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중고등학생 때 필자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있었다. 바로 “조선시대 과거가 이전 시대와 다르게 능력 위주의 사회로 바뀌었다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역사 대하드라마를 보면 양반이 노비를 때리고 구박하면서 “무엄하다!”를 외치는 장면을 봤던 필자에게 조선시대가 능력 위주의 사회라는 대목은 납득이 되지 않는 명제였다. 그리고 필자가 대학 시절 우리나라의 관리 선발의 역사를 살펴보고 난 뒤에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우리나라에서 이른바 ‘국가(國家)’라고 일컬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평소대로라면 필자는 원고를 수요일이나 목요일 저녁에는 보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회차 칼럼을 집필하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유난히 글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금요일까지 원고를 미루면서 소위 뭉개(?)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의 실종 소식이 들려왔다. 걱정스러운 마음과 ‘혹시?’라는 생각에 글은 더욱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었다는 참담한 소식이 들려왔다.필자와 박원순 시장과의 인연은 함께 두 차례 정도 팟캐스트를 녹음한 것,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오늘(10일)부터 교회 내 신종코로나바이러스-19(코로나19) 감염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방역 수칙 준수가 의무화된다. 이에 개신교계에서는 한국교회를 코로나19의 가해자로 인식하고 있다며 유감스럽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중앙안전재난대책본부는 지난 8일 정례 브리핑을 통해 교회를 대상으로 방역 수칙 준수를 의무화한다고 발표했다.이에 따라 교회/종사자는 △정규 예배 외 각종 대면 모임 활동 및 행사 금지 △음식 제공 및 단체식사 금지 △출입자 증상 확인 및 유증상자 등 출입 제한 △종교행사 전·후 시설 소독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1376년 나옹 혜근의 입적 후 무학 자초는 나옹 혜근과 벽암 지공을 추모하는 불사에 참여한 것 외에는 명산과 대찰을 유력했다. 이러던 중 무학 자초는 설봉산 석왕사(釋王寺:북한 강원도 안변군 설봉산에 있는 고려후기에 창건된 사찰)의 토굴에서 은둔 수행을 시작한다.그리고 이곳에서 이성계를 만나 새 왕조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무학 자초는 토굴에 숨어서 이름을 감추고 솔잎만 먹으며, 칡 베옷을 입고 수행했다고 전해진다.이것이 이성계를 만나기 9년 전이라고 하는데, 그 유명한 이성계가 서까래를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신화(神話)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고대인의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신성한 이야기”라고 나온다. 신화에는 고대인이 가진 우주 전체에 대한 관념과 이 세상이 형성된 과정의 원리가 들어있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 속에는 하늘에 있는 절대적 주재자(主宰者)의 존재,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우리 민족의 산업적 바탕, 한민족이 하늘의 후손이라는 자긍심 등이 나타난다. 오래된 신화일수록 나라와 민족이 형성된 과정과 의미가 나타난다.신화는 역사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신화는 기록이나 과학으로 실증할 수 없기에
5월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다면, 6월에는 6월 민주화 항쟁(이하 6월 항쟁)이 있다. 수십년간의 군부독재를 끊어낸 6월 항쟁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각계각층의 시민운동이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6월 항쟁은 4·13 호헌 조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등 다양한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그중에서도 이한열 열사의 사망은 6월 항쟁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됐다. 우리에게 이한열 열사는 국가포격의 무고한 희생자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는 피해자이기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도 천재지변이 닥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것을 막아내려고 노력했다.본 지면을 통해 필자가 자주 주장하던 내용이다. 이 ‘모든 수단’ 안에 종교는 빠질 수 없다. 과거 가뭄·홍수·지진·전염병이 발생할 때, 당시의 과학기술만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당대 사람들은 다양한 재해를 막기 위해서 수라상의 음식수를 줄이고, 검소한 옷을 입으며, 각종 의례를 거행했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에도 재해를 막을 수 없다. 그저 내진 설계를 의무화 하고, 손을 자주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발생하면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그 전까지 미루어두었던 변화에 가속이 붙고, 애써 무시 해왔던 문제가 수면 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에서도 일어났다.한국 사회에서 코로나19 국면을 맞이하여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종교와 세속의 문제”와 “종교에 대한 고정관념”의 문제였다.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이하 신천지라고 줄여서 쓰겠음.)의 신자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신천지라는 종교가 가진 특수성으로 인해 신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종교는 “함께 모임”의 경험에 기반을 한 조직인데, 현재는 이 경험이 중단된 상황입니다. 대학 교육만 해도 평생 안 해 본 온라인 교육을 한다고 강사들이 부산을 피우고 있는데, 이 경험은 분명 앞으로 강의에 영향을 줄겁니다.1)위의 인용문은 대학에서 종교학을 강의하고 있는 필자의 한 선배가 종교학 연구 기관에 투고한 글을 필자가 조금 고친 것이다. 종교라는 거대한 덩어리, 그것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창 평지풍파를 일으킨 “종교”를 가르치는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 대상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필자는 이번 학기에 “한국 종교의 흐름”이라는 과목을 개설했다. 이 과목을 개설하는 과정에서 과목의 이름을 지어야 됐는데, “한국 종교의 역사”와 “한국 종교의 흐름” 사이에서 과목의 이름을 고민했다. 단과대학 학장과의 상의 과정에서 학장이 교양 과목의 특성상 “한국 종교의 흐름”이라는 과목이 더 낫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그 과목의 이름은 “한국 종교의 흐름”으로 정해졌다. 과목이 개설된 후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흐름”이라는 말의 정의를 찾아봤다. 그런데 “흐름”이라는 말의 뜻 가운데 “역사”라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에 무학 자초의 출생의 미스테리를 소개한 적이 있다. 무학 자초는 조선 건국에 이바지했던 조선의 초대 왕사(王師)였다. 이와 같은 그의 위상과 달리 그의 출생과 신분은 밝혀진 것이 없다. 특히 그가 서얼이나 천민 출신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 낮은 신분에서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음을 보여줌으로서, 무학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더욱 드러내고자 한 의도도 있을 것 같다는 예상도 했다.다음 미스테리는 무학 자초의 행적이다. 특히 조선 개국 전까지의 무학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것을 소개하기 전
