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고립·은둔 ‘회복’ 청년 권유리씨
맞지 않은 大졸업 후 취업·괴롭힘으로 9년간 은둔
단기 아르바이트 등 도전했지만 번번히 중단 경험
프로젝트서 ‘존중’ 느껴…청년정책조정위 등 활동도
‘기술 도움’ 창업 준비…“정해진 기준만 정답 아냐”
어둠에 길들여진 방, 닫힌 창문 너머로 계절이 바뀌어도 그 변화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세상과의 연결이 희미해질수록 시간은 고요하지만 빠르게 흘러갔고 적막은 깊어졌다. 하지만 어느 날, 그들은 문을 열었다. 작은 한 발짝을 시작으로 스스로 커튼을 젖히고 낯선 바람을 맞이하며 잊고 있던 햇살의 온기를 느꼈다. 세상이 마냥 차갑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그들은 용기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세상은 그들을 심각한 문제로만 다뤘고 어둠의 존재로만 그려냈다. 국무조정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지난해 고립·은둔 청년의 비율은 5.2%로 2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도 전국적으로 약 54만명이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고립’, ‘은둔’이라는 단어 몇 개로 이들의 전부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개의 단어와 숫자 뒤에는 보이지 않는, 뜨거운 이야기들이 있다. 삶을 되찾기 위해 조용히 내딛은 발걸음을 시작으로 세상을 채우고 주변을 사랑으로 물들이고 있는 삶의 청년들이 존재한다. 지금 그 청년들이 닫힌 문을 열고 다시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은 미디어에 비친 피폐하고 어두운 고립·은둔의 모습이 아니라 끝없는 도전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사회에 나와 누군가를 만나거나 제 할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도 평범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일상조차 도달하기 힘든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을 열고 한 발 내딛는 그 짧은 순간에조차 엄청난 결심과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권유리(38)씨에게 사회는 너무 냉정했다. 어릴 적 가정으로부터 받은 압박은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고 시간이 흘러 어른이 돼서도 그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사회에서 받은 또 다른 아픔은 그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반복되는 실패는 무력감만을 남긴 채 그를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나가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서워졌다. 그렇게 유리씨는 약 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작은 방 안에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었다. 그곳은 침묵이 전부인 행성이었으며 시간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그 우주 안에서는 어떤 상처도, 아픔도 없었고 세상의 기대도, 시선도 닿지 않았다. 아프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만든 은신처였다.
그러다 가족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었고 회복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또 자신의 과거와 비슷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청년들에게 “틀린 게 아니다”라며 조심스럽지만 따스한 말을 전한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오랜 시간 고립의 시간을 견딘 끝에 다시 세상과의 연결을 선택한 유리씨를 만나 그 회복의 여정과 은둔 청년들이 마주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깊고 긴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다
스물일곱. 꿈을 꾸고 세상에 첫 발걸음을 내딛는 나이지만 유리씨에게 그 시간은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게 된 시기였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강한 통제 속에 자라온 그는 자신의 뜻보다는 부모님의 바람을 따라 진로를 정했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해 공과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그와 달리 부모님은 보다 안정적인 세무회계 분야를 권했다. ‘여성에게 잘 맞는 사무직’이라는 부모님의 말에 꿈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그는 순순히 따랐다.
겨우겨우 대학을 졸업한 뒤 진짜 문제는 사회에 나선 후부터 시작됐다. 매일 똑같은 시간 속을 살아가는 일상, 적성에 맞지 않는 세무회계 업무는 그의 내면을 서서히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큰 상처가 그를 덮쳤다. 상사의 날선 말, 적의로 가득 찬 동료의 시선들 속에서 유리씨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언제 또 다치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사회 속에서 그는 점점 부정적인 감정으로 물들어갔다.
결국 그는 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스스로 세상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외부의 날카로운 시선과 압박에서 벗어나 따뜻하고 고요한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간 순간 유리씨는 처음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더 이상 누구에게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상처를 애써 숨기지 않아도 됐다.
은둔생활의 초반 1년은 오히려 행복했다. 퇴사는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에 괴로웠던 것들이 사라졌다고 느꼈다. 세상과 단절된 그 시간 속에서 오히려 평온함을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불안이라는 그림자가 그의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점차 무기력해졌고 깊은 우울과 외로움이 그의 하루를 덮쳤다.
