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전두환이 지난 23일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속보로 전해진 당일, 온라인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연출됐다. 배달 어플리케이션에서는 그의 별명인 “문어”로 만든 요리가 갑자기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SNS에는 오늘 문어숙회에 축하주라도 먹어야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그런데 전두환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내가 가장 처음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그가 헬리콥터 기관총 사격 명령을 했는지 여부도 밝혀지지 않았고,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 명예훼손 소송도 끝나지 않았으며,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난 11월 1일 안철수 전 의원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2012년 중도하차, 2017년 출마 후 득표율 3위를 기록하며 낙선한 이후 세 번째 출마다.간선제로 치러졌던 대통령선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대선마다 진보-보수로 분류되는 거대 양당의 대결 국면이 펼쳐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거대 양당의 후보만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거대 양당의 독식을 비판하며 진보-보수와 같은 정치적 성향을 표방하지 않는 후보가 나와서 유권자의 주목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후보들을 통틀어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올수록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대통령 선거에 쏠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당별로 대통령 선거의 최종 후보를 뽑는 경선을 진행 중이고, 이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이어지고 있으며, 후보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경선은 종료됐고, 나머지 정당은 경선이 진행 중이다.각 정당의 경선이 진행되면서 한 가지 징크스가 다시 한 번 부각되고 있다. 그것은 “총리는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는 징크스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정세균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대선을 150여일 남겨놓은 상황에서 다시 대선 후보와 종교 사이의 관계가 화제다. 문제의 발단은 국민의힘 윤석열 예비 후보의 손바닥에 적인 “왕(王)”자였다. 국민의힘 내부 후보 방송 토론회에서 윤석열 후보의 손바닥에 “왕”자가 적힌 것이 캡쳐되면서, 그 글자가 무속인의 비방( 方)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후 “천공스승”, “은밀한 부위의 침 시술” 등 무속과의 관계를 의심할만한 의혹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에 윤석열 후보는 일요일에 여의도 순복음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자신의 부인이
연좌제(緣坐制)란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 관계가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 책임을 지우는 제도”를 뜻한다. “삼족을 멸한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근대 이전의 연좌제는 반역죄를 지은 사람에게 가장 심하게 가해졌으며, 주로 3촌의 근친이나 처첩에게까지 가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연좌제는 1980년대 이후 사실상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당시까지도 민주화 운동에 몸을 던졌거나, 억울하게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 사람에게는 그 가족의 취업 제한 등이 가해졌다. 국가 차원이 아니더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빨갱이”, “간첩”이라는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대유(大儒).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에 대한 평가는 이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이이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함께 한국 유교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기(理氣)에 대하여 이황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보여주었고, 이황이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었던 것과 달리, 이이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이 두 사람의 다른 행적은 결과적으로는 한국 유학의 원류인 중국의 유학을 계승하고, 당대 조선의 실정에 맞게 발전시키며 조선화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학순 주교의 삶은 굴곡진 한국현대사와 묘하게 맞물린다. 지학순 주교는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태어나서, 분단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신부 서품을 받았다. 이승만 정권 때 로마 유학을 다녀오는 등 신부로서 사목생활을 하던 중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이 수립된 후인 1965년, 지학순은 원주교구 주교로 착좌(着座)했다. 지학순 주교가 원주교구 주교로 활동한 기간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가 불법적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였다. 그리고, 아이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최근 일본에 관한 이야기가 부쩍 많이 들린다. 황교익 칼럼니스트와 이낙연 대통령 선거 예비 후보 캠프 사이의 친일 논쟁,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에 돌아온 것 등을 계기로 일본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도쿄 올림픽도 큰 계기가 되었다.도쿄 올림픽은 판데믹 상황으로 인해 1년 연기되었고, 일본에 확진자가 부쩍 늘면서 개최 여부도 불투명했다. 그러나,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와 IOC는 줄곧 올림픽 개최 강행을 주장했고, 결국 일본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 회차에서 재해위가 시련을 겪으면서 원주지역의 각종 사업이 원주교구 신부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각종 사업 주체가 바뀌었다고 언급했다. 여기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것은 바로 외국으로부터의 자금지원이 변화했던 것이다. 이것은 1980년대 한국의 경제 발전, 올림픽 유치 등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사개위는 외부 지원기관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자금 지원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 예로 세베모(Cebemo)에 신청한 1983년도 농촌소비조합육성계속사업의 승인도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다.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2021년 7월 16일 전국교수노동조합(이하, “전국교수노조”로 약칭함)의 노동조합설립신고필증이 교부됐다. 이전까지 정부가 노동조합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법외노조”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전국교수노조가 정식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은 것이다.