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 적지만 가치 있는 무대 위해 합류 결정
과거·현재·미래에도 변치 않을 고전의 힘 믿어
고통 사랑하는 후배들...온몸으로 무대 누벼
55년의 연기 비결...일의 고귀함 깨달았기 때문

55년차 배우 정동환이 투데이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55년차 배우 정동환이 투데이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전세라 기자】“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이는 단테 『신곡』에서 지옥 입구 문에 새겨진 문장이다. 지옥은 죄와 그 결과가 영원히 지속되는 곳으로 단테는 이 문장을 통해 신의 심판과 죄의 결과를 알리고자 했다.

70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오면서도 『신곡』은 여전히 작품이 가진 가치와 의미를 인정받고 있다. 인간의 죄와 벌, 구원과 사랑을 담은 이 장대한 여정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낯설면서도 친숙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거대한 작품을 무대 위에서 단 3시간으로 풀어낸 여정에 55년차 배우 정동환이 함께했다. 나뭇잎이 가을 옷을 입기 시작한 9월의 어느 날, 묵직한 눈빛으로 무대를 지켜온 배우 정동환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다.

Q. 이번 작품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예전부터 나진환 연출가와 함께 ‘인문학적 성찰 시리즈’를 이어왔다. 첫 협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무려 7시간 반에 이르는 대작이었다. 당시 분량은 35분 남짓이지만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대사가 이어져 단 한 줄만 틀려도 전체 흐름이 무너질 만큼 긴장감이 컸다. 준비과정은 힘들었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나진환 연출가와의 협업은 ‘보상은 적지만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이후 나진환 연출가가 한태숙 연출가의 <단테의 신곡>에 내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극을 보러 왔다. 그러고는 자기가 만드는 <단테 신곡>에 같이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미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본 뒤에도 다시 도전하겠다고 나선 점이 인상 깊었고, 그 진정성 덕분에 함께 작업을 이어가게 됐다. 그렇게 탄생한 이번 연극은 기존과는 또 다른 색깔의 무대를 보여줬다. 배우 생활 55주년이라는 시점과 이번 작품이 맞물리게 돼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됐다. 

Q. 2021년 <단테 신곡-지옥 편> 이후 4년 만에 같은 작품으로 연기하게 됐는데. 연극 준비과정에서 이전과 달리 더 신경 썼던 부분이 있다면.

본작은 본래 대극장용으로 만들어졌으나 소극장으로 들어오며 무대 언어와 관객과의 접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대극장은 전체를 향해 에너지를 던지는 곳이라면 소극장은 각 관객을 향해 세부를 건네는 공간이라서 호흡 등의 디테일과 관객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번 재구성에는 2021년 공연 당시 없던 연옥과 천국의 장면이 함께 반영됐다. 또한 베르길리우스가 천국의 문턱에서 베아트리체에게 단테의 안내를 넘기고 연옥까지 동행하는 구성을 명확히 하며 전체적인 공연 시간을 다듬었다.

Q. 이번 베르길리우스 해석에서는 무엇을 중점에 뒀나.

특별한 기교를 더하기보다 인물의 시대성과 사명을 분명히 하는 데 초점을 뒀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와 동시대인이 아닌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으로 로마와 이탈리아에 대한 사랑과 인간을 구제해야 한다는 큰 뜻을 지닌 존재다. 여정 또한 베르길리우스가 앞장선 것이 아니라 단테가 스승인 베르길리우스에게 안내를 청해 시작된 동행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소극장 특성상 작은 호흡 하나도 관객에게 직결되므로 과장 대신 밀도와 섬세함을 택했다. 대극장보다 코러스와 군중이 줄어든 만큼 남은 인물들과의 관계와 시선, 속도 등을 더 세밀하게 조율해 무대 전체의 긴장과 흐름을 유지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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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단테 신곡> 무대의 한 장면 [사진제공=극단 피악]

Q. 이 시대에서 연극 <단테 신곡>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고전의 힘은 작품이 나온 당시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유효할 수밖에 없다. 이번 연극을 준비하면서 느낀 것은 정치·권력 등 인간 사회에서 반복되는 갈등이 결국 시대를 막론하고 이어진다는 점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는 2025년뿐 아니라 다른 세대에서도 계속될 것이기에 고전은 여전히 우리에게 힘을 발휘한다. 단테의 <신곡>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고전 중 하나이지만 정작 가장 많이 읽히지 않는 책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작품을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 관객과 직접 만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비추는 이야기이자 가족 모두가 함께 보며 생각할 거리를 얻을 수 있기에 충분히 교육적 가치까지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Q. 이번 연극은 연출이 독특하고 재미있다. 특히 주연 배우들의 연기와 조연들의 에너지가 대립하며 연극에 힘을 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는데 함께 무대에 오르는 후배 연기자들을 볼 때 어떤 기분이 드는가.