“고립·은둔에 들어간 뒤 한 1년 정도는 솔직히 좋았어요. 원해서 한 퇴사였고 드디어 저를 힘들게 한 존재들이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1년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무기력해지고 극심한 우울감과 불안감이 찾아왔어요. ‘왜 이러지?’, ‘남들 다 하는 걸 왜 난 못하지?’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심지어 ‘나는 왜 살아 있지’, ‘내일 눈을 안 떴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원래부터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취미를 즐기거나 여행을 다니던 그였기에 은둔 생활은 더욱 고립된 세계로 밀어 넣었다. 몇 안 되던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겼고 결국 유리씨는 정말 자신만의 우주 속 깊이 들어가게 됐다.
깨어 있는 것조차 버거운 나날이 이어지자 유리씨는 도피처를 잠에서 찾았다. 적어도 꿈을 꾸는 동안은 불안도, 압박도,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들도 잠시 멈췄기 때문이다.
“하루 대부분을 누워서 자는 데 썼어요. 컴퓨터를 좋아했지만 1시간 이상 앉아있기 힘들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죠.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생활패턴도 무너졌고 잠이 오면 자고 일어나 다시 자고를 반복했습니다. 시계 없이 살았어요.”
깊고 긴 터널 속에서 그를 꺼내줄 손은 어디에도 없었다. 은둔 생활이 괴롭다며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았지만 돌아온 것은 “회사 다니는 게 더 힘들어. 나는 오히려 너처럼 쉬고 싶어”라는 메마른 말뿐이었다. 단지 작은 공감을 원했을 뿐인데 그 바람조차 부서졌다. 또다시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자책이 밀려왔다. 결국 그는 연락처를 바꾸고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냈다.
가족과의 왕래도 거의 없었다. 취직 후 서울에서 자취하며 1년에 한 번 정도 부모님을 만났던 유리씨는 은둔 중이라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물론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이전 직장에서 모아둔 돈을 최소한으로 아껴 쓰며 버티고 버텼다. 돈이 떨어지면 패스트푸드점, 한식뷔페 주방, 도보 배달, 불법 전단지 수거, 공공근로 청소 등 혼자 할 수 있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그는 사람들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일만 골라 했다. 교류가 생기려 할 때면 스스로의 불안함과 긴장감이 자신을 압도했다. 이에 결국 회피를 택했고 이 같은 과정을 반복할수록 유리씨는 더 작아졌다.
작은 용기를 시작으로 새 삶을 마주한 청년
그는 고립·은둔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다시 사회로 나가고 싶은데 못 나갈 때라고 말했다. 고립·은둔의 삶을 택한 처음에는 그저 ‘잠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사회로 나가 취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은 끊임없이 그를 옥죄었고 결국 다시 일터로 나가더라도 극심한 초조함과 괴로움에 시달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일을 그만두곤 했다.
“집에 있다가 갑자기 의욕이 생겨서 다시 취업을 시도해도 결국 오래 버티지 못했어요. 세무회계 일이 나와 맞지 않다고 느껴서 조리기능사 자격증도 공부하면서 요식업계로 옮겨봤지만 결과는 같았죠. 그렇게 다섯 번은 넘게 반복한 것 같아요. ‘이제 끝이 없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정말 힘들었습니다.”
유리씨 스스로도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은 분명 일을 해낸 적이 있었고 버텨낼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사회로 나가려 하면 밀려드는 극심한 불안감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번졌다. 머리로는 출근이 그리 큰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세상은 너무 버거웠고 ‘버티지 못할 거야’라는 자괴감이 따라붙었다. 사소한 일에도 크게 지쳤으며 우울감과 무기력함은 그림자처럼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그렇게 세상에 발을 디뎠다 다치면서 다시 방 안으로 숨어드는 날들이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 날 유리씨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청년센터가 주최하는 ‘비누꽃 화환 만들기’ 프로그램 소식을 접했다. 평소 꽃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조심스레 작은 용기를 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사람들과 마주하는 자리는 유난히 긴장됐지만 센터에 도착하자 따뜻하게 자신을 맞아주는 사람들의 모습에 안도할 수 있었다. 이때 유리씨는 알았다.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사회’가 꼭 냉정하고 거칠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처음으로 사회 안에서 온기를 느낀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무엇보다 저에 대해 알게 됐다는 점이 가장 좋았어요. 그날 옆에 있던 청년과 대화를 나누는데 제가 대화에 잘 끼지 못하고 그 친구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분명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꼈어요. 그때 ‘내게 뭔가 필요하구나’ 싶었고 이후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가 우울증 치료를 받게 됐어요.”
