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끝나고 이제 한 달 하고 열흘이 지났다. 승패를 떠나 정치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엄중한 유권자의 심판에 겸허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총선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그들은 또다시 새로운 전장(戰場)을 만들어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각종 특검 이슈를 명분 삼아 광기 어린 주도권 전쟁에 올인하고 있는 것이다. 민생을 챙기겠다며 불철주야 한 표를 호소하던 그 절박한 몸부림은 모두 가식이었나. 22대 국회 개원 전, 벌써 그들을 위한 전쟁은 시작됐다. 선거 결과를 그들의 진영논리로 해석하고, 주도권을 쥐기 위한 처절한 전투는 현재 진행형이다. 원구성이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이고, 특검을 둘러싼 셈법은 여야는 물론 그들 내부에서도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순조로운 의정활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게 주도권 경쟁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에게서 민생은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다.
며칠 전 나온 미국의 4월 CPI(소비자물가지수)가 전월대비 소폭 내렸지만 목표치인 2% 보다는 여전히 높은 3% 중반대를 기록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바다 건너 미국 땅의 물가는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정책금리와 국내 환율 및 금리 문제는 복잡한 상관관계를 가지며, 이에 따른 우리 정부의 대응은 민생 문제와 직결돼 있다.
21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소비자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5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전월대비 2.3 포인트 하락한 98.4로 나타났다. 100보다 낮은 경우 소비심리가 비관적이라는 해석을 한다. 작년 100을 밑돌았던 CCSI는 올해 1분기 100을 넘어선 듯했지만, 2분기 들어 정체 후 다시 기준선 밑으로 떨어졌다. 고물가와 고금리, 고환율이 짓누르는 상황에서 소비심리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같은 날 한국경제인협회가 발표한 기업경기실사지수(BSI)도 95.5를 기록해 27개월 연속 기준선 100을 하회하고 있다. 민생과 기업이 한계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당장의 위기와 고통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시련이라면 견뎌볼 의지라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준비해 둔 미래 청사진은 전무하다. 선거가 끝나면 여야 정치권이 흩어진 국민 정서를 한데 모으고 민생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합심할 것을 기대했지만, 그들은 각종 이슈를 빨아들여 주도권을 공고히 할 재료 삼기에 혈안이다.
윤 정부가 출범한 지도 2년이 지났다. 여전히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지난 2년은 안타깝고 아쉬운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방향성을 잃고 좌초 위기에 직면한 국정 난맥상을 풀 해법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야권에서 일제히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특검을 막을 방도는 없을 것이다. 당정이 집중해야 할 것은 곤고한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일이다. 국민 공감대가 무르익은 사안부터 민생 우선순위로 강력한 정책들을 시행해 나간다면 바닥까지 추락한 지지도를 반전시킬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내 줄 것은 내주고 국민들의 든든한 지지를 기대할 수 있는 민생 문제에 집중한다면 떨어진 국민 신뢰는 회복할 수 있다. 야권도 녹록잖은 경제위기를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는 동반자 의식을 보여줘야 한다. 여야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보여줘야 한다.
윤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제시한 노동과 교육, 연금 개혁 문제는 해답이 될 수 있다. 특히, 연금 개혁 문제는 상당 부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이다. 소득대체율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만 남은 상황인데 시급히 정리해야 하고 빠른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사안이다. 노동 개혁의 문제도 ‘주 69시간 근로제’ 등 자극적인 키워드를 내세우기보다 비정규직 문제와 일자리 창출 등 보다 근본적인 해법에 충실해야 한다. 교육개혁 역시 ‘만 5세 초등학교 입학’이나 ‘킬러 문항 배제’, ‘사교육 카르텔 타파’ 등 다소 공감대가 떨어지고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기보다 방과 후 돌봄 서비스 확대나 교육 양극화 해소 문제 등에 우선순위를 둘 필요가 있다. 특히, 의정(醫政)갈등이 장기화하면서 피로도가 누적되고 있는 국민건강 문제는 기술적인 측면의 해결 방안이 시급하다.
얼마 전 모 검사장이 퇴직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청렴하지 않으면 못 받는 것이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면 못 할 짓이 없다”. 2015년 박근혜 정권 당시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았던 혼용무도(昏庸無道)가 떠오른다.
나랏일도 사람이 하는 것이어서 실수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배움도 뒤따르기 마련이다. 정책 추진에 타당한 명분이 서 있다면 어떤 비난도 달게 받고 나아가야 한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며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면 지금 당장 실수를 인정하고 바른 길을 찾아야 한다. 국민신뢰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