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소연 칼럼니스트
▷성우, 방송 MC, 수필가
▷저서 <안소연의 MC되는 법> 
         <안소연의 성우 되는 법>

노래방 엔딩 곡이 언제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인 친구가 있다.

아, 그 노래! 하고 반색하는 분이라면 당신은 60년대에서 70년대에 태어난 사람일 게다. 그리고 이 노래가 ‘고무신을 꺾어 신었음 직한’ 옛 여친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마주친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도 잘 알 것이다.

6070이 아닌 분들을 위해 잠시 노랫말을 소개한다.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너를 다시 만났었지.

신문을 사려 돌아섰을 때 너의 모습을 보았지.

발 디딜 틈 없는 그곳에서 너의 이름을 부를 때,

넌 놀란 모습으로 음음음음~

너에게 다가가려 할 때에 난 누군가의 발을 밟았기에

커다란 웃음으로 미안하다 말해야 했었지.

살아가는 얘기, 변한 이야기, 지루했던 날씨 이야기,

밀려오는 추억으로 우린 쉽게 지쳐갔지.

그렇듯 더디던 시간이 우리를 스쳐 지난 지금

너는 두 아이의 엄마라며 엷은 미소를 지었지.

나의 생활을 물었을 때

나는 허탈한 어깻짓으로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아직 찾고 있다했지.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엔

빛나는 열매를 보여준다 했지.

우리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그 날의 노래는 우리 귀에 아직 아련한데..

가끔씩 너를 생각한다고 들려주고 싶었지만

짧은 인사만을 남겨둔 채

너는 내려야했었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너의 모습이 사라질 때

오래 전 그날처럼 내 마음엔...

아...

이 명곡은 노랫말만 가지고도 소설 한 편을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일단 친구의 사연으로 돌아가겠다.

친구는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았다. 스물 한 살인가 두 살에 만나 일 년쯤 사귀었던, 군대 간 남자 친구가 거의 유일한 옛사랑이었다.

참 성실하고 살뜰한 남자였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친구와의 미래를 위해 적금도 들고, 일부러 군 입대도 서둘렀다. 입대 전 떠났던 여행에선 친구의 손만 잡고 잠들었을 만큼 순수한 청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친구를 너무 몰랐다. 친구는 그가 입대한 지 딱 한 달이 됐을 때 헤어지자는 편지를 보냈다.

참 많이 사랑했지만, 그 사람만큼 편하고 좋은 사람을 그날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친구는 그 일방적인 결별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느 날, 또 그 오래 전 남친을 그리며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를 부르는 친구에게 이렇게 오래 싱글로 있으면서 왜 한 번 찾아보지 않느냐 물은 적이 있다. 헤어질 이유도 딱히 없지 않았느냐고.

“미안해서 어떻게 그래. 차라리 두 아이의 엄마쯤 되었으면 모를까” 친구는 쓸쓸히 웃더니 이런 말을 덧붙였다.

“세상에는 다섯 개의 ‘사랑의 언어’가 있대. 내 사랑의 언어는 시간이야. 함께 하는 시간.”

무슨 개똥철학인가 했더니 카톨릭 교단에서 출판한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 얘기였다. 내용은 이렇다.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내용과 강도의 오글거림으로 만남을 시작한다. 하루가 멀다 만나고 별 것도 아닌 일로 얼고 떨고 언제나 상대방이 우선순위 1위다. 이 때 둘의 관계는 언제나 그린라이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안정적인 관계가 되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그러니까 저 편한 대로 상대방을 사랑하고 또 받기를 원한다. 이때부터 남녀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 나름의 방식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면

1. 말: 상대를 칭송하는 말

2. 봉사: 상대를 위한 약간의 희생과 봉사

3. 스킨십: 상대를 만지고 접촉하는 행동

4. 시간: 상대와 함께하는 시간

5. 선물: 상대에게 선물 주기

자신의 사랑의 언어가 3번 스킨십인 사람은 상대와의 신체적 접촉이 뜸해지면 상처를 받는다. 자신의 언어가 1번인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을 끊임없이 추어올려 주어야 행복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아이고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못 살아.’하게 되면 평균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관계가 어그러진다.

어린 시절 외롭게 자란 친구에게 사랑이란 ‘함께 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자신을 위해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할애해줄 때 사랑받는다는 안도감이 들었던 거다. 그런 친구를 두고 미래를 함께 하기 위해서라며 군대부터 가버린 그 남자는 본의 아니게 최악의 선택을 했던 셈이다.

딱 하나의 언어만 가지고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섯 가지를 골고루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친구처럼 조금 폭 좁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친구에게 네 생각이 좀 편협한 것 같지 않으냐고 얘기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냥 그 취향과 방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하늘이 허락한다면 그런 짝을 만날 날이 올 터이다. 짚신도 짝이 있다니까.

저마다 확인해보면 좋겠다.

나의 사랑의 언어는 무엇일까.

내 상대의 사랑의 언어는 무엇일까.

어느 것도 맞고 틀린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를 뿐.

진정한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또 당당하게 나의 방식을 알리고 요구할 수 있어야한다. 서로가 상대의 방식을 존중하기 힘들다면 그 관계는 접는 게 좋다.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알고 노력하면 기필코 백년해로하리니 이 글을 읽으신 분들, 부디 각자의 ‘사랑의 언어’ 찾기에 성공하시길,

동일 어족(語族) 배필을 찾는다면 금상첨화.

▲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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