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최근 역사 교과서 논쟁으로 온 나라가 쪼개질 듯 양분돼 있다. 보수우파는 좌파정권이 지난시절 좌편향시각으로 왜곡시켜 놓았던 굴곡진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며 ‘국정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고 진보세력은 보수우파 집권세력이 ‘독재와 친일을 미화’하려고 한다며 사생결단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역사논쟁을 벌이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그 사회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사회가 현재 치르는 치열한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닌 분단으로 인해 치르지 않아도 될 우리민족이 치러야 하는 또 다른 민족에너지 소모논쟁이다. 민족의 에너지가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곳에 사용되질 못하고 이렇듯 과거지향적이고 소모적인 곳에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소모적인 역사교과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보수와 진보세력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어떨까.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전쟁이요, 삶이 팍팍한 민초들의 눈에는 모두 배부른 자들이 할 일없으니 실생활과는 별 관련도 없는 정치이슈를 만들어 지들끼리 치고받고 난리굿들 한다고 하지나 않을까.

언제부터 그렇듯 국민과 역사를 직시했고 바른 역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할까. 늘 국민은 그들의 통치객체로 생각한 자들이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하고 바른 역사를 위한다고 부르짖는다.

선거로 정권을 맡겨 놓으면 보수든 진보든 그저 끼리끼리 왕창 해먹을 생각이나 하는 그 놈이 그 놈들인데 말이다. 민초들의 눈에 비추인 현 역사교과서 파행정국은 모두 민초들의 실제 삶과는 별 관련이 없는 우리사회 해묵은 이념논쟁의 파생편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국민들이 많을 듯하다.

1998년 시작된 김대중 시대로 돌아가보자.

보수세력들이 빨갱이라고 극도의 우려 섞인 매도를 했던 그 김대중의 시대가 도래했다. 처절하리만치 당장 살아남는 게 급했던 그 시대.

그때는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두 민초들에게는 그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존재감이 없는 그저 한줌의 정치집단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허울뿐이고 귀찮기 짝이 없는 싸구려 정치구호요 액세서리였다.

당장 굶지 않고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아남아 내 가족을 건사하는 것이 모든 것보다 우선시되었던 시대였다. 생존이 곧 이데올로기였고, 지상최대의 과제였다. 보수니 진보니 다 밥 먹고 살만한 자들의 ‘관념의 유희’에 불과했다.

보수우파세력들이 그리도 공포스럽게 생각했던 ‘빨갱이 세상’이 오지도 않았다. 이념이란 원래 한 줌도 않되는 자들이 만든 정치적인 허구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또다시 역사교과서라는 각색된 이념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대한민국! 이 땅의 이념논쟁 좋아하는 자들이여, 민초들을 가만히 좀 놓아둘 수 없는가. 언제부터 그대들이 민초들의 역사를 그리고 삶의 애환을 그리도 걱정했었는지, 언제부터 그대들이 늘 후대들의 역사의식을 염두에 두며 양심적으로 정치를 펼쳤었는지, 가슴이 손을 얹고 반성해보길 바랄뿐이다.

일본의 저명한 경제평론가인 오마에 겐이치는 1999년 한 논평에서 “미국이 시키는 대로 나라를 해체하고 있다”며 김대중 정부의 1997년IMF시 구조조정에 대해 혹평했었다.

그러던 그가 5년간의 김대중 정권의 정책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면서 “세계에서 단임 5년에 김대중 대통령 만큼 변화시킨 대통령은 거의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세계적 경제전문 통신인 블룸버그도 ‘김 대통령의 업적’ 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김 대통령은 경제·정치·외교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정책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어떨까. 놀랍게도 김대중에 대한 외국의 평가가 국내의 인식이나 평가는 너무 다르다. 왜 이렇게 국내와 외국의 평가가 다른 것일까.

그 이유는 국민들의 뿌리깊은 지역감정, 당리당략에 따른 정략적 공격, 언론의 특성상 정부에 대한 비판 위주 보도 그리고 과거 권위주의적 정권들이 만든 김대중에 대한 조작, 왜곡된 이미지 등으로 인한 편견이 국내 평가에 개입됐기 때문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인 견해에도 불구 김대중 정부의 업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들이 들고 있는 김대중 정부에 대한 평가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 번째, 김대중 정권은 건국 이래 최대 국란이라고 일컬어지던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수 십 년간 보수정권이 지속되면서 대한민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고, 우리 모두 고도성장의 자부심과 한강의 기적이라는 환희 속에 일찌감치 샴페인을 터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97년 대한민국이 국가부도가 날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던 IMF 외환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대중은 취임사를 통해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다. 잘못은 지도층이 저질러 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길 없으며 이런 파탄의 책임은 장래를 위해서라도 국민 앞에 마땅히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는 취임하자마자 이미 발등의 불이 되어있는 IMF구제금융사태를 풀어야만 했다.

1998년 초 한국의 외채는 총 1500억달러로 국민총생산의 37%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1996년까지 7~9%에 이르던 경제성장률은 1998년 마이너스(-) 7%대로 곤두박질 쳤고, 2~3%의 실업률은 9%대로 치솟았다. 실질 국민소득은 1991년도 6000달러 수준으로 곤두박질 쳤다. 온 나라에서 곡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미국의 ‘워싱톤 포스트’지 1998년 5월 16자에는 당시 한국인 중 평균 25명이 하루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고 보도했다. 게다가 IMF형 생계형 범죄가 급증하는 등 온 나라가 쑥대밭이 돼가고 있었다.

