기관처럼 작동시킨다. 덕분에 우리는 드라이버라는 확장된 신체를 통해 좁은 공간을 탐색하고 정밀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더 복잡한 도구를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전거에 올라타는 순간, 우리는 자전거가 자아의 일부로 통합되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통합 없이는 균형을 잡고 방향을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핸들을 돌리면 바퀴가 반대 방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에서 줄리엣은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그 꽃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똑같이 향기로울 거예요.”라는 대사를 남겼다. 하지만 루시 몽고메리의 소설 속 앤 셜리의 생각은 다르다. “나는 책에서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향기롭다’는 말을 읽었어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아요. 장미가 ‘엉겅퀴’나 ‘앉은부채’라 불렸다면 지금처럼 아름답지 않았을 거예요.”이름이 우리의 인식에 드리우는 영향은 오래된 사유의 주제다. 의 제목이 암시하듯, 이름은 우리의 시선과 감정을
오늘날 한국과 미국의 미디어 이용 패턴은 큰 틀에서 비슷하지만, 1960년대만 해도 두 나라의 미디어 환경에는 뚜렷한 격차가 있었다. 1965년 한국의 가구당 TV 보급률은 0.6%에 불과했지만, 미국은 이미 1950년대 말 TV 대중화의 절정기에 접어들어 1959년 보급률이 90%에 달했다.1960년대 TV는 미국인의 일상적 여가의 중심이 됐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에서 1960년대 이후 TV 시청이 미국인의 여가 시간을 사실상 잠식하며 공동체 활동을 약화시켰다고 분석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사후 출간된 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남겨져 있다. 파스칼의 이 가정처럼 우리는 일상에서도 종종 현재와는 다른 상황을 상상하곤 한다. “그때 회사를 옮기지 않았다면?”,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삶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는 종종 삶의 갈림길에서 있었던 반대 방향의 삶을 떠올려본다.이처럼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는 시나리오를 사회과학에서는 ‘반사실’(反事實, counterfactual)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들은 수천 행에 이르는 서사시를 암송했다고 전해진다. 호메로스의 는 1만5693행, 는 1만2110행에 달한다. 현대 책으로 치면 수백 쪽 분량이지만, 이들은 이 방대한 이야기를 암기해 구전으로 전승했다. 이러한 암송이 가능했던 이유는 서사시가 이야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인간의 뇌는 많은 양의 정보라도 이야기 형태로 주어질 때 훨씬 더 잘 이해하고 기억한다. 여러 연구는 인간이 단편적인 사실이나 수치보다 이야기로 엮인 정보를 더 오래, 더 깊이 저장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복잡한
한국에 텔레비전이 처음 도입된 해는 1956년이다. 국내 최초의 방송사 HLKZ-TV는 서울 종로구에 스튜디오를 세우고, 서울역 광장과 종각, 파고다공원 등에 수상기를 설치해 가두 방송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지만, TV 도입 시기는 비교적 이른 편으로 아시아에서는 일본, 태국, 필리핀에 이어 네 번째였다.국산 텔레비전 생산은 1966년 금성사(현 LG전자)가 시작했다. 하지만 TV는 여전히 고가의 사치품으로 1970년에도 가정 보급률은 6.3%에 불과했다. 때문에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장면이
중세가 저물 무렵, 뉴스는 노래와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됐다. ‘뉴스 발라드’라 불린 이 형식은 음유시인이 마을을 돌며 소식을 전하는 방식이었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오늘날 저널리즘과 유사한 형태가 유럽에 등장한다. 당시 영국에서는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신문이 보급되며 이전까지 권위에 의해 독점되던 정치적 의제들이 일반 공중의 토론 주제로 확장됐다. 독일의 정치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처럼 신문을 매개로 형성된 공적 대화의 공간을 ‘공론장’(Öffentlichkeit)이라 불렀다.미국 저널리즘은 이와는 조금 다른 경로를 따랐다.
