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홍기원 기자】 “살려달라 애원해도 들어주는 곳 하나 없고 대책 마련 없는 다가구 주택 시민으로 어떻게 헤쳐나가야 했나요. 말씀해주세요.” (1일 사망한 전세사기 피해자의 유서 중에서)
대구에서 지난 1일 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전세사기 피해자들 중 스스로 세상을 등진 8번째 ‘알려진’ 죽음이다.
고인은 2019년 전세금 8400만원으로 다가구 주택에 입주했지만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오히려 임대인의 월세 요구에 시달렸다고 한다. 다가구 후순위인데다 소액임차인에 해당되지 않아 최우선변제금도 받지 못하는 암담한 처지였다.
지난달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는 고인에 대해 전세사기 특별법상 ‘피해자’가 아닌 ‘피해자 등’으로 인정받았다. 1일 다시 피해자로 인정받았지만 고인의 죽음을 막기에는 때늦은 결정이었다.
지난해부터 정부가 수차례 내놓은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대책도, 국회에서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과 관한 특별법(이하 전세사기 특별법)이 통과된지 1년이 지났음에도 실질적인 구제를 받지 못한 피해자들의 절망이 깊어가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는 수도권을 넘어 전국으로 번진지 오래인데 구제대책은 숱한 사각지대만 남긴 채 그 쓸모를 다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9일 기자회견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혹시나’하는 기대를 가질 기회였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전세사기에 대한 인식은 이들의 기대와 거리가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윤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전세사기도 발생해서 많은 국민들이 큰 고통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단 대통령이 많은 국민들이 고통받는 사안으로 전세사기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이 문제가 부동산이라는 자산에 대해서 시장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동산세제 완화를 설명하기 위해 전세사기가 잠시 나왔을 뿐, 억울한 피해자들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기에 그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민달팽이유니온 지수 위원장은 “윤 대통령이 집에 대해 국민들에게 필수적이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간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상품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서민들이 겪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제대로 진단을 못하고 있다”고 평했다.
이어 “주택임대차시장은 소비자인 세입자에게 최소한의 정보제공도 보장되지 않아 애당초 시장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곳이 아니다. 전세사기는 시장원리를 무시해서 생긴 게 아니라 세입자의 기본적인 권리 보호가 안되는 주택임대차 제도를 오랫동안 국가가 방치해서 생긴 ‘사회적 재난’”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왜곡된 시장을 수요공급의 관점으로만 해석해서는 좋은 해법이 나오기 어럽다는 의미다.
고인이 숨진 다음날인 2일, 야당 주도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부의됐다. 개정안은 우선 정부기관이 피해자의 전세보증금 일부를 돌려주고 이후 임대인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 ‘선구제 후회수’ 방안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해당 개정안에 난색을 표하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전세사기피해자전국대책위원회 안상미 공동위원장은 “전세사기는 개인이 해결하기 불가능한 문제다. 피해자들은 절벽으로 밀려나고 있는데 지금의 전세사기 특별법은 이들을 구제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라며 “전세사기 특별법을 개정하고 추가 대책을 세워 피해자들이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주택은 부동산시장에서 상품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국민들이 사는 주거로서 실생활을 유지하는 기본근간이다. 윤 대통령에게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수반으로서 고인이 남긴 유서에 답할 의무가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억울한 고통을 조속히 구제하지 못한다면 “서민과 중산층의 시대를 열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구호에 그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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