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CC 보고서 기반으로 제작된 카드로 게임
프랑스에서 시작해 지난해 12월 국내 확산
카드 순서 배치하며 기후위기 인과관계 이해
“기후위기, 처음으로 내 문제로 체감하게 돼”
【투데이신문 전세라 기자】 “기후 변화는 왜 생겼을까?”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에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전 세계적으로 폭염, 산불, 홍수 등 기후 재난이 일상화되고 있으며, 세계기상기구(WMO)는 2023년이 관측 이래 가장 더운 해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024년 한국환경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다소 불편하더라도 환경 친화적인 행동을 우선한다’는 응답은 해마다 감소하는 추세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이 과학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에도, 시민들의 경각심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간극을 줄여 기후위기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것이 바로 ‘기후 프레스크’다. ‘프레스크(fresque)’는 벽에 그리는 큰 그림이나 벽화를 뜻하는데 복잡한 내용을 시각적으로 처리한 도표나 이야기 흐름을 뜻하기도 한다. 기후 프레스크는 얼핏 미술 수업을 떠올리게 하지만, IPCC 보고서를 바탕으로 2015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기후변화 교육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 21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카드 게임 형식으로 기후 시스템의 인과관계를 직관적으로 연결하고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한 구조와 집단 토론을 통해 복잡하고 추상적인 기후위기 문제를 시민 누구나 체감 가능하도록 설계된 참여형 교육 도구다.
기후 프레스크는 학교뿐만 아니라 글로벌 기업, 공공기관, 지역 커뮤니티 등 다양한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점차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3년 전 국내에 처음 기후 프레스크가 도입된 이후 지난해 12월부터 본격적으로 활성화됐으며, 방송인이자 기후 커뮤니케이터로 활동 중인 줄리안 퀸타르트가 퍼실리테이터로 참여하면서 참가자 수는 300명에서 2000명으로 증가했다.
투데이신문은 지난 6월 17일 오후 7시에 열린 기후 프레스크에 직접 참여해보며,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기후위기를 설명하고 시민의 행동을 이끌어내는지 몸소 체험해보았다.
줄리안 퀸타르트가 퍼실리테이터로 나서는 이번 기후 프레스크는 그가 운영하는 비건 카페이자 제로웨이스트 샵인 ‘노노샵’에서 진행됐다. 기후 프레스크는 음료 한 잔을 주문하는 것으로 가볍게 참여할 수 있다. 상업적인 목적이 아닌 만큼 워크숍은 주로 카페 등 열린 장소에서 소규모로 진행되기 때문에 참가자는 부담 없이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자기소개와 기후 프레스크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짧게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워크숍에는 노노샵 단골·환경 단체 활동가·제로웨이스트 가게 운영자·청년 창업가·직장인 등 다양한 직업과 나이의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기후 프레스크에 함께했다.
기후 프레스크는 크게 두 단계로 구성된다. 참가자들은 먼저 기후 카드를 연결해 기후위기 발생에 대한 과정을 시각화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기후위기 감정과 행동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기후 프레스크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 14명의 참가자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자리에 앉았다. 기후위기에 대한 이해와 배경지식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손에 쥐어진 기후 카드를 펼쳐보였다.
기자는 기본 상식 수준의 난이도일 것으로 예상하며 건네받은 2장의 기후 카드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그러나 ‘CO₂ 배출량’, ‘추가 온실 효과’, ‘해수면 상승’ 같은 익숙한 개념조차 원인과 결과의 흐름에 따라 정확히 배열하는 일이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또한, 카드에는 ‘복사 강제력’, ‘영구 동토층’, ‘에어로졸 배출’ 등 기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거나 생소한 개념들도 등장했다.
같은 테이블에서 함께 카드를 배치하던 한 참가자는 “우리가 기후위기의 원인으로 생각해왔던 것들이 극히 일부였다”며 기후위기가 단순한 문제가 아닌 다층적이고 복잡한 인과관계들이 얽혀있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각 카드 뒷면의 설명을 차례로 읽으며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이 기후위기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한 장, 한 장 퍼즐 맞추듯 연결해 나갔다. 순서가 도저히 추측되지 않을 때는 퍼실리테이터인 줄리안이 힌트를 제공해 진행 흐름을 잡아줬고, 그렇게 참가자들은 총 42장의 카드로 구성된 하나의 기후위기 지도를 완성했다.
카드를 가지고 완성된 기후위기 흐름을 보며, 참가자들은 각 단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직접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퍼실리테이터는 카드마다 담긴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차근차근 짚어줬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처음에는 막연했던 카드들의 의미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인간 활동으로 시작된 기후위기의 영향은 육상·해양 생물 다양성을 거쳐 ‘인구이동’, ‘무력 충돌’, ‘인간 건강’, ‘불평등 심화’ 등으로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왔다.
기후 카드를 통해 기후위기 발생 과정을 이해한 후 감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은 기후위기와 감정을 연결하는 활동을 처음엔 낯설어했지만, 곧 각자의 감정을 표현하며 기후위기를 보다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됐다.
이후 세계 각지의 기후위기 상황에 대한 자료를 접한 참가자들은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을 종이에 적었다. ‘비행기 이용 줄이기’, ‘동영상 화질 낮추기’, ‘채식’ 등 개인 차원에서 환경보호를 위해 할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제시됐고, 참가자들은 이를 효과성과 실천 난이도에 따라 구분된 그래프 위에 직접 종이를 붙이고 이를 공유하며 생각을 나눴다.
개인 차원의 실천 행동에 대해 이야기 나눈 후, 다시 4~5명으로 팀을 꾸려 단체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기후 행동에 대해 생각을 모으는 시간을 가졌다. 기자가 속한 팀에서는 ‘아는 사람만 행동하고 모르는 사람은 계속 모르는 것이 문제’라는 의견이 있었다. 그래서 환경에 대한 인식 확산을 중심으로 즉각적인 보상과 강제성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정보 전달 방식의 변화와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약 3시간 반 동안 진행된 기후 프레스크는 참가자들이 기후위기의 복잡한 원인과 영향을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도왔다.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감정 공유와 행동 제안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기후위기를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전환점을 경험했다.
평소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 기후 프레스크에 참여하게 됐다는 참가자 A씨는 “기후 프레스크에 참가해서 기후위기의 원인부터 결과까지 공부해보니 ‘내가 이제까지 잘 몰랐구나’라고 깨달았다. 사람들과 기후에 대해 토론까지 진행하니 일방적으로 강연을 듣는 것보다 재미있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기후 프레스크에 참여하기 위해 나주에서 아이를 데리고 기차를 타고 왔다는 참가자 B씨는 “기후 프레스크를 하고 나니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이 워크숍을 통해 기후위기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알게 돼서 좋았고, 다음에는 지인과 함께 참여할 생각이다”라고 전했다.
퍼실리테이터로 활약한 줄리안 퀸타르트는 “기후 프레스크의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 워크숍은 정답을 외우거나 지식을 시험하는 자리가 아니다. 참가자가 기후위기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고,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키워드
주요기획: 여대 재학생 4인 인터뷰, [독서가 온다]
좌우명: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다른기사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