교수와 연구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시도는 21년 전부터 있었다. 노동자의 단결권을 쟁취하고 교육 현장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이 구성원들의 참여에서 비롯됨을 인지했던 “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교수모임”(약칭 민교협) 소속의 교수들이 2000년 10월 31일에 교수노조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원주를 비롯한 영서 지역에서 펼쳐졌던 남한강 수해복구 사업과 이 사업을 계기로 펼쳐진 협동조합 운동은 1970년대 후반 일대 전환을 맞이했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와 원주교구는 이 전환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이 전환의 핵심은 1979년 9월 재해대책위원회(재해위)는 사회개발위원회(사개위)로의 전환이었다. 원주교구 신부들이 사개위 위원 다수를 점했고, 이들 위원들이 각 사업마다 담당 이사를 맡아 각 사업을 주도했으며, 상담원이 이들을 보좌했다. 그리고, 김지석 신부가 감사로 임명되면서, 그동안의 재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학순 주교의 영서 지역에서의 여러 활동 가운데 눈에 띄는 또 다른 활동은 바로 “신용협동조합”(이하 신협) 운동이었다. 특히, 지학순 주교는 1967년 원주교구장에 부임한 이후 원주교구 관할 지역의 민생과 문화진흥, 교육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협동조합 운동은 이런 활동 중 하나였다.지학순 주교의 후원 아래 1972년 남한강 대홍수를 계기로 만들어진 재해대책사업위원회(이하 재해위)가 농촌과 광산 지역에서 전개한 신협운동은 북미의 안티고니쉬 운동 (Antigonish Movement)과 신
“의리(義理)”라는 말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의리를 “예의”와 비슷한 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의리라는 말의 유래는 매우 오래됐다. 의리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맹자의 의(義)와 송대(宋代) 성리학에서 강조한 이(理)가 함께 쓰인 용어다. 그러나 실제로 의리라는 용어 자체는 『예기(禮記)』 예기편(禮器篇)의 “선왕이 예의 제정에서, 근본이 있고 문식(文飾)이 있게 하였으니, 충신(忠信)은 예의 근본이고 의리는 예의 문식이다”라고 쓰여서 송대 이전에도 이미 쓰인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1972년 남한강 대홍수를 계기로 재해대책사업위원회(이하 재해위)가 출범했고, 제2차 원주그룹의 결성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생명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원주와 인근 지역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재해위와 원주그룹은 영서 지역의 수해복구, 빈곤층에 대한 구호와 빈곤 극복을 위한 협동조합 설립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으로 이어졌는데, 지학순 주교는 이러한 일련의 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펼쳐진 수해복구와 빈곤층 구제활동, 협동조합 활동은 여러 가지 이유로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학순 주교의 협동운동, 생명운동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영서지역에 발생했던 수해를 복구하는 과정이었다. 지학순이 원주교구 주교로 부임하면서 장일순을 비롯한 1950-60년대 원주지역 사회운동가들이 원주그룹을 주도했다. 이들은 1960년대 후반 천주교의 ‘평신도운동’을 전개했고, 1972년 8월 남한간유역 대홍수 극복을 위한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추진했는데, 이러한 운동들이 원주그룹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원주그룹은 1973년도 남한강사업, 한우지원사업, 1976년도 원주원성수해복구 사업 등을 추진했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1970년 봄 한국노사문제연구소 박청산 소장에게 버스 차장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상담을 의뢰했다. “안젤라”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던 그 사람이 상담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회장님, 저는 버스 차장 일을 하면서 어머니의 병 치료비와 동생의 학비 때문에 하루에 300원씩 삥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톨릭신자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저는 교회에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저지른 삥땅이 죄가 되는지 여쭤보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1)위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그 버스 차장은 모친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석방된 지학순 주교는 명동의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으로 주거가 제한됐다. 이후 지학순 주교는 동생의 집으로 옮겨졌다가 신병을 이유로 다시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지학순 주교가 로마 유학 당시 당뇨병을 얻었고, 이후 지학순 주교는 당뇨병으로 생애 내내 고생했다.지학순이 중정에서 나온 뒤 “그럼 그렇지, 누가 감히 천주교회를 건드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좀 더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학순은 병원에 있으면서 계속 고심하다가, 7월 16일 김지하의 어머니와 아내를 면담하고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학순 주교의 행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군사독재 정권과의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지학순 주교는 1952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잠시 청주교구의 보좌신부로 있다가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 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귀국해 가톨릭대학교, 청주교구, 부산교구 등에 있다가, 1965년 원주교구가 창설되면서,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교구장으로 취임했다.지학순 주교가 원주교구장이 된 것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큰 의미가 있었다. 지학순 주교가 원주교구장이 되었던 1965년은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올해는 지학순(池學淳, 1921~1993) 주교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학순 주교의 세례명은 다니엘로, 천주교 원주교구장을 역임한 신부이며, 천주교 신부 가운데 김수환 추기경 못지않은 유명세를 가진 분이었다.필자가 “지학순”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지학순 주교가 이산가족 상봉 때 동생을 만나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본 것이었다. 이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의 방문 행사였다. 이 행사는 남북분단 이후 있었던 첫 상봉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매년 3월이면 각급 학교는 새로운 학기를 시작한다. 지난 3월 2일, 필자가 잠시 집 밖에 나갔다 오니, 동네의 학교의 교문에 “입학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SNS 곳곳에 자식이 상급 학교에 진학했다는 소식으로 넘쳐났다. 바야흐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것이다.이제 역사가 된 2020년, 각급 학교는 역사상 없었던 팬데믹 상황을 겪었다. 그리고 맞이한 2021년 1학기, 초중등학교는 1년간의 경험치가 쌓여서 팬데믹 상황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것 같지만, 전국의 대학은 큰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