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 안정장치부터 핵잠 승인까지
통상·안보 분야 최대변수 일단락
李 대통령 “최선의 결과 만들어 내”
【투데이신문 강지혜 기자】한미 양국이 14일 관세 협상과 안보 협의 결과를 담은 ‘조인트 팩트시트(Joint Fact Sheet·공동 설명자료)’를 동시에 공개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5개월 동안 이어진 대미 협상의 핵심 쟁점인 핵추진 잠수함 건조,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권한,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 구조 등이 기존 합의대로 담기며 통상·안보 분야 최대 변수가 일단락됐다는 평가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브리핑대에 직접 섰다. 대통령이 직접 발표할 만큼 사안이 중대하는 뜻도 되지만 협상 결과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이 대통령은 “한미 양국이 합의한 내용이 담긴 공동 설명자로인 조인트 팩트시트 작성이 마무리됐다”며 “우리 경제와 안보의 최대 변수 가운데 하나였던 한미 무역통상 협상과 안보 협의가 최종적으로 타결됐다”고 밝혔다.
앞서 양국은 지난달 29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계기 정상회담에서 큰 틀의 합의를 이뤘지만, 핵잠 문구를 둘러싼 미국 행정부 내 이견으로 팩트시트 발표가 2주 이상 지연된 바 있다. 이번 문서 확정으로 그간의 이견 조율 결과가 공개된 셈이다.
연 200억달러 상한·반도체 최혜국 대우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상호관세를 15%로 낮추고, 한국은 총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진행한다는 내용이 팩트시트에 담겼다.
미국이 현금 투자를 요구했던 2000억 달러는 ‘외환시장 안정’이라는 소제목 아래 연간 200억 달러 상한을 명시했다.
팩트시트는 “양국은 양해각서(MOU) 상 공약이 시장 불안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상호 이해에 도달했다”며 “한국이 어느 해에도 연간 200억 달러를 초과하는 금액의 조달을 요구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한국은 가능한 한 미화를 시장에서 직접 매입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조달해 시장에 미치는 잠재적 영향을 최소화할 것”이라는 내용도 담겼다.
아울러 “원화의 불규칙한 변동 등 시장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한국은 조달 금액과 시점을 조정할 것을 요청할 수 있고, 미국은 신의에 따라 이를 적절히 검토할 것”이라는 문구도 포함됐다.
관세와 관련해서는 미국이 한국산 자동차에 부과한 품목별 관세를 25%에서 15%로, 의약품에 부과되는 관세는 15%를 초과하지 않도록 했다. 반도체 관세와 관련해서는 “한국과의 교역 규모 이상의 반도체 교역에 대한 미래의 합의에서 제공될 조건보다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한국에 부과한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이와 관련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브리핑에서 “반도체 관세는 추후 한국보다 교역 규모가 큰 국가와 합의가 있다면 이보다 불리하지 않게 함으로써, 사실상 주요 경쟁 대상인 대만보다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농·축산물 교역과 관련해서는 “한국은 식품 및 농산물 교역에 영향을 미치는 비관세 장벽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과 협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다만 대미 투자와 관련해 한국이 일관되게 강조해 온 ‘상업적 합리성’ 원칙은 향후 체결될 MOU 제1조에 명시될 예정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브리핑에서 “우리 경제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또 상업적 합리성이 있는 프로젝트에 한해 투자를 진행한다는 점을 양국 정부가 확인했다”며 “원금 회수가 어려운 사업에 투자를 빙자한 사실상 공여가 이뤄진 것 아니냐는 불신과 우려 또한 확실히 불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재확인…전작권 전환 명문화
안보 분야에서는 “북한을 포함해 동맹에 대한 모든 역내의 위협에 대한 미국의 재래식 억제 태세를 강화할 것”이라며 “양측은 2006년 이래의 관련 양해를 확인한다”는 문구가 팩트시트에 포함됐다.
