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겉보다 중요한 건 작동 방식이다. 정치는 말과 행동으로 움직이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고유한 ‘문법’이 존재한다. 법과 제도의 언어, 권력의 계산, 대중의 심리, 미디어 전략과 정치 언어 등이 어떤 타이밍에 움직이며, 무엇을 감추고 드러내는지는 단순한 논쟁 너머의 작동 규칙을 따른다.
〈정치문법〉은 한국 정치의 핵심 이슈와 정국 전개를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닌 정치 구조, 전략, 심리, 제도 작동 방식의 측면에서 분석해본다. 정치를 이해하고 싶다면, 정치의 문법부터 파악하라.
【투데이신문 박애경 발행인】더불어민주당(민주당)이 국회 원구성 합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상임위원장들을 선출하면서 이번 주 국무총리 인준과 추가경정예산(추경)안 처리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민주당은 오는 7월 4일로 예정된 6월 임시국회 종료 전까지 주요 법안 처리를 완료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민주당의 밀어붙이기 행태를 두고 국민의힘은 ‘묻지마식 의회폭주’라며 크게 반발했다. ‘원구성 강행’이라는 프레임 속에 감춰진 민주당의 전략적 의도와 국민의힘의 대응, 그리고 향후 정치지형을 분석한다.
‘원구성 강행’ 민주당, 총리 인준·추경·40개 법안처리 ‘속도전’
민주당은 지난 27일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와 운영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등 핵심 상임위 위원장을 단독 선출하며 여야 협상의 ‘결렬’을 선언했다. 이번 결정은 국무총리 인선과 추경 처리를 더 이상 지연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국회는 27일 오후 민주당 주도로 본회의를 열고 공석인 법제사법위원장에 이춘석 의원(4선), 예결위원장에 한병도 의원(3선), 문화체육관광위원장에 김교흥 의원(3선)을 각각 선출했다. 운영위원장은 관례에 따라 김병기 민주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맡는다. 이날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법사위원장 요구를 거절한 데 반발하며 본회의에 불참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되도록 여야 협의를 통해 사안을 매듭짓기 위해 그간 협의를 독려하고 재촉해왔지만 현재로서는 며칠의 말미를 더 둔다 해도 협상이 진척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 보인다”면서 “상임위원장 재배분에 대한 여야의 입장차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22대 국회 초 원구성 당시 정해진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합당하다”며 민주당 손을 들어줬다.
김병기 민주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지금 국회에서는 속도가 제일 중요하다”며 “여야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점은 유감이지만, 민주당은 해야 할 일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30일 본회의를 소집해 김 후보자에 대한 총리 임명동의안을 상정하고, 같은 날 예결위를 열어 추경안 심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또한, 민주당은 총리 인준과 추경 외에도 상법 개정안, 양곡관리법,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인공지능 교과서 도입 관련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등 주요 민생·정책 법안 40여 건을 이번 임시국회 내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법안 중 다수는 윤석열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했던 사안으로, 입법 재추진에 대한 긴장감도 높다.
문진석 민주당 원내 운영수석부대표는 “상법 개정안과 민생 법안 등은 반드시 7월 4일까지 처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힘 “의회폭주” 강력 반발…‘협치 실종’에 정국 경색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단독 원 구성과 입법 강행을 두고 “의회 폭주”라고 맹비난하며 국회 내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일방적인 원구성 처리에 이어 추가경정예산안(추경) 강행 처리를 예고한 데 대해 크게 반발했다. 국민의힘 소속 국회 예결위 위원들은 “말로만 협치를 강조하면서, 뒤에서는 민주당에 특정 시한을 정해놓고 무조건 추경을 통과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독선적인 민주당 의회 운영 뒷배로 이재명 대통령을 지목했다.
