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우리가 오랫동안 여행해 온 길은 진보를 가능케 한 너무나 편안하고 평탄한 고속도로였지만 그 끝에는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가지 않은’ 다른 길은 지구의 보호라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라 할 수 있다. 그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_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만물은 인간이 사는 천체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 ‘우주는 우리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근대 천문학이 연구되기 전까지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로 꼽히던 천동설을 나타내는 두 문장이다. 전 우주를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 속에 포함한 인간은 예로부터 인간만을 이성을 지닌 존재로 여기며 존엄의 범주에서 다른 종들을 배제해 왔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지구가 온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고, 인간만이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인간은 존엄의 폭을 동물에게로 확장할 수 있게 됐다. 이에 최근에는 세계적으로 반려동물 사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동물 복지 향상을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이후 1973년 노르웨이의 철학자 네스에 의해 지구상의 인간과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의 안녕과 번영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심층생태주의’가 등장하는 등 생명 그 자체를 존중하는 생명주의 사상이 확산됐으나 여전히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길은 요원해 보인다. 1970년부터 2012년 사이 지구상 생명체가 절반 아래로 감소했고, 현재 100만종의 동식물들이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이는 전체 생물 종의 약 8분의 1 수준에 달한다.

이 같은 배경 아래 인간 착취의 주된 대상이었던 식물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한 식물 존엄성 선언이 2023년 발표됐다. 식물 존엄성 선언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 고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종과 개체로서의 식물 존엄성을 요청하는 국내 최초 선언문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식물 존엄성 선언에 따르면 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고유의 좋음을 지닌 존재이며, 원칙적으로 식물은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인간과 식물은 식물의 복지와 번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하며 이는 식물을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진화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의견의 근간이 된다.

‘식물해방일지’는 식물과 인간의 관계 재정립을 위해 제시될 수 있는 진화론적·에코페미니즘적 관점과 그를 종합한 대안적 실천법 커먼즈를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윤리적 시선과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를 살펴봤다.

진화론적 관점 속 식물과 인간...“우월주의 근거 없다”

먼 우주에서 우리 행성을 방문한 외계인이 제삼자의 관점으로 지구를 분석했을 때 인간을 지구상 가장 성공한 생물이라고 판단할까. 진화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 답은 ‘아니’라고 나올 확률이 높을 것이다. 지구상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며 가장 많은 개체 수를 지닌 생물은 식물이다. 식물은 지구에서 가장 오래 장수해 온 생명체이기도 하다.

지구상에서 식물이 사라졌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다는 점 역시 식물이 진화론적으로 성공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식물이 지구 생명체들의 생존 전반에 깊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식물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들은 식물을 보존하고 번식시키는 방향으로 생존해 왔다.

2023년 식물 존엄성 선언문 제정에 참여한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도시농업과의 김광진 과장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과 식물이 맺고 있는 관계를 짚으며 “인간이 식물을 비롯한 다른 생물들보다 우월하다는 진화론적·과학적인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고 강조했다.

식물은 느리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편견이 있지만, 진화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그들은 주요 양분인 햇빛과 물을 섭취하기 위한 최적의 진화를 이뤄낸 성공적인 생명체다. 식물은 삶의 터전을 한 곳에 고정하고 위로 성장하면서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독점하고, 천적으로부터 가해지는 공격은 주요 기관을 전신에 퍼뜨리는 ‘모듈화’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생존해 왔다.

김 과장은 인간의 기준으로 다른 생명체를 평가하는 관점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식이나 두뇌 크기를 기준으로 하면 인간이 우월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무 타기나 달리기로 기준을 바꾸면 원숭이나 치타가 훨씬 뛰어나다”며 “기준을 수천 개로 늘리면 동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우월함은 평균으로 수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식물과 동물, 인간은 모두 단세포 생명체에서 출발한 하나의 조상을 갖고 있다. 생존 방식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인 존재 이유는 인간이라고 해서 특별한 무언가를 지닌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짚었다.

식물은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며 살아가지만 인간과 동물은 다른 생명체를 섭취해야 생존할 수 있는 의존적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인간이 우월주의를 토대로 지구상 다른 생명체들을 필요 이상으로 착취하고 멸종시켜 왔지만 알고 보면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이 과학적 사실을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본원적인 가치’로 평가돼 왔다. 김 과장은 “인간은 존엄하고 식물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다시 고민돼야 한다”며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간중심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서 생명 존엄에 대한 기준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식물에 대한 인간의 관점이 바뀌는 것이 한순간에 이뤄질 수 있다고 보긴 어렵다”면서도 “앞으로 기후위기가 심화되고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면 식물의 존엄에 대한 논의가 더 원활해질 것이다. 그 이전에 우리가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식물의 소중함과 그들의 생명을 존중하는 방법을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식물 존엄성 선언의 전문은 “미래세대와 생태계의 지속을 위해 우리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인간과 식물의 미래는 지금 우리의 의지와 행동에 달려 있다”고 밝힌다. 진화론적 관점 아래 인간은 주인공이나 목적지가 아닌 하나의 구성원일 뿐이다. 인간이 만물 위로 군림하는 지배자가 아님을 인지하고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머물기 시작할 때 인류는 위기를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향한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상호성의 미학, 관계를 다시 쓰는 ‘에코페미니즘’

