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민준부터 열세 살 준호까지…발달지연 가족의 현실
조기 개입이 관건이라지만…진단이 치료로 이어지진 않아
치료비는 월 수백만 원, 하지만 국가 바우처는 부족한 실정
축소되는 보험과 커지는 민간 시장, 책임은 가족에게만 전가
각기 다른 시간 속 마주한 발달지연…제도 너머 사회적 과제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질병분류(ICD-10)는 ‘발달지연’을 코드 R620, 즉 ‘지연된 이정표(Delayed milestones in childhood)’로 분류한다. 또래보다 느린 발달지연은 더 이상 소수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그 ‘느린 속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진단과 치료 개입은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공적 시스템은 느리고 복잡하며,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마지막 희망이던 민간 보험마저 점차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절박함이 시장의 틈새로 흘러들어간다는 점이다. 난립하는 발달센터부터 보험사기에 이르기까지, 제도의 빈틈을 파고든 민간 시장은 활발히 움직이지만, 정작 부모들은 믿고 의지할 곳을 찾기 어렵다. 일부는 ‘사적 해결’을 택하고, 어떤 이는 결국 포기한다. 그 사이 아이의 치료 ‘골든타임’은 조용히 사라진다.
본보는 발달지연을 겪는 다섯 가족의 여정을 통해, 진단과 치료 접근의 어려움부터 비용 부담, 정보 비대칭, 공적 지원의 한계, 민간 치료 시장의 그늘, 그리고 제도 밖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가족들의 현실을 추적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비단 개인의 고통이 넘어 우리 사회가 발달 문제를 어떻게 방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한 아이는 또래보다 말을 늦게 시작하고, 다른 아이는 눈을 잘 맞추지 않는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조금 더 전문적인 진단을 받아보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레 권한다. 당황한 부모는 혼란과 불안에 휩싸여 묻는다.
“혹시 우리 아이가 병인가요?”
진단을 받으면 달라질까, 치료를 시작하면 나아질까, 아니면 ‘장애’로 분류되는 건 아닐까. 두려움과 망설임, 죄책감이 교차한다. 부모는 아이의 발달이 늦는다는 사실보다 그 이후 마주하는 현실에 더 깊게 무너진다.
‘발달지연’은 최근 몇 년 새 보건소, 유치원, 병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빈번하게 거론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단어 뒤에는 준비되지 않은 복잡한 현실이 숨겨져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질병분류(ICD-10)는 이를 ‘Delayed milestones in childhood’, 코드 ‘R620’으로 분류한다. 말 그대로 ‘또래보다 발달의 주요 이정표가 늦은 상태’를 뜻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발달지연 진단 아동은 2018년 2만2292명에서 지난해 6만1273명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실손보험 청구액도 277억원에서 1599억원으로 6배 증가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언어·사회성·운동 발달이 지연된 아동이 뚜렷이 늘었다. 대한소아재활의학회지에 발표된 국내 연구는 팬데믹 세대 아동이 이전 세대보다 주요 발달 지표 전반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진단이 증가한 만큼 치료로 연결되는 비율은 낮다. 진단을 받아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아이가 많다. 민간 치료기관은 비용이 높고, 대학병원은 대기 기간이 수년씩 이어진다. 실손보험은 보장 범위를 좁히고 있으며, 정부 바우처 등 공공 지원도 금액이 적고 연령 제한이나 장애 등록 조건 등으로 실제 활용이 어렵다.
더 심각한 점은 발달지연 치료에 있어 ‘조기 개입’은 필수라지만 그 시스템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조기 개입의 벽 : 망설임, 부실 검사, 책임의 사유화
두 돌이 지나도록 말을 제대로 하지 않던 민준이의 어린이집 교사는 정밀 검사를 권했고, 아버지는 수차례 검색 끝에 대학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의사를 만나 진단받기까지 몇 달이 걸렸고, 치료 대기만 1년을 넘겼다. 첫 진료 날 의사는 말했다.
“이 시기를 놓친 게 아쉬워요. 조기 개입이 더 잘 됐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이의 이상 신호를 처음 발견하는 건 대개 부모지만, 많은 부모가 이를 부정하거나 망설인다. 전문가들은 이를 ‘심리적 부정(denial)’이라 부르며, 이런 정서적 저항이 진단 시기를 수개월 이상 늦출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임을 온전히 부모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진단 이후 과정 전체가 개인과 가족에게만 맡겨진 구조가 문제다.