처음에는 후배 연기자들이 과연 이 작품을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무대에서 보여준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적은 인원이 배역을 바꿔가며 각 지옥의 고통을 표현하는 모습이 삶과 죽음, 고통과 희망을 관객에게 오롯이 전달하려는 진심이 느껴졌다. 특히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온 몸이 땀으로 젖어가는 모습을 보며 열정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자신의 움직임과 고통을 사랑하는 태도가 분명히 보였다. 사실 고통을 사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 많이 움직일수록, 더 깊이 몰두할수록 고통은 커지는데 그 고통마저 즐기며 더 치열하게 몸을 던지고 있었다. 직접 말해주진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이 몸으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취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밥 한 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관객과 박수가 부족해도 맡은 바를 성실히 해내는 후배들의 모습을 볼 때야말로 연극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그 진심이 관객에게 전해질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마음 깊은 곳에 닿게 되리라 생각한다.

Q. ‘신곡’에서는 9개의 지옥과 그 지옥에서 사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지옥이나 죄, 혹은 인물이 있나.

특별히 한 장면을 꼽기보다는 교만·분노·탐욕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죄를 시각적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만한 자, 분노하는 자,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는지 관객이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작품 속 죄와 벌을 종교적 교리로만 보지 않고 시적 비유와 은유로 읽어야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나진환 연출가가 신앙인의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봤다면 나는 ‘하나님’을 노자의 ‘도’처럼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로 이해했다. <신곡>을 단순한 교리적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시적 상상력 속에서 바라볼 때 더욱 풍부한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연극 &lt;단테 신곡&gt; 무대 위의 정동환 배우 [사진제공=극단 피악]
연극 <단테 신곡> 무대 위의 정동환 배우 [사진제공=극단 피악]

Q. 올해로 데뷔 55주년이 됐는데 쉬지 않고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연극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65년이다. 고등학교 1학년과 3학년 때 연극계의 거장이신 유치진 선생이 주관한 전국 학생 연극 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으며 학생 신분으로 무대에 섰다. 이후 1969년 유덕형 선생의 작품 발표회를 통해 일반 관객 앞에 정식으로 섰다. 그래서 데뷔 55주년이라고 기념하지만 사실 무대 경력만으로는 이미 60년이 됐다.

연기를 오래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내 일이다’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연기로 상을 받고 사람들에게 점점 알려지면서 어느 순간 이 일이 고귀한 일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특히 피터 셰퍼의 <복원의 선물>에서 에드워드 담슨 역을 맡으며 “연극은 영원히 죽지 않을 유일한 종교”라는 대사를 만났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말이 가슴 깊이 남아 지금까지도 연극을 내 신념처럼 여기게 됐다. 여러 종교가 시대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지만 인간을 가장 깊이 표현하고 삶의 길을 제시하는 연극만은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고 믿는다.

Q. 그럼에도 배우라는 직업을 오랫동안 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힘들지 않으면 재미가 없고 할 필요도 없다. 수익이 많이 나는 연극이나 가볍게 보는 연극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굳이 어렵고 힘든 작품들을 선택하는 이유는 ‘고통의 가치’ 때문이다. 고통이 없다면 만들어지는 가치도 없다. 연극은 고통 속에서만 의미를 얻기에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며 무대에 선다. 인간은 어쩌면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s), 즉 고통을 즐기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힘들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Q. 연극, 드라마, 영화 등 경계 없이 활발하게 연기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각 매체가 지닌 매력과 기술적 차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연극, 드라마, 영화는 매체만 다를 뿐 결국 같은 맥락에서 움직인다. 다만 매체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변형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다면 연극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다면 반드시 연극을 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연극은 같은 대사라도 단순한 산문이 아니라 운문처럼 사색을 거쳐야 깊이 있게 전달되기 때문에 무지막지한 탐구를 요구한다. 그래서 연극은 단순한 말하기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탐구 끝에 빚어낸 결과물이다. 요즘은 훌륭해지는 것보다 유명해지는 것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진정으로 깊은 연기를 하고 싶다면 연극을 통해 탐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Q. ‘좋은 배우’란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가.

좋은 배우란 자기 자신을 알아가려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을 확인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자신을 탐구하고 성장하느냐가 본질이다. 이런 과정은 배우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라고 믿는다. 값으로 돌아오는 보상을 기대하기보다 자기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꾸준히 갈고닦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이자 바람직한 인간의 길이다.

배우로서 특별히 어떻게 기억되고 싶다는 바람은 없다. 다만 가능하다면 나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관객에게도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해 온 사람으로 남고 싶다. 개인적인 득실보다는 시간이 지나 돌아봤을 때 ‘정말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길을 걸어온 배우로 기억된다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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