논쟁을 통해 상대의 의견을 바꾸는 일은 몹시 어렵다. 수많은 연구가 보여주듯, 누군가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신념에 갇히기 쉽고, 한번 굳어진 결론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일찍이 데일 카네기는 1936년 저서 에서 “논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논쟁을 피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카네기에 따르면 논쟁은 이겨도 지는 싸움이다. 설령 논리적으로 승리하더라도 상대방 자존심에 상처를 줬다면 상대 마음의 문은 더욱 굳게 닫히고 만다.그는 “꿀을 얻으
늑대는 한 끼에 약 9kg(20파운드)의 생고기를 먹어 치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일 사냥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기에 며칠을 굶다가 사냥에 성공하면 한 번에 많은 양을 섭취한다. 늑대에게 ‘폭식은 건강에 해롭다’거나 ‘다음 식사를 위해 조금 남겨두어야겠다’는 고민은 존재하지 않는다.반면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큰 동물을 사냥해 고기가 남았을 때 ‘지금 다 먹기보다 일부를 남겨두는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엔 우연히 남겼을지 몰라도 차츰 ‘미래를 위한 저축’이라는 개념이 생존의 지혜로 발전했을
저널리즘에서 ‘객관성’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객관주의는 현대 저널리즘, 특히 미국 주류 언론에서 이상적인 보도 원칙으로 자리 잡아 왔다.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은 함께 쓴 에서 객관성(objectivity) 개념이 저널리즘의 일부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을 1920년대로 설명한다.1920년대는 저널리즘에서 객관주의가 만개한 시기라기보다 오히려 언론이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던 시대였다. 이 시기 사회과학에서 저널리즘으로 넘어온 객관주의는 언론이 신뢰받기 위한 정보 검증 절차를 확립
여론(輿論)은 영어로 옮기면 ‘공중(public)의 의견(opinion)’이다. 근대적 의미의 여론은 인쇄매체의 등장으로 가능해졌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유사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전제가 충족되면서, 추상적 존재인 공중의 집합적 의견도 생겨났다. 이후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여론의 흐름을 가속화했고, 인터넷은 실시간 의견 교환이 가능한 새로운 여론 공간을 열었다. 매체의 형식은 변해도 사람들의 마음이 연결되는 곳이라면 여론은 만들어진다.사회과학적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선구자인 폴 라자스펠트와 동료들은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분석에서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작 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사무라이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관계자들의 엇갈린 증언을 통해 진실의 다면성을 탐구한다. 각 인물은 자신만의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진술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인식하는 진실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1986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이 남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전체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TV 광고를 내보냈다. 2012년 가디언은 ‘
커뮤니케이션학에서 ‘배양 효과’(cultivation effect)는 언론학자들이 흔히 ‘매개된 현실’이라고도 부르는 ‘미디어 속 현실’이 수용자의 현실 인식에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뜻한다. 이러한 접근의 주창자들은 미디어에 많이 노출될수록 세계에 대한 인식이 객관적 현실과 더 큰 괴리를 보이며 미디어 속 현실을 닮아 간다는 데 주목했다.이 이론이 등장한 당시 그 중심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연구자들은 미국 3대 네트워크 방송의 프라임타임 프로그램을 분석하며, 그 속에 포함된 폭력적 묘사가 시청자의 폭력성과 현실 인식에 미치는
15세기 유럽의 대항해 시대는 지도 제작의 혁신을 이끌었다. 신세계 탐험과 항로 계획에 지도는 필수였지만, 초기 지도들은 정확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과 그 인근은 비교적 정밀하게 표현됐지만 미지의 영역은 부정확했고, 때로는 바다 괴물 같은 상상의 존재들로 채워졌다. 이러한 요소들은 지도 판매에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지도 제작의 방향을 결정한 것은 정확성이었다.월터 리프먼은 1922년 출간한 언론학의 고전 에서 언론을 복잡한 세상을 항해하는 데 필요한 지도에 비유했다. 대항해 시대에 정밀한 지도가 필
현대 커뮤니케이션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칼 호블랜드는 1951년 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연구는 제목 그대로 동일한 메시지라도 공신력 높은 출처에서 전달된 정보가 우리의 의견과 태도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확인해준다.여기까지가 결론이라면 이 연구는 더 이상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더 흥미로운 발견은 4주 후 다시 실험을 진행 했을 때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자 공신력 낮은 출처에서 나온 정보나 높은 출처에서 나온 정보나 그 효과가 비슷해졌다. 그 차이가
모든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올해는 유례없는 늦더위와 폭염으로도 기억될 만하다. 9월 첫 폭염 경보와 기록적인 열대야는 올해 추석의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됐다.나에게는 이번 기후 이변이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되새기는 계기가 됐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를 과장된 공포로 치부하거나, 그 영향이 별로 심각하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이러한 회의론은 기후 변화의 원인이 복합적이고, 예측 모델의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사실에 기대고 있다.실제로
언론의 정치적 편향성이 사주의 영향에서 비롯된다는 통념은 언론을 둘러싼 논의에서 흔히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다른 사례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진보 성향의 의 발행사가 소유했던 이 보수적 논조를 유지했던 것은 이러한 통념을 깨는 흥미로운 사례다.소유주의 정치적 성향이 보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실제로는 시장, 즉 독자의 성향이 언론의 편향성을 결정한다는 견해도 있다. 경제학자 매트 겐츠코프와 제시 사피로는 2015년 미국 내 433개 언론사의 보도 언어를 분석해 정치적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문자는 기원전 30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인들이 점토판에 남긴 쐐기문자로 알려져 있다. 수메르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문자는 쌍방 간 계약과 거래 내용을 기록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기원전 2000년대의 점토판에 새겨진 설형문자도 대체로 양과 염소의 숫자 정도를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문자는 현대적 의미로 보자면 미수금 기록이나 영수증 더미였던 셈이다.문자가 등장한 이래 소리를 내지 않고 읽는 묵독(默讀)이 일반화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인쇄 매체가 확산되
조지 오웰의 작품 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49년에 출간됐다. ‘1984’라는 제목은 그가 원고를 완성한 해인 1948년의 마지막 두 자리를 바꾼 데서 유래했다.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오웰은 약 40년 후의 미래를 매우 암울하게 그려냈다. 소설 속 ‘빅 브라더’는 모든 개인의 행동과 사상을 감시하고, 자유와 생각을 억압하는 독재적 통제 체제를 상징한다. 이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권력자들은 과거와 현재의 기록을 끊임없이 조작하며, 신어(newspeak)라는 유일한 언어를 만들어 현실의 모순을 감추고, 다른 사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