자연을 뜻하는 생태학(ECO)과 페미니즘이 더해진 ‘에코페미니즘’ 역시 식물에 대해 인간이 가져야 할 자세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하는 사상 중 하나다. 에코페미니즘은 식물이 인간의 하위 위계에 있다는 인식을 비판하며 식물을 단순한 자원이나 재료가 아닌 행위성을 가진 생명체이자 공존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본다.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자연과 여성은 서구, 과학, 경제 중심의 가부장적 개발 과정에서 착취의 대상으로 도구화돼 왔으며, 특히 자연은 인간의 개발 과정에서 수단화, 객체화돼 왔다. 자연 파괴라는 폭력 또한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됐다. 에코페미니즘은 이 같은 자연 착취가 문화와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에게 가해져 온 차별과 폭력과 일맥상통한다고 해석한다.

여성환경연대 소속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김효정 교수는 “식물을 자원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식물과 인간의 돌봄 방식은 차이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식물의 방식으로 이들의 변화와 필요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본 식물은 행위성과 주체를 지닌 존재로서 인간중심주의적 위계를 탈피해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놓인다. 식물은 인간이 갖는 편견과 달리 주변 환경과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 천적으로부터 위협을 주변에 알리기도 하고 공생 관계를 갖기도 하는 식물의 상호연결적·유기적 삶의 방식은 인간과 식물이 맺을 수 있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김 교수는 “식물은 인간에게 먹이가 돼 주고 공기를 정화하는 등 인간 생존의 전반을 돌본다. 그 방식은 인간의 돌봄과는 차이가 있지만 돌봄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식물의 돌봄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들의 다양성을 보존하고 지속가능성을 위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과 개체로서 식물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질 것을 요청하는 식물 존엄성 선언에 대해 김 교수는 “식물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 착취와 통제, 지배를 넘어서 식물과 호혜적인 관계를 구성하자는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까지의 식물에 대한 불평등과 부정의를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에코페미니즘과 연결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에코페미니즘 사상가이자 활동가인 그레타 가드는 도서 <비판적 에코페미니즘>(2024)를 통해 자연과 인간이 맺는 불평등한 관계와 부정의를 변화시키기 위해 인간을 제외한 동물, 식물, 여성, 제3세계 등 모든 지구의 타자를 포함하는 포괄적 연대를 제안한다. 

전 지구적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 사회가 새로운 생태적 전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서 식물을 비롯한 다종 간 관계성을 공동 구성하고, 생태-돌봄의 확장을 통해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인식 전환과 다종 번영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식물 존엄성 선언 제2장 식물 존중의 기본 원칙에서도 식물 종은 생태계의 구성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므로 인간과 식물의 관계는 종의 정의에 근거해 정립돼야 하고, 종 차별주의와 이기주의 관점은 지양돼야 한다(종의 정의의 원칙)고 명시하고 있다.

에코페미니즘은 자연과 여성이 가부장적·자본주의적 개발 시스템 안에서 도구화되고 착취돼 온 과정을 지적한다. 이들의 재생산과 돌봄의 역할은 현대사회에서까지 평가절하돼 왔으며 여전히 도구적 위치에 남아 있다.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식물 존엄성 선언과 에코페미니즘 관점은 자연과 인간, 특히 식물과 인간의 관계를 재조명할 수 있는 윤리적 기반을 제공한다.

이 관점 아래 식물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돌봄과 행위성을 지닌 존재이며,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생명체로 남게 된다. 인간이 식물을 착취하거나 돌보는 일방향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상호성’이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생태적 전환이 시작될 수 있다.

공존의 새로운 대안 ‘커먼즈’...식물, 타자로 인정받다

인간의 개발 경쟁은 식물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식물을 착취당하는 존재로 전락시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식물은 점차 인간에게 ‘이용하기 좋은 도구’로만 여겨지게 됐다. 자연을 마구잡이로 훼손하고 생명체들의 터전을 빼앗은 결과 인간 역시 기후 변화 속 생존 위기에 놓이게 됐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모색하는 대안으로 주목받는 것이 바로 ‘커먼즈(commons)’다. 커먼즈는 ‘공유지’, ‘공동체’, ‘공통 자원’을 의미하는 영단어 common의 복수형으로,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공유하고 자율적으로 관리하는 자원이나 활동을 뜻한다.