정보 검색부터 병원 예약, 치료기관 선택, 비용 감당까지 모두 가족의 시간과 자원, 의지에 의존한다. 민준이 어머니는 말한다.
“암 진단을 받으면 병원에서 치료 일정을 함께 짜주잖아요. 그런데 발달지연은 진단 이후 모든 게 부모 몫이에요.”
한편 국가가 시행하는 영유아 건강검진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총 8회 실시되는 발달선별검사(K-DST)는 민감도와 정확도가 낮아, 실제 발달지연 아동 중 약 25%만 포착된다. ‘주의 필요’ 판정을 받아도 정밀검사 연계나 치료기관 안내가 없어 부모가 ‘이상 없음’ 판정에 기대 진단을 더 늦추게 된다.
사회적 분위기도 영향을 준다. “조금 더 기다려보자”, “첫째는 원래 그래”라는 말들은 위로가 아니라 조기 진단의 기회를 가로막는 방관일 수 있다. 보육기관은 전문가가 아니라며 선을 긋고, 의료기관은 후속 안내를 하지 않으며, 정부는 통계 외 별도의 추적 체계를 마련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부담은 부모에게 쏠린다.
발달지연은 조기 개입에 따라 결과가 극적으로 달라지는 대표적 질환이다. 신경과학계는 생후 36개월을 신경가소성이 가장 높은 시기로 보는데, 이 시기를 놓치면 치료 효과가 급감하고 이후에는 ‘보완’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국내 평균 진단 연령은 만 4~5세에 머물고 있다.
조기 개입의 실효성을 낮추는 ‘구조적 병목’
조기 개입을 막는 가장 큰 장벽은 구조적 병목이다. 초기 선별 검사부터 전문 진단, 치료 연계까지 이어지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 보건소는 검사 인력과 장비가 부족하고, 대학병원 진료는 최소 몇 달에서 몇 년씩 기다려야 한다. 일부 지자체에는 발달전문 클리닉조차 없는 곳도 많다.
진단을 받아도 치료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다. 언어·감각통합·놀이치료 등 다양한 치료를 제공하는 민간 치료센터는 대기는 짧지만 비용이 높다. 월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에 이르는 치료비는 실손보험 비적용 시 부담이 커 치료를 포기하는 사례도 많다.
공공기관 발달재활서비스는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바우처 지급 대상과 금액이 제한적이며, 제공 치료 시간도 부족하다. 월 14~25만 원 수준 바우처로는 실제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렵고, 일정 횟수 이상 치료를 받으려면 추가 자부담이 필요하다.
또한 정부 지원은 장애 등록, 소득 조건 등 까다로운 진입 요건이 있다. 이는 조기 개입을 시도하는 가정에 현실적 장벽으로 작용한다. 보험과 제도적 보장도 조기 개입을 가로막는다. 최근 실손보험은 반복 치료와 장기 치료, 비급여 항목 보장을 줄이는 추세다.
이러한 현실은 치료 접근성에 명백한 불균형을 낳는다. 부모의 정보력, 경제력, 거주 지역에 따라 아이가 받을 치료 수준이 달라진다. 소득이 낮거나 지방 거주 시 조기 개입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
결국 치료가 필요한 아이보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아이가 적은 역전 현상이 벌어진다. 선별·진단·치료 사이 간극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진다. 그 사이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의 발달 가능성은 점차 좁아진다.
‘기준 밖 아이들’을 따라가는 다섯 가족의 여정
진단은 빨라졌지만 치료로 이어지는 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처음 아이의 발달이 늦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부모는 새로운 삶의 패턴에 들어선다. 병원 예약, 센터 대기, 치료비 충당, 보험 청구, 바우처 신청, 그리고 끊임없이 따라붙는 ‘이게 다 우리 탓일까’ 하는 죄책감까지.
지원 제도는 있지만 자격 요건은 까다롭고, 실손보험은 점차 보장을 축소한다. 민간 치료 시장은 커지고 있지만 질 관리가 어렵다. 제도가 있으나 그 틈새에 빠지는 가족이 너무 많다.
다섯 가족의 서로 다른 시기를 따라가 봤다. 모두 발달지연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졌지만, 아이들의 나이와 환경은 다르다. 가장 어린 아이는 세 살, 가장 오래 걸어온 아이는 열세 살이다.
[ 세 살 민준이 — 조기 진단, 가장 늦게 시작된 치료 ]
민준이 부모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에도 병원 방문을 망설였다.
