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이 즈음은 각 대학이 여름방학을 시작한 기간이다. 여름방학이지만 이 시기는 교수들에게 곤혹스러운 기간이기도 하다. 채점과 성적처리 기간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기말고사와 동시에 방학이 시작되지만, 교수는 학생들의 답안과 보고서를 채점하고, 성적 통계를 내고, 출석부를 정리하고, 성적과 관련된 서류와 출석부, 그리고 상담일지를 제출한 후 처리된 성적에 이의를 가진 학생들의 이의신청을 받고 답변해야 성적처리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된다. 물론 방학이 시작돼도 대학교원 입장에서는 출근의 압박이 좀 줄어들 뿐이고, 업무는 계속된다.

대학이 존폐의 기로에 놓인 상황에서 양질의 수업을 경쟁력으로 내세우다 보니, 성적 산출 관련 업무가 늘어나고, 교원 한 명이 담당할 수업과 학생의 수도 갈수록 늘어난다. 그리고 교원이 나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체력 저하와 노안으로 교원에게 성적처리는 모두 힘든 과정이다. 그러나 본 지면에서 필자는 학생들의 성적 이의신청만을 소재로 골라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교양과목만 강의한다. 그렇다 보니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과목을 강의하고, 이에 따라 다양한 연령과 전공의 학생들이 필자의 강의를 수강하며, 이에 따라 이의신청의 수도 많고 양상도 다양해진다. 문자메시지나 각종 메신저, 이메일로 다짜고짜 “교수님, 제 성적 왜 이래요?”라고 묻는 학생도 있고, 자신의 성적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는 학생도 있다. 읍소하는 학생, 화내는 학생 등 문자메시지, 각종 메신저, 이메일에 작성된 글씨에서 느껴지는 학생들의 감정도 다양하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얘기해주면 의외로 공통된 반응이 온다. 그건 바로 “요즘 아이들 정말 X가지 없네”라는 반응이다. 어떻게 교수님이 부여한 성적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냐, 전화나 이메일도 아니고 문자메시지 하나 ‘툭’보내서 성적을 문의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자기 학과나 이름도 밝히지 않고 용건부터 말하는 학생에게는 낙제점을 줘야 한다 등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에 “내 학창시절에”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자주 동반된다.

말이 나온 김에 필자도 소위 “라떼는 말이야”라는 논조의 옛날 이야기를 꺼내보겠다. 필자의 유년 시절, 부모님께서는 무척 ‘예절’을 강조하셨다. 부모님의 강조하신 여러 예절 가운데 ‘전화예절’도 있었다. 전화벨이 5번 울리기 전엔 전화를 받을 것, 상대방이 어른이면 인사부터 할 것, 밤 9시를 넘으면 다른 집에 전화하지 말 것, 다른 집에 전화할 때 반드시 인사하고 나의 신분을 밝힐 것 등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 ‘집 전화’가 아닌 ‘내 전화’를 하나씩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오는 전화를 골라서 받을 수 있게 됐고, 다른 사람이 나 대신 전화를 받을 일도 많이 줄어들었으며, 내가 전화를 받지 못해도 누가 전화했는지 알 수 있고, 잠들기 전까지 전화기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집 전화’의 시대에서 ‘내 전화’의 시대로 바뀜에 따라 전화 예절도 바뀌었다. 누가 전화했는지 뻔히 아는데 굳이 내가 누군지 밝힐 필요가 없어졌고, 야밤이나 새벽만 아니면 전화하는 것이 큰 실례가 되지도 않게 됐다. 메신저가 보편화되면서 통화보다는 메신저를 주고 받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성적 이의신청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변하지 않은 것과 크게 변한 것이 보인다. 과거나 현재나 대학생은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지만, 막상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일 수 있다. 대학생의 상당수가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대학’이라는 곳을 처음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의 행정이나 교수 개개인의 상황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성적에 대한 아쉬움에 몰입되어서 무작정 교수에게 성적 문제를 문의하는 경우가 많다.

변한 것도 있다. 일반화 시킬 순 없지만,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양태가 좀 달라졌다. 적어도 필자가 겪었던 학생들은 주로 출석에 집착하는데, 필자의 학창 시절에는 한 두 번 결석에 집착하지 않았다. 또한 필자의 학창 시절, 성적 이의신청은 매우 신중히 결정할 행위였지만, 필자가 겪었던 성적 문의에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라는 의도가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필자의 학창 시절에 성적 이의신청은 일종의 학점을 건 모험이었다. 자신이 받은 성적에 의구심을 품는 것은 교수의 권한과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성적에 이의를 신청했을 때 학생이 이해할 수 있게 잘 설명해주는 교수도 있었지만, 버럭 화를 내거나 연락 자체를 무시하는 교수가 더 많았다.

그러나 인구 절벽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학생의 수가 줄어들고 교수자와 학습자 사이의 관계에서 권위적인 위계질서가 약해지면서, 교수가 학생에게 강압적 태도를 보이면 그 소문이 퍼져서 그 교수의 강의가 폐강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게 됐다. 이렇다 보니 교수 역시 학생의 성적 이의신청에 권위적 반응을 보일 수 없게 됐다.

성적 이의신청을 위해 전화를 거는 학생의 수도 줄어들었다. 휴대전화 메신저, 문자메시지, 이메일이 없던 시절 성적 이의신청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교수에게 직접 찾아가는 것과 전화를 하는 것뿐이었다. 이메일과 문자메시지가 보급되면서 이것을 이용해 성적에 관해 문의하는 사례가 늘어났는데, 처음에 이것은 매우 예의 없는 행위로 인식됐다. 그러나 이메일, 문자메시지, 심지어 카카오톡을 비롯한 각종 메신저의 사용이 일상이 된 현대 사회를 사는 학생에게 전화 통화가 오히려 더 어색한 행위가 됐다. 각종 메신저나 문자메시지를 이용해 문의하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성적 이의신청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수업과 관련하여 문의하는 학생 중 전화를 하는 학생은 거의 없고, 전화로 문의하더라도 자기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자신이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는 학생도 많다.

AI의 활용도 늘어났다. 학생들이 보낸 성적 문의 이메일들을 살펴보다가, 필자는 다른 학생이 보낸 이메일에서 같은 내용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했다. AI에게 “교수님께 성적에 대한 이의를 신청하려고 그러는데, 교수님의 기분을 상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이메일을 작성해 줘”라고 문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AI까지 활용하면서 최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노력했다는 점은 갸륵하기까지 했지만, 자신의 의사 표현에 AI까지 동원하는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도 느껴졌다.

특히 나의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께 배웠던 기본적인 매너를 AI에게 문의해야 할 사항이 될 정도로 가정교육이 붕괴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정에서 배웠어야 할 것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다 보니, 학교 교원들의 업무가 늘어나고 교원과 학부모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여러 문화인류학자·사회학자들의 연구와 교과서적인 정리에서 교육적 개념으로 표준화된 문화의 다섯 가지 속성은 “공유성, 학습성, 축적성, 체계성, 변화성”이다. ‘문화’의 정의가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서 이룩하고 후세에게 전달한 모든 것”임을 감안했을 때 ‘성적 이의신청’이나 ‘전화예절’ 등도 문화 중 하나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앞으로 AI의 활용이 더욱 일반화되고, 기존의 사제간 권위주의가 더욱 감소하게 되면 캠퍼스의 풍경은 더욱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문화의 변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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