그러면서 “이번 추경의 독단적 일정 공지는 추경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신속한 추경 편성’과 ‘속도감 있는 집행’을 강조한 이재명 대통령의 또 다른 오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추경 종합정책질의를 6월 30일 단 하루만 실시하겠다는 것을 두고 ‘졸속심사’라며 “국회의 예산심의권을 침해하는 것이고, 국회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야당과 합의하여 새롭게 일정을 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심지어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사퇴해야 한다”며 총리 지명 철회와 법사위원장 반환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같은 당 김대식 의원도 “민주당이 속도 제한 없이 달리고 있다”며 “지금은 협치와 통합의 정신을 되새겨야 할 때”라고 비판했다.
‘협치’라는 단어의 실종…정치 언어의 붕괴
‘협치’는 어느새 명분만 남았다. 제21대 국회 후반기 원구성 협상이 결렬되며, 협치의 언어는 본회의장에서 여당 단독의 상임위원장 선출이라는 행동으로 대체됐다. 협상과 타협은 정지됐고, ‘속도’라는 단어가 키워드로 부상했다.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금 국회에서는 속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시간표상의 속도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 전략’이자 ‘정당화의 언어’다. 속도는 곧 정당성을 대체하고 있으며, ‘과반이면 가능하다’는 수적 우위의 정치 문법이 내재되어 있다.
다수결의 정치, ‘정당한 폭주’인가?
민주당의 이번 단독 원구성 강행은 헌정질서를 위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헌법과 국회법에 명시된 다수결 원칙에 철저히 부합한다. 문제는 그 형식이 아니라 ‘정치적 신호’다. 단독 처리는 결과가 아니라 메시지다.
‘우리는 기다렸고, 상대는 대응하지 않았다’는 프레임은 유권자에게도 명료하게 전달된다. 정치문법상 이것은 ‘책임전가’ 전략이며, 국민의힘이 “협치파괴”라고 비판할수록 민주당 입장에서는 정당성이 보강되는 효과가 있다.
국민의힘의 프레임 전략, 왜 반향을 못 얻나
국민의힘은 “의회폭주”, “민주당식 협치파괴” 등 강도 높은 언어를 동원했지만, 이는 공감확장보다 분노발산에 가까운 정치행위다. 나경원 의원의 국회의장 퇴진 요구와 농성은 그 자체로 극적 장면이지만, 메시지는 중도층에 다가서지 못한다.
이는 정치문법상 ‘방어의 언어’는 공격의 언어보다 약하다는 규칙과 관련된다. 공격은 명분을 만들어내지만, 방어는 변명으로 들릴 수 있다. 국민의힘의 총리 인준거부, 추경 종합정책질의 일정 추가 등은 자칫 ‘지연’, 또는 ‘발목잡기’ 이미지를 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당의 ‘속도’를 비판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민주당의 속도전, 정치는 ‘승리’보다 ‘지속’이 중요하다
민주당은 이번 임시국회 내 40여 건의 법안을 일괄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여기에는 추경, 총리 인준뿐 아니라 윤석열 정부가 거부했던 노란봉투법, 양곡관리법 등 상징적 의미가 큰 법안들이 포함돼 있다. 이는 단순한 정책 통과가 아닌 ‘정치적 표지 세우기’이자 ‘다음 총선의 전초전’이다.
정치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는 것이다. 이번 원구성 강행은 민주당의 단기 승리이자, 중장기 리스크다. 국회 권한이 법안 통과에서 끝나지 않는다면, 이후의 시행과 집행, 정치적 해석이라는 장기전을 위한 복합 전략이 필요하다.
한편 국민의힘은 이번 사태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단순한 반발이나 구호로는 유권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협치의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문법이 없다면, 반사이익은커녕 존재감 상실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번 원구성 정국은 단순한 입법 절차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당은 과반의 논리를 ‘속도의 정치’로 바꿨고, 국민의힘은 ‘협치의 해체’를 경고하고 있지만, 유권자가 보고 있는 것은 “누가 국정을 이끌 준비가 돼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