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폭우·폭염 연쇄 발생…일상화된 이상 기후, 대응은 왜 후퇴했나
2013년 보고서에 명시된 복합재난 정책 예측시스템 ‘골든타임’ 놓쳐
국내 현장 피해 심각…해외 선진국 대비 복합재난 대응 ‘격차’ 심화
산불과 폭우, 폭염이 한 계절 안에 연쇄적으로 몰아치는 ‘기후채찍질’은 더 이상 미래의 경고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 곳곳에서 기후위기의 대가, 즉 ‘기후청구서’가 혹독하게 청구되고 있다.
10여 년 전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보고서는 이미 이러한 복합재난의 위험을 구체적으로 경고했다. 폭염과 가뭄, 국지성 폭우가 짧은 주기로 반복되며 산불·홍수·산사태로 이어질 수 있고,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사이 정책과 인프라 대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실제 피해는 매년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특히 농촌과 지방 지역은 반복되는 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돼 있다. 재난 피해를 신속히 복구하고 경제적 부담을 완화하는 데 핵심적인 보험 시스템조차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농작물재해보험과 풍수해보험 등 일부 안전망이 존재하지만, 가입률과 보장 범위는 제한적이며 취약계층 지원도 여전히 미흡하다.
이에 본 시리즈는 복합재난의 현장 피해 실태와 정책 대응의 한계, 그리고 해외 사례를 통해 보험을 포함한 통합적이고 실효성 있는 대응체계 구축의 필요성을 심층적으로 조명하며, 기후채찍질 시대에 우리 사회가 반드시 갖춰야 할 생존 전략을 모색한다.
【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2025년, 한반도는 기후변화가 심화시키는 재난의 연쇄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강원·경북 산간 지역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하며 봄철 이상고온과 가뭄이 현실화됐고, 잿빛 산자락이 채 복구되기도 전에 장마철이 시작됐다. 전국 곳곳에서는 24시간 300mm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고, 이로 인해 영남과 충남 등 각 지역에서는 주택 200여채가 잠기는 등 심각한 침수 피해가 발생했다.
폭우가 지나간 뒤에는 다시 폭염의 파도가 밀려왔다. 8월 초, 전국 각지에서는 낮 35℃를 넘나드는 폭염경보가 며칠째 이어져, 이재민 대피소조차 냉방·전력 부족으로 건강 피해가 잇따랐다.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재난 패턴이 반복되면서 ‘산불과 폭우, 폭염이 잇따라 몰아쳐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방 재난관리본부 관계자는 “산불로 이미 약해진 산림과 토양에 집중호우가 겹쳐 산사태 위험이 급증했고, 폭염으로 피해 복구 인력이 부족해 대응 역량이 크게 떨어졌다”며 “이 같은 연쇄 재난은 단순한 자연현상을 넘어 복합재난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기후채찍질…새로운 재난의 패러다임 등장
이렇듯 한 계절 안에서 산불, 폭우, 폭염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은 ‘기후채찍질(Climate Whiplash)’이라 일컫는다. 미국 UCLA 연구팀이 처음 제시한 용어로, 지구온난화로 인해 대기 중 수증기량과 온도 불균형이 심해지며 건조·고온 상태에서 갑작스런 강우·홍수·산사태가 뒤따르는 패턴을 의미한다.
이 현상은 대기 중 온실가스 증가로 축적된 에너지가 급격한 기상 변화를 유발하는 물리적 메커니즘과 맞닿아 있다. 온실가스가 증가하며 대기가 더 많은 열을 품게 되고, 이로 인해 기압계와 습도의 변화가 급변한다. 이 결과, 건조한 폭염이 몰아치다가도 갑작스러운 집중호우로 바뀌는 극단적인 날씨가 교차한다.
김병식 강원대 방재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재난 피해가 단순히 개별 사건들의 누적을 넘어 서로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그 피해 규모와 심각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며 “특히 폭염과 가뭄으로 인해 토양이 극도로 건조해진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집중호우가 발생할 경우, 산사태와 홍수가 동시에 발생하는 복합 재난 현상이 나타난다. 여기에 다시 폭염이 연이어 발생하면, 피해 복구 과정마저 지연되고 재난 대응 체계가 더욱 취약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과거의 점진적이고 예측 가능한 변화가 아니라, 급격하고 복합적인 재난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한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산불에서 폭우, 다시 폭염으로 이어지는 급격한 기상 변화’가 동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일상화되고 있음을 경고했다. 이 보고서는 이러한 기상 전환 현상이 기후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반영하며, 기존 예측 모델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보다 정교한 예측 모델의 개발과 함께 선제적이고 포괄적인 예방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10년 전 경고된 복합재난…여전히 놓치고 있는 ‘골든타임’
기후변화가 몰고 올 복합재난은 오래전부터 예고됐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 대비에 있어 결정적 시기를 놓치고 있다.