고려 말 조선 초에 왕조가 교체되면서, 더불어서 유교와 불교가 교체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1) 그런데 유교와 불교의 교체가 당연한 것이었을까? 성리학은 승려와 사찰이 부패한 권력과 결탁해서 농장을 확대하고 사치를 부린다는 등의 부패를 지적했다. 이것을 통해 성리학으로 대체하기 위한 당위와 명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전에 1000년이 넘게 백성들의 사상적 기반이 됐고, 여전히 정치적 경제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불교를 한 번에 위축시킬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학은 고려의 불교를 유지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대표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무학 자초(無學 自超, 1327-1405)는 우리가 흔히 무학대사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중등교과 과정을 비롯해서 역사 과목에서 우리는 무학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무학대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만큼 무학대사의 생애와 행적에 대하여 남아있는 기록이 적다는 의미이다. 역사적인 인물이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많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은 고대에 생존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고대의 인물의 경우 대부분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나 개인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 칼럼에서 필자가 실수한 것이 있다. 그 실수는 김시습의 도사로서의 면모에 대한 소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전 편에서 “청한자”라는 호가 있다는 것에서 김시습의 도사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데, 현재 한국의 도교와 관련된 문헌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만큼 차후에 소개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이번 지면을 통해 그 약속을 조금이나마 이행해보고자 한다.김시습은 조선 도교의 개조(開祖), 즉 조선 도교의 맥에서 시작점이 되는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한국의 사상사에서 중국의 사상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조선의 종교지형을 한 마디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단(異端)에 대하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했고, 사찰의 수를 인위적으로 줄였으며, 조선 중·후기에는 가정의 의례까지 대 성리학자인 주희(朱熹)가 쓴 책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의례를 보급했으니 이 말이 맞게 보일 수도 있다.이러한 조선시대의 모습 이면을 조금 자세히 보면 조선조에 불교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역대 왕 중 일부는 현대 학계에서 불교 신앙을 가진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몇 차례 언급했지만, 곽재우는 충(忠)과 효(孝), 절의(節義)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간주하는 도교의 양생술과 도술을 익히고, 이를 임진왜란에서 활용한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곽재우에게 그 이외의 다양한 모습도 보인다.우선 불교와의 관계이다. 곽재우는 전공(戰功)을 세운 의병장이었지만, 성리학에서 이단(異端)으로 간주했던 도교의 술법을 익혔다는 이유로 탄핵받았다는 것은 수차례 밝힌 바가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곽재우와 마찬가지로 승군(僧軍)을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에 소개했듯이 곽재우는 의병 활동으로써 충(忠)을 지키고, 조정의 옳지 않은 일에 관직은 물론 목숨까지 걸고 직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의(義)를 지켰다. 이런 모습은 흔히 알려진 유학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곽재우에게서는 말년에 은거하며 도교(道敎)의 신선이 되려는 모습도 나타났다. 특히 곽재우의 의병 활동 기간에 용모가 비슷한 사람에게 같은 옷을 입혀서 적중을 혼란에 빠뜨린 일종의 ‘분신술’을 쓴 것이나, 임진왜란 종전 후 그가 벽곡(辟穀), 즉 곡기를 끊으면서, 도인(導引)·토납(
지난해 정의당 임한솔 부대표의 추적으로 공개된 전두환의 근황은 국민들로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노쇠한데다 알츠하이머까지 앓고 있어 재판에 출석할 수 없다던 그는 지인들과 함께 여유로이 필드를 누비며 골프를 즐겼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발포 명령에 대한 질문에는 골프채까지 휘두르는 건재함을 보였다.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며 미납 추징금 1030억원을 낼 수 없다고 버티던 전두환은 서울 강남의 한 중식당에서 1인당 20만원 상당에 달하는 식사를 즐겼다. 5·18 피해자와 유족들은 1980년 5월 18일,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금까지 2회에 걸쳐서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과 승려로서의 모습을 살펴봤다. 김시습은 유학자로서 충(忠)과 절의(節義), 효(孝)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어릴 때 신동으로 일컬어지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의 유학 경전을 비롯하여 유학자로서 읽어야 되는 다양한 서적을 읽었다. 반면 모친의 사망을 비롯한 각종 경험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를 감행했다. 특히 김시습의 불교 전문 저술의 제목을 보면, 그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심오한 사상인 천태·화엄의 교학과 조사선(祖師禪)의 세 분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앞 회차에서는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김시습은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주목받았으며 효(孝)를 실천하고, 생육신(生六臣)으로서 절개를 지키는 등 유학의 이상향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김시습은 이런 모습보다 승려로서의 모습이 더 유명하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했을 때도 그는 승려 신분이었고, 이전에 언급했듯 그는 사후 유지에 따라 불교식으로 화장됐다. 또 부도(浮屠-승려가 죽은 후 사리를 모아놓은 탑)까지 조성됐다.이런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