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조선 고종 26년(1889) 곡물수출항인 원산을 관리했던 함경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1823~1907)이 원산을 통해 콩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전격적으로 금지한다. 직접적 원인은 한 해 전인 고종 25년(1888)에 극심했던 흉작으로 전국에서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이전부터 누적돼 있던 일본의 경제적 침탈 때문이었다.

고종 13년(1876) 일본 운요호의 강화도 공격으로 시작된 조선의 개항 이후 조선은 지속적으로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받아왔다. 그 전부터 유럽, 미국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세력은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를 무력을 이용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일부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그 선두에 ‘국가’가 아닌 ‘기업’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식민지를 노동력과 재료의 공급지로 삼고, 이것을 가공해서 생산한 물품을 다시 식민지에 파는 방식으로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수탈했다. 그리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중 하나가 상인들이 조선의 곡물을 매점매석 하는 것이었다.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그러나 매우 불평등한 외교조약을 맺은 이후 일본은 상인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조선의 곡물을 매점매석했다. 이로 인해 조선의 곡물비축량이 큰 폭으로 줄어들어서 흉년에 백성들을 구휼할 곡식이 부족했고, 이것이 폭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조병식은 방곡령을 내렸다. 그 근거는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제37관(款)이었다. 조일통상장정은 고종 20년(1883) 조선과 일본 사이의 통상에 관해 맺은 외교조약이다. 기존에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강화도조약은 일본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에 조선은 일본 수입품의 관세 부과를 요구해왔지만, 일본은 이것을 거부했다. 그러던 중 조선이 미국과의 통상조약에서 관세자주권을 획득하고, 임오군란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심해지자 일본이 어쩔 수 없이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였는데 이때 맺어진 조약이 조일통상장정이다. 이 가운데 제37관은 ‘조선국에서 가뭄과 홍수, 전쟁 등의 일로 인하여 국내에 양식이 결핍할 것을 우려하여 일시 쌀수출을 금지하려고 할 때에는 1개월 전에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게 통지하여 미리 그 기간을 항구에 있는 일본 상인들에게 전달하여 일률적으로 준수하는 데 편리하게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조병식은 이 항목을 근거로 방곡령을 내렸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일본 측이 앞에서 언급한 제37관에 명시된 ‘1개월 전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게 통지’를 지키지 못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을 핑계로 일본은 방곡령 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조병식은 일본 상인들의 곡물을 압수하는 등 방곡령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다. 이에 일본은 조병식의 징계와 방곡령 해제를 요구했고, 조선 조정은 조병식을 강원도관찰사로 전출시키고 방곡령을 해제했다.

이후 한장석(韓章錫, 1832~1894)이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한장석도 이듬해인 고종27년(1890) 곡물 수출의 폐해를 이유로 방곡령을 다시 시행해 원산항에서의 곡물 수출을 금지시켰다. 이에 일본 상인들은 고종28년(1891) 11월, 14만 7000환의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조선 조정은 일본 정부와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고종20년(1893) 일본 정부는 애초의 요구에 이자까지 얹어서 17만 5000환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리고 결국 조선 조정과 일본 정부는 11만환의 배상에 합의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배상금 협상 과정에서 중재는 청(淸) 조정의 관리가 맡았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는 무력에 의한 개항과 불평등조약을 시작으로 경제적 수탈과 각종 주권 박탈을 거쳐서 강제 병합으로 완료됐다. 이 가운데 조선에 대한 경제적 수탈은 일본을 비롯해 제국주의 세력들 전체가 덤벼들었고, 산림벌채, 광산채굴, 철도·전기·전차 구축을 비롯한 다양한 인프라 구축 등 여러 방면에서 이뤄졌다. 곡물 수탈은 일본의 경제적 수탈의 일부였다. 조선 조정은 이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조선 조정의 부패, 자연재해, 민생의 파탄 등으로 조정 자체가 위기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지배층의 상당수는 자신의 부를 채우기 위해 일본과 제국주의 세력에 협조했고, 일부 관리들의 저항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조선 조정의 무능과 부패가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방곡령을 처음 시작한 조병식이라는 사람 자체였다. 방곡령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조병식을 애국적인 관리로 알고 있다. 그러나 조병식은 당대 대표적인 탐관오리 중 하나였다. 부정부패와 포악한 행정으로 귀양을 다녀온 적도 있고, 동학(東學) 신자들이 교조(敎祖)의 신원청원서(伸寃請願書)를 제출하자, 이것을 묵살하고 오히려 동학 신자들을 더욱 탄압했다. 그가 갑오농민전쟁의 원인제공자 중 하나라는 의미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독립협회 탄압에 앞장섰다가, 만민공동회의 규탄을 받고 독립협회를 무고한 혐의로 수배가 내려지자 외국 공사관에 숨어있기도 했다.

몇 달 전 한국을 강타한 뉴스 중 하나가 일본 정부가 네이버(NAVER)가 개발한 세계적 메신저인 라인(LINE)의 지분을 내놓으라고 한 것이었다. 현재 일본에서는 기업과 정부 차원에서 라인에서 네이버의 영향력을 없애고 일본 기업이 독식하려는 의도로 보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 사건의 심각함을 인지하고 있는 시민들은 사건의 추이에 주목하면서 네이버를 응원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에 네이버가 시민들에게 응원만 받는 기업은 아니었다. 오히려 네이버에 대해 비판적인 시민들이 더 많았다. 네이버가 라인을 성공적으로 개발한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고, 네이버 자체가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포털이지만, 네이버의 기업 윤리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었다. 뉴스의 제공과 검색에서 네이버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고,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기사를 배치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필자는 라인사태가 매우 심각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잊혀지고 있다고 판단해 라인 사태의 진척사항을 알아봤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구한말 방곡령사건을 떠올렸다. 조금 억지스러울 수도 있지만, 조선의 곡물을 라인에, 조병식을 네이버에 비유하고 싶었다. 또한 일본은 비논리적이고 부당한 방식으로 한국의 주요 자산을 강탈하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방곡령사건 당시 일본의 조선 곡물 유출과 유사하다.

방곡령사건 당시에는 소수긴 하지만 저항하는 관리라도 있었지만, 라인을 일본에게 빼앗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의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부부가 우즈베키스탄에 방문해서 강아지를 안고 사진을 찍고, 여당의 의원들이 국회의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며, 언론의 상당수가 권력의 감시견(watch dog) 역할을 하지 못하여 ‘감시’라는 말이 빠진 ‘견’으로 퇴화하는 동안 잊히는 의혹 투성이의 심각한 사건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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