유리씨는 스스로를 고립·은둔 청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선택해 작은 공간 안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료를 통해 그 실체를 자각한 뒤에는 받아들이는 데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는 전환점이 됐다. 더 이상은 고립된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관련 지원 사업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일주일에 1~2번은 무조건 나가자는 다짐을 시작으로 생각보다 행동을 우선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고립·은둔 청년을 위한 센터에 꾸준히 나가게 됐다.
그는 센터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일상을 되찾기 시작했다. 또래 청년들과 함께 지내며 상담을 받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운동, 미술 등 다양한 체험은 ‘나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약 7개월의 시간 동안 그는 존중받고 있다는 감정을 되찾았고 이는 앞으로 살아갈 삶의 큰 원동력이 됐다.
“프로그램 중 자신의 마음 상태를 생각하고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솔직히 발표가 너무 하기 싫었어요. 겁도 나고요. 그런데 그 누구도 저한테 강요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살면서 발표를 안 해도 된다는 선택지를 받은 건 처음이었어요. 처음으로 존중받는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아진 나날
그는 이제 청년재단의 ‘잘나가는 커뮤니티’에 소속돼 고립·은둔을 극복한 또래들과 정기적으로 소통하며 서로를 북돋우고 있다. 그 안에서 그는 안정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법을 배웠고 타인과 어울리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법을 익혀갔다.
“평생 개인주의적인 성향으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여러 활동을 하면서 함께하는 것의 재미를 처음 느꼈죠. 한번은 연극을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혼자였다면 중간에 나왔을 만큼 제 취향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청년들이 옆에서 웃으며 보니까 그게 또 나름 재미있더라고요. 함께라는 힘을 그때 느꼈어요.”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서울시 청년정책조정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청년들이 겪는 현실과 회복의 과정에 대해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고민한다. 동시에 프리랜서 웹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도 병행하며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현재 고립·은둔 청년들을 위한 사회기술 교육 및 생성형 AI 기반 서비스와 관련된 창업을 준비 중이다. 사회에 나가고자 해도 기술이나 경험의 부족으로 다시 재고립되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청년들이 안전한 공간에서 사회성을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청년들이 스스로를 회복해 나갈 수 있도록, ‘괜찮은 나’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회복의 과정 속에서 가족과의 관계도 천천히 회복됐다. 센터와 프로그램, 상담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들이 쌓이며 유리씨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부모님 역시 딸의 아픔을 처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긴 시간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서로를 향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크게 변화한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스스로를 갉아먹던 시절을 지나 그는 이제 자신을 믿고 미래를 꿈꾸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자신과 닮은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게 많아졌다.
“우리는 단지 조용히, 자기만의 우주를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것은 결코 틀린 게 아니고요. 정부나 사회가 청년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과 속도를 인정하고 존중해줬으면 해요. 교육, 고용, 복지 전반에서 제도적인 안전망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다름’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 인식이 뒤따라야 해요. 사람마다 속도도, 성향도, 방식도 다르잖아요. 그 자체로 존중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정해진 기준과 속도만이 정답이 아님을, 다양하고 느린 삶 역시 존중받아야 함을 유리씨는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제 더는 자신만의 우주에 갇혀 있지 않고 나와 큰 사회를 품어나간다. 세상에 나올 작은 용기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힘이 돼 마침내 그는 별처럼 밝게 빛나고 있다.
“저는 평생 제가 싫었어요. 사회와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려 했지만 항상 부족했고, 결국 고립·은둔을 선택한 나 자신이 너무 나약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 저조차 괜찮다고,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경험이 제 삶을 바꿨어요. 이제는 타인의 시선에 저를 맞추지 않고 제 자신을 부정하지 않아요. 저는 그렇게 9년의 고립을 견디고 살아낸, 강인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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