‘괜한 병명’을 붙이기 싫었고, 가족들의 ‘지켜보자’는 위로에 기댔다.
결국 민준이는 또래보다 1년 이상 말이 늦다는 진단을 받았고, 이미 치료 대기만 1년이 걸린 상황에 처했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부모의 자책이 깊어진다.
[ 다섯 살 서진이 — 보험 보장 축소에 남은 건 자비 뿐 ]
서진이는 실손보험 덕에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언어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보험사는 지급 심사를 강화하며 일부 치료비 청구를 거절하는 상태다. 반복 치료를 문제삼고 있으며 일부 청구의 경우 누락도 잦다.
“치료는 점점 늘어나는데 보험은 줄어들고 있다.” 매달 수백만 원을 자비로 부담하며 치료를 이어가는 가족의 현실이다.
[ 일곱 살 하준이 — 학교라는 또 다른 문턱 ]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하준이 부모는 학령기에 접어들며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돌봄 중심인 유치원과 달리, 학교에서는 교과 중심 수업에 특수교사 지원이 부족하다.
“학교는 치료나 돌봄이 아니라 ‘평가’의 공간임을 실감했다.” 부모는 입학 유예를 고민 중이다. 울타리 없는 공간에 아이를 내던지는 것이 두렵다.
[ 아홉 살 윤수 — 바우처 종료와 장애 등록 고민 ]
윤수는 만 9세 미만까지만 지원되는 발달재활 바우처로 언어 치료를 받아왔다. 이제 ‘장애 등록’을 고민하고 있다. 등록하면 복지 혜택을 받겠지만, 부모는 ‘장애’라는 낙인을 걱정하고 있다.
“지원받기 위해 ‘장애’가 돼야 한다는 현실이 씁쓸하다”
[ 열세 살 준호 — 커지는 몸, 사라지는 시스템 ]
자폐 스펙트럼 판정을 받고 10년간 사설 치료를 받아온 준호는 초등 고학년이 되며 집단 따돌림과 정서 위축을 겪었다. 고지능으로 평가되지만, 통합학급에서의 교사 지원은 부족하다.
“더 이상 치료받을 곳도, 기대할 곳도 점점 줄고 있다.” 부모는 아이가 성인이 된 이후 ‘그 다음’이 없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꼽는다.
발달은 느릴 수 있지만 시스템은 안 된다
전문가들은 “발달 문제는 가능한 빠르게, 그리고 가능한 오래 개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진단은 빨라졌지만 개입은 대부분 부모에게 맡겨져 있고, 시작된 개입조차도 지속이 어렵다.
조기 개입이 중요한 이유는 치료를 통한 발달 가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시스템은 조기 개입만 강조할 뿐, 이후 대책은 부족하다. 이에 조기 치료는 개인의 회복을 넘어 사회 전체의 장기 비용을 줄이는 투자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보험연구원도 조기 개입이 의료비, 교육비, 돌봄 비용 등 사회적 부담을 낮출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발달 문제는 가정의 몫이 아닌, 공공의 책임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해외 주요 선진국들도 발달지연 조기 개입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 지원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조기개입 프로그램(Early Intervention Program)’을 통해 만 3세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진단부터 치료, 가족 지원까지 통합적으로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은 발달장애 아동의 사회 적응과 교육 성과 향상에 긍정적인 효과를 내며, 장기적으로 특수교육 필요도를 줄여 사회적 비용 절감에도 기여하고 있다.
호주 역시 지역사회 기반 조기개입 서비스를 확대해 발달지연 아동과 가족에게 맞춤형 지원을 제공한다. 이들은 의료, 교육, 복지 기관 간 협업 체계를 강화해 조기 진단부터 치료, 사후 관리까지 연계성을 높이고 있다. 덕분에 치료 접근성 향상과 가족의 부담 경감 효과가 보고되고 있다. 유럽 일부 국가들도 조기 개입에 적극 투자하며, 발달지연 치료에 따른 경제적·사회적 편익을 연구하여 정책 근거로 삼고 있다.
이처럼 해외 사례는 조기 개입과 지속적 치료가 개인의 삶의 질 향상뿐 아니라, 국가 차원의 비용 절감과 사회 통합에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지금도 수많은 아이들이 ‘기준 밖’에 서 있다. 그 아이들을 지켜보는 가족들은 묻는다.
“이게 정말 우리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 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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