초유의 국가부도위기사태인 IMF 구제금융사태를 맞이해 김대중 정권은 국내부실금융기관에 대한 구조조정과 시장퇴출, 외국계 자본의 국내진출을 용이하게 하기위한 다양한 정책을 전개해 나갔다.

김대중 정권의 ‘국민의 정부’는 부실은행들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방식의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신속하게 전개해 1997년말 대비 2004년 10월 현재 대비 전체 금융회사의 35%가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외국자본의 거센 공격 속에 그 동안 ‘우물 안 개구리식’의 경영에 안주하던 핵심 기업들과 기간산업 등 알짜 기업들이 외국자본에 팔려나갔다.

론스타의 예에서 보듯 당시 외국인투자자들은 우리나라의 핵심 우량기업 주식과 대형 A급 빌딩을 중점적으로 사들였고, 핵심 기간사업에 대한 외국인의 지배력이 그만큼 강화됐다.

IMF가 끝날 무렵 이들은 치고 빠지는 식으로 엄청난 시세차익을 실현 한국시장에서 철수함으로써 ‘먹튀’논란의 휩싸였다. IMF를 지나고 나면서 엄청난 국부가 유출되고 말았다.

당시 국내 최대 민간경제연구소인 삼성경제연구소가 ‘외자 경영의 빛과 그늘’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계 자본을 중심으로 한 외국자본세력은 주요상장기업의 주식과 은행주식을 대대적으로 사들였고 이에 따라 은행업 부문에 이들 외국계자본이 끼치는 영향력이 두드러지게 증대했다. 제조업 부문에서의 영향력도 금융업종 못지않게 커져 자동차, 전자, 정보통신, 중공업, 석유화학 등 기간산업을 비롯해 신문용지, 종자, 식품 등 각 부문에서 외국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화됐다.

다시 말해 거의 전 산업 분야에서 외국계의 독점적 지배력이 구축됐다.

두 번째, 김대중 정권은 민주화의 중간 완성과 평화적인 정권교체 그리고 남북화해를 이뤘다.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도입된 것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시장경제 체제와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근간으로 하겠다는 제헌헌법이 제정된 이후로 보는 견해가 다수다.

그러나 현실에서 전개된 상황은 헌법에서 명시된 민주주의와는 달랐고, 권력에 의한 숱한 비민주주의적인 정치행태가 반복적으로 계속돼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우기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국제적인 혹평과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을 시작으로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화를 위한 권력과 국민들 간의 투쟁은 계속됐고 결국 김영삼 김대중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화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이 민주화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말할 수 없는 노고와 희생이 있었다.

김대중 정권의 등장은 바로 그러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의 중간단계의 완성을 의미했다. (필자는 아직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완성단계가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보고 있다) 늘 정권교체시 정치적인 보복과 반민주적인 역사가 되풀이 됐던 전례를 본다면 김대중 정권의 등장은 한국정치사에서 정말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김대중 정권은 지속적으로 남북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경주한 바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6.15 선언으로 결실을 맺게 됐다.

6.15선언은 군사적인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대동단결해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늘 전쟁의 위협 속에 남북의 민족에너지가 비생산적이고 비이성적인 방향으로 소모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6.15선언은 한반도에 새로운 데탕트의 가능성을 연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노력에 대해 세계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늘 상황을 해석하는 시각에는 편차가 있는 법. 6.15 선언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는 보수우익성향의 세력이 우리사회에는 다수 있다.

이들은 6.15선언은 이른바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에 농락당한 좌파정권 김대중의 ‘희망사항 선언’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심지어는 노벨평화상 수상도 돈주고 샀다는 경멸적인 평가도 마다하지 않는다.

세 번째,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은 ‘햇볕정책-위대한 실험’ 또는 ‘감상적 통일론’이라는 평가가 볼 수 있다.

김대중 정권시절의 대북정책은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요약된다. 이 햇볕정책은 유난스럽게 폐쇄정책을 고소하고 있는 전체주의 공산체제인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북한으로 하여금 스스로 개방의 필요성을 느끼게 함으로써 자연스레 이 체제와 문호를 개방하게 하자는 취지의 대북정책으로 김대중 정권 기간 내내 대북정책의 기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우익보수성향을 가진 이들은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결국 북한정권의 수명을 연장해주고 북한 주민을 더더욱 폭압적인 정권의 노예로 만드는데 일조하였으며, 결국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개발할 시간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 한반도 공산화라는 한참이나 철지난 목표를 세우고 동족에게 지극히 호전적인 북한정권을 달래고 가능한 한 전쟁이라는 극한적인 수단을 선택하지 않게끔 하려는 고육지책의 일환이었던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은 카운터 파트너인 북한의 핵개발로 인해 그 빛도 바랬을 뿐더러 북한을 변화시키는 데는 궁극적으로 실패한 정책으로 현재로서는 ‘너무나도 순진했던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민족내부 갈등과 전쟁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차선의 선택’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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