2013년 환경부와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이 발간한 ‘기후변화 위기대응을 위한 물안보 종합대책’은, 이미 기온 상승과 강수 패턴 변화로 인해 폭염·가뭄·집중호우가 잦아지고 이에 따른 물 부족, 홍수, 수질 악화, 산사태 같은 피해가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2070년대 한반도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약 3.2℃ 상승할 경우, 여름 홍수 피해액이 현재보다 최대 2.6배로 늘고, 가뭄으로 인한 용수 부족 인구가 400만명을 넘어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
대책으로는 전국 통합 물관리 체계 구축(댐·하천·저수지 연계 운영), 기후변화 시나리오 반영 설계 기준 강화, 홍수·가뭄 예·경보 기능 고도화, 물 관련 재난 대비 재정지원·보험제도 마련 등이 제안됐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보고서의 경고는 현실로 다가왔다. 최근 몇 년간 기록적인 폭염과 초당 강수량 수십 ㎜에 달하는 집중호우, 전국적인 가뭄이 번갈아 발생하며 보고서가 예측한 복합·연쇄 재난 양상이 속속 확인되면서다.
이에 지난 10년간 일부 수도권 하천과 도시 인프라의 개선, 농작물재해보험의 점진적 확대가 이뤄졌지만, 지방과 농촌 지역의 재난 대응 체계는 여전히 취약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기후 프리미엄 보험 도입이 지연되고, 복합재난 예측시스템은 여전히 초보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다.
특히 지방 투자예산이 줄어들고 환경 인프라가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농촌과 중소도시는 반복되는 침수와 산사태 앞에서 무력함을 드러내고 있다. 농작물재해보험은 보장 범위와 한도가 제한적이고, 풍수해보험 역시 저소득층 가입 확대 등 사회적 확산에 실패했다. AI 기반 예보와 경보 시스템 역시 부처 간 데이터 공유 부족과 법적 근거 미비로 인해 기술적 한계가 명확하다.
김병식 교수는 “복합재난은 단순한 계획만으로 막을 수 없으며, 실행력과 대응 속도, 그리고 지방자치단체 현장의 자율권을 모두 포함하는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전략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사회 전반 흔드는 재난 파고…보험의 역할 ‘재조명’
복합재난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광범위하다. 폭염과 가뭄은 농작물 생산 차질을 낳고, 집중호우와 산사태는 인명 피해와 시설 파손으로 이어진다.
더욱 심각한 점은 ‘기후채찍질’ 현상이 특정 지역이나 계층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농촌, 특히 저지대 농지와 산간 지역이 기후재난에 취약하다는 인식이 우세했으나, 2022년 서울 강남의 집중호우 사례에서 보듯 대도시 역시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도심의 열섬 현상과 노후 인프라가 복합된 폭우 피해는 도시민들의 일상을 직접 위협하고 있다.
특히 도시에서는 전력 수요 급증, 교통 마비, 주거지 침수 등 경제·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며, 피해 복구에 소요되는 경제적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기후채찍질은 예측의 어려움과 사회적 취약성 문제를 동시에 드러낸다. 전통적인 기상 관측과 분석 모델이 한계에 부딪혀 기상 예보의 정확성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김 교수는 “기후 변화가 다수의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만들어내면서, 기존의 선형적 해석 방식은 거의 무용지물이 됐다. AI와 같은 첨단 기술 도입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은 여전히 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폭염→가뭄→집중호우→산사태’라는 순서가 고정돼 있지 않고, 지역별로 시간 차를 두거나 순서가 뒤바뀌는 등 기후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은 매우 크다. 이는 단순한 재난 대응 수준을 넘어 국가 차원의 재난 관리 및 정책 체계 전반에 근본적 혁신을 요구한다.
이 같은 ‘예측 불허’ 기후 재난 속에서, 보험은 더 이상 단순한 보상 수단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는 농작물과 부동산 보험의 70% 이상을 정부가 지원해 재난 직후에도 피해 농가의 소득이 유지된다. EU는 세제 혜택과 금융 우대, 기후적응 투자 인센티브를 결합한 정책을 시행 중이다. 반면, 한국의 농작물재해보험과 풍수해보험은 가입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취약계층 지원책이 부족하며, 보장 범위와 한도에도 한계가 뚜렷하다.
전문가들은 기후 프리미엄형 보험의 확대, 보장 항목과 지역 전체로의 확대, 취약계층에 대한 보험료 지원, 그리고 사전 예방과 연계한 보험료 할인 제도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한국리스크관리학회장을 맡고 있는 한양대 최양호 보험계리학과 교수는 “보험은 단순한 금전적 보상을 넘어 절망에 빠진 이들을 다시 일으키는 사회적 장치가 돼야 한다”며 “특히 기후위기에 취약한 계층과 지역을 위한 연대 기반 보험은 공동체 회복의 핵심 인프라로 기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보험학과 교수도 “기후 위기 시대의 보험은 피해 보상을 넘어 위험을 사전에 줄이는 예방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며 “보장 항목과 대상 지역 확대, 취약계층의 경제적 부담 경감을 위한 보험료 지원 정책, 재난 대비 행동을 촉진하는 보험료 할인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병식 교수 역시 “보험은 재난 전 경각심을 높이고, 피해 후 신속한 경제 회복을 돕는 사회 안전망”이라며 “이는 ‘기후채찍질’과 같은 반복적·복합적 재난에 대응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탄력적인 방패가 될 것”이라고 짚었다.
관련기사
주요기획: 김효인기자의 내맘대로 레트로 시리즈, 물티슈의 배신 시리즈, 젠더 이코노미 시리즈
좌우명: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다른기사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