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어머니·보호자 ‘나무’...한민족 역사를 함께하다
1100년 ‘사찰 지킴이’ 은행나무, 정신적 지주 역할
용문사 “나무 통해 겸손과 시간의 소중함 배워야”
민족 애환·마을 이야기 지닌 교감의 대상 ‘노거수’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권을 바탕으로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모든 인간이 천부적인 존엄과 권리를 가지며 이를 보호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은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졌다. 이후 동물권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넘어 동물 또한 불필요한 고통에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윤리적 인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떨까. 인류는 아직까지 식물이 단순한 자원 이상이며 고유한 존엄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식물의 생명을 경시하고 도구적 관점에서 이들을 착취한 결과 인간은 기후위기와 생태계 훼손이라는 결과와 직면하게 됐다. 식물이 소비의 대상을 넘어 존중의 대상이라는 관점이 이제는 필요한 때다.
본보는 ‘식물해방일지’ 시리즈를 통해 국내에서 아직 생소한 개념인 식물 존엄성을 조명하고 식물을 도구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인간과 식물의 공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특히 2023년 국내 최초로 발표된 식물 존엄성 선언을 바탕으로 식물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접근과 그 실천적 의미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기후위기 시대에 지속 가능한 생태적 삶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장을 만들고 정책적 전환의 필요성을 논의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 “나무는 살아서 1000년, 죽어서 1000년을 산다”_주목나무에 관한 국내 속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 ‘단군신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쑥과 마늘 먹은 곰에 대한 전설일 것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단군신화의 홍익인간 사상 역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단군이 ‘단나무’의 아들이라 그 이름이 단군(檀君)이 됐다는 것과 홍익인간 사상을 주창한 환웅이 ‘나무’를 타고 인간 세계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온 곳은 다름 아닌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였다.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신단수가 없었다면 환웅은 인간 세계로 내려오지도, 홍익인간 사상을 퍼뜨리지도, 고조선을 건국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초기 농경사회를 유지해 왔던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나무를 수호목, 신목으로 여기면서 개인의 안전, 농사의 성공, 나라의 번영을 기도하며 심리적으로 의존해 왔다. 나무는 우리 민족에게 신, 어머니, 보호자, 또는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을 했다.
나무가 인간의 오랜 역사에 함께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오랜 수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통 국내에서 자생하는 수종 중에서는 느티나무, 전나무, 소나무 등 수목이 오래 사는데, 국내 가장 오래 산 나무는 정선 두위봉에 있는 1400살 주목나무다.
은행나무 역시 2억년 전인 선사 시대부터 존재해 온 종으로 현존하는 식물 중 가장 오래된 식물로 여겨지고 있다. 주로 중국, 일본, 대한민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은행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다르게 오직 한 가지 종만 존재하며 암나무와 수나무가 명확하게 구분된다.
가을이면 샛노란 잎으로 단풍의 절정을 알리는 은행나무는 암나무에서만 열매가 맺힌다. 놀랍게도 수컷 은행나무의 꽃가루 속에는 꼬리가 달린 정충이 있다. 이 꽃가루가 암술에 닿으면 정충이 암나무가 지닌 난세포까지 약 5개월을 헤엄쳐 이동해 결실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동물들의 정자와 난자 수정 방식과 굉장히 흡사하다.
이 열매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심으면 손주 대에 이르러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은행나무에 ‘공손수’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이처럼 은행나무는 도시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가로수 수종이며 동물처럼 암수로 나뉘는 몇 안 되는 식물이라는 점에서, 시민에게 특히 친밀한 나무이기도 하다.
인간이 오랜 역사 속에서 나무들과 오랜 삶을 공유하고 물질적·정신적 덕을 봐 온 만큼, 우리는 그들의 소중함을 망각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생명을 존중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듯, 나무가 없는 지구에도 미래란 없기 때문이다.
최장수 ‘할머니 은행나무’, 용문사를 지키다
생존력이 좋고 병충해에 강한 수목인 은행나무는 국내 사찰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천연기념물 30호인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1100년이 넘는 기간 살아오면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18일 찾은 용문사에서 마주한 은행나무는 한눈에 담기지 않을 만큼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자그마치 아파트 14층 높이에, 밑동 둘레 14m의 거대목이었다. 그 앞에 서서 바람에 날리는 높다란 잎들을 올려다보면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다. 은행나무를 구경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선 사람들은 마치 작은 나뭇잎들만큼이나 작고 소박해 보였다. 1000년 전 용문사와 현재의 용문사의 시공간을 연결하는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역사가 그곳에 서 있었다.
은행나무가 훼손되지 않도록 겉을 둘러 설치한 울타리의 샛노란색 포스트잇에는 사람들의 소원이 적혀 있었다. 은행나무 모양 종이에는 가족의 건강, 학업, 성공에 대한 간절한 바람들이 적혀 있었으며, 포스트잇을 붙인 후 눈을 감고 신중하게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여전히 나무가 우리에게 정신적인 지주로 역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용문사 관계자는 “할머니 은행나무는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령스러운 나무”라며 “할머니 은행나무는 용문산의 산신령이자 호국의 신령목으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천 년을 넘게 나라를 돌봐 왔다. 고작해야 100년을 살아가는 인간은 용문사 은행나무를 보면서 겸손과 시간의 소중함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100년 된 은행나무에는 그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전설을 지니고 있었다. 첫 번째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떠나다가 용문사에 어린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설이 있다.