이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해 2006년에 한미가 합의한 내용을 다시 확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발표된 한미 공동성명에는 “주한미군이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분쟁에 개입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아울러 “양 정상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위한 동맹 차원의 협력을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도 담겨 이 대통령의 공약인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을 추진할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양 정상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며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해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는 내용이 기재됐다. 또한 “북한이 의미 있는 대화로 복귀하고 대량살상무기(WMD)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포기를 포함한 국제적 의무를 준수하기를 촉구했다”는 문구도 담겼다.
이처럼 한미정상의 공식 문서에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명시해 북한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대원칙을 재확인한 셈이다.
한국은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3.5%까지 증액하고, 2030년까지 미국산 군사 장비 구매에 250억달러를 지출한다는 내용도 팩트시트에 담겼다. 주한미군을 위한 330억 달러 상당의 포괄적 지원도 제공하기로 했다.
미 군함 한국 건조 길 열리나…조선·방산 협력 확대 기대
원자력·조선 협력과 관련해서는 “미국은 한미 원자력 협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 및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를 지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아울러 “미국은 한국이 핵 추진 잠수함을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다”며 “미국은 이 조선 사업의 요건들을 진전시키기 위해 연료 조달 방안을 포함해 한국과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는 문구도 포함됐다.
이와 관련해 이 대통령은 “한미 양국은 대한민국의 수십 년 숙원이자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필수 전략자산인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추진하기로 함께 뜻을 모았다”며 “우라늄 농축과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대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해 매우 의미 있는 진전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백악관도 “미국은 한국이 공격형 핵잠을 건조하는 것을 승인했다”며 “연료 조달 방안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미 군함의 국내 건조도 가능하다는 내용이 담겼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팩트시트에는 “한국 내에서의 잠재적 미국 선박 건조를 포함해 최대한 신속하게 미국 상업용 선박과 전투 수행이 가능한 미군 전투함의 수를 증가시킬 것”이라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하지만 잠수함 건조 국가를 명시적으로 지정하지 않아 향후 이 문제가 남은 불씨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해준다. 동시에 미국이 자국 내 건조를 계속 고집해 한국 내 건조를 협약에 구체적으로 넣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브리핑에서 “대화의 모든 전제가 한국의 ‘원잠’은 한국이 건조한다는 거였고 우리가 협조 요청한 건 핵연료에 관한 부분이었다”며 국내 건조를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SNS에서 ‘미국 필리조선소 건조’를 공언했던 만큼 팩트시트에 구체적 건조 장소가 안 담긴 건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연료 조달도 ‘긴밀 협력’이라는 원론적 문구로 담겼는데 미국의 봉인 핵연료 공급이나 한국의 자체 생산 등을 놓고 추가 협상이 중요하다는 분석이다.
정리해 보면, 이번 조인트 팩트시트에는 관세 인하, 연 200억달러 상한의 대미 투자 방식, 반도체 최혜국 대우 등 주요 통상 현안이 명문화됐다. 또한 안보 분야에서는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재확인, 전작권 전환 추진, 북한 비핵화 원칙 재확인 등이 담겨 동맹 운영의 방향성을 다시 정립했다.
원자력·조선 협력에서는 한국의 우라늄 농축·재처리 절차 지지,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 미 군함의 국내 건조 가능성 등이 포함돼 중장기 산업 파급 효과도 예고했다. 다만 잠수함 건조 국가를 명시하지 않은 점, 미국 내 조선 물량 우선 원칙이 유지된 점 등 미완의 변수도 함께 남겼다는 진단이 나온다.
정부는 이번 합의를 통해 “통상·안보의 최대 불확실성을 제거했다”는 입장이지만 실제 이행 과정에서 한미 간 추가 조율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그럼에도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발표에 나선 만큼 이번 팩트시트는 대미 협상의 중간 결산이자 향후 동맹 구도의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이 대통령은 최근 공개석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무기는 버티기”라고 토로한 바 있다. 여기에 이번 협상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대미 협상이 결코 굴욕적이 아니라 ‘정면 돌파’ 전략의 연장선에서 마무리됐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이 대통령은 팩트시트와 관련해 “한미동맹의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상호 존중과 이해에 기초해 호혜적 지혜를 발휘한 결과”라며 “한미 모두가 상식과 이성에 기초한 최선의 결과”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