커먼즈의 기원은 고대 영국, 특히 중세 초기 앵글로색슨 지배 이전 켈트족 사회의 관습법에 기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커먼즈는 특별한 제도가 아닌 민중이 당연하게 누리던 문화적 관습이자 권리였다. 이 제도는 공동체의 자율성을 중심에 두고 약자 우선의 공정성과 터전 보존의 지속 가능성을 핵심 가치로 삼았다.

이에 따르면 커먼즈는 단순히 자원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다. 커먼즈는 공통 자원인 자연을 공동체가 돌보고 가꾸며, 황폐화를 막기 위한 자율 규칙을 스스로 설정하고 지키는 일련의 윤리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인하대학교 영미유럽인문융합학부 교수이자 에코페미니즘 연구센터 ‘달과나무’를 이끌고 있는 박혜영 소장은 커먼즈를 식물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윤리적 공동체 모델로 제시했다. 박 교수는 “커먼즈는 식물을 인간의 도구가 아닌 동료 생명으로 대하는 철학”이라며 “커먼즈를 통해 우리는 식물의 자리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공동체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커먼즈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타자의 존재’이다. 커먼즈 속에서 진정한 행복이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완성될 수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타자는 단순히 친구나 가족을 넘어 식물, 동물, 자연 만물 모두를 포함한다.

커먼즈는 물적 토대지만, 모든 존재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공생해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한다. 자신의 삶을 영위할 역량이 떨어진다고 해서 없애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커먼즈는 ‘나’보다 ‘너’, 즉 타자를 먼저 생각하는 공동체 철학이다. 현대 대한민국 사회처럼 공공성이 결여된 채 자신을 돌볼 사람이 자기 자신뿐인 사회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며 “자연 속 동물과 식물이라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인간중심적인 도시 공간 역시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도 식물과 동물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 개편돼야 한다”며 “베를린처럼 도시의 절반을 공원으로 만든다면, 인간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식물 없는 도시에 인간의 온전한 삶은 없다”고 짚었다.

식물과 공존하는 커먼즈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생태적 상상력이 꼽혔다. 인간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라이프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처럼, 식물 역시 자연적인 상태를 선호하며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려는 주체성을 인지하는 것이 생태적 상상력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커먼즈는 인간의 이익을 따지는 공리적 관점에서 탈피해 식물의 관점에서 자연 개발에 대한 문제를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우리는 타자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식물을 생태계의 중요한 일원이자 동등한 타자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커먼즈는 윤리적인 대안이자 이론적 토대으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식물 없는 문명은 없다...다종 번영의 미래를 향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진화의 정점으로 여기거나 자연의 지배자로 인식해 왔다. 인간중심의 위계적 시선은 자연을 개발 대상으로 전락시켰고, 이어지는 파괴와 착취 속에서 인간은 기후위기라는 파멸적 대가를 되돌려 받게 됐다.

녹색이 사라진 도시, 도구화된 숲과 식물, 착취의 논리 위에 세워진 문명은 결국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불행으로 이끈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기후변화로 인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앓는 이들이 늘어나고 개발과 보존을 두고 생기는 갈등은 사회적 긴장과 개인의 피로감으로 돌아갔다.

이에 더해 대멸종이 머지않았다는 관측이 늘어나면서 생태적 전환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전 지구적으로 고착화된 인간중심주의와 인간우월주의는 여전히 지속가능한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어떤 절차를 거쳐야 변화가 찾아올지 누구도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는 혼돈의 시대가 찾아왔다.

이에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우월하다는 통념을 깨는 진화론과, 식물 역시 인간을 돌보고 함께 살아가는 행위적 주체임을 강조하는 에코페미니즘, 식물을 포함한 모든 타자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공동체 철학 커먼즈는 우리가 자연과 맺어야 할 관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이 사상들을 통해 인간은 착취의 역사를 넘어서 새 문명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상에서 식물을 대하는 태도와 인식의 변화를 이끌고 있으며, 인간과 식물 간의 관계를 새로운 상상과 실천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오랫동안 인간의 주된 착취 대상이었던 식물은 최근 정서적 교감의 대상으로서 반려의 의미를 부여받고 있을 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미래를 여는 중요한 생태적 열쇠로도 주목받고 있다. 

식물과 오랜 역사를 함께해 온 인류는 그들의 생명 존엄과 생태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연의 일원으로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 인류가 관점의 전환을 거쳐 식물과 맺는 관계의 틀을 바꾸는 순간 식물은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이 같은 ‘식물 해방’은 우리 모두가 맞닥뜨린 생태적 종말의 문턱에서 인류가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또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