은행나무에 대한 다른 유래로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용문사에 꽂아 놓은 것이 나무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은행나무는 생명력이 뛰어나 꺾꽂이(가지나 줄기를 잘라 새로운 개체로 번식시키는 방법)가 가능한 식물 중 하나다. 지난 3월 열흘 동안 이어진 대규모 산불로 인해 불에 탄 900년 지기 하동 은행나무에서 새잎이 돋은 놀라운 사연도 은행나무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1907년 정미의병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지만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고 보존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용문사 이동형 문화해설사는 “용문사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하루 최대 10톤(t)의 물을 흡수한다. 용문산에 흐르는 계곡이 은행나무의 주된 수원”이라면서 “이 때문에 용문사 은행나무가 일본군의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일본군이 은행나무를 베어내기 위해 도끼질을 했는데 갑자기 천둥 벼락이 쳐서 일본군이 죽었다는 설,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 내서 울었다는 설이 존재한다”며 나무가 역사와 함께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양평군숲해설가협회에서 만난 신동명 숲해설사는 “많은 사람들이 매일 아침마다 용문사에 올라 할머니 은행나무에게 하루가 잘 풀리길, 이 숲에 찾아온 모든 분들께 평화가 오길 기도한다”면서 “용문사 은행나무는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원래 10가마(약 80kg)씩 은행 열매를 맺었는데, 최근에는 고령으로 접어들면서 열매양이 줄고 열매에 점이 3개씩 찍힌다면서 이를 ‘할머니의 검버섯’이라고 부른다고 신 숲해설사는 부연했다. 그는 떨어진 나뭇가지를 모아 숲 교육에 쓴다면서 며칠 전 강한 바람으로 떨어진 용문사 은행나무 가지를 보여줬다. 나뭇가지가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그의 웃음에 나무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비단 화분이나 정원에 심어져 인간과 가까운 거리에서 살아가는 식물뿐만 아니라 용문사를 지키고 사찰의 역사와 함께한 은행나무 역시 인간의 동반자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같은 사례를 통해 나무는 인간의 반려, 즉 ‘짝이 되는 동무’로 오랜 역사 동안 상호작용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화·역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존재, ‘나무’
나무가 살아 있는 존재로서 우리 곁을 지키며 때로는 인간을 보호해 줬다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나무를 단지 생태적·환경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신적 교감을 하거나 종교적 믿음을 강화할 때도 필수적인 존재로 여겨왔음을 알 수 있다.
절을 창건하거나 불교 사찰을 다시 지어 복원한 후 마무리로 꽂은 나무 지팡이가 싹을 틔워 나무로 돌아갔다는 삽목(가지나 줄기를 잘라 새로운 개체로 번식시키는 방법·꺾꽂이의 다른 말)의 전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여주 신륵사의 600년 이상 된 보호수는 나옹선사가 세상을 뜨기 전 꽂아 놓은 지팡이가 은행나무가 됐고, 청도 적천사의 은행나무는 보조국사가 적천사를 다시 지은 후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자라난 결과물이다.
이 밖에도 국가의 수탈로부터 절을 보호하고자 열매를 맺길 멈춘 전설의 은행나무도 있다. 강화도에 위치한 전등사의 600년 지기 은행나무 두 그루는 암수 나무가 함께 있음에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 이 은행나무들은 조선 후기 철종 시절 관리들의 은행 열매 수탈에 백련사 추종 스님이 “수탈이 심하니 은행나무가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리자 열매를 맺길 멈추고 관가의 탄압을 막아줬다는 일화의 주인공이다.
이에 국내 문화·역사 전문가들은 오래된 나무의 존엄성과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이들을 지키기 위한 생태적·문화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나무탐독(2015)’, ‘문화와 역사로 만나는 우리 나무의 세계(2011)’ 등을 집필한 경북대학교 박상진 명예교수는 “지구상에 나무만큼 오래 살아 있는 생명체는 없다. 역사와 함께한 나무들에게는 우리 민족의 애환이 깃들어 있다”며 “나무가 갖은 수난을 이겨내고 생명을 이어 나가는 것을 볼 때 느끼는 경이로움은 이 같은 교감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과거를 되돌아볼 때, 그 모든 시간을 함께해온 고목들은 긴 생을 묵묵히 이어오며 우리에게 소중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며 “나무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인위적인 간섭을 줄이고 그들이 자연 그대로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양평문화원 관계자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며 마을 구성원들에 의해 신격화된 당산나무와 같은 노거수 등은 새마을운동으로 많이 사라졌고 마을의 해체, 현대문명화 등으로 민속 신앙 역시 그 흔적을 찾기 힘들어졌다”면서 “문화원은 마을의 문화적 가치를 지닌 노거수와 그 마을의 문화가 담긴 이야기를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화원에서는 나무의 장생과 군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영목제, 은행나무에 담긴 구전을 스토리텔링하는 문화 사업 등을 통해 용문사 은행나무가 양평 지역에서 중요한 존재로 대우받을 수 있게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나무를 통해 간절한 마음을 해소하고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나무를 기도의 대상으로 삼는 문화는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 헨리의 유명한 단편 소설인 ‘마지막 잎새’에서도, 셸 실버스타인의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도 나무는 인간의 소중한 동반자이자 위안을 주는 존재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나무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됐으며, 나라를 유지하고 보강하는 과정에서도 나무의 역할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식물의 존중과 배려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식물 존엄성 선언문에서도 “나무는 인간의 짝이 되는 존재로서 그 생명의 가치를 인정받고 생존, 성장, 번식을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고 명시한다. 인간은 나무를 단순한 자원이나 무생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함께 삶을 나누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존중하며 그들과 함께해 온 역사를 지키는 일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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