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신문 이영민 편집인<br>
△ 투데이신문 이영민 편집인

지난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4.10 총선 후 엿새 만에 나온 대통령의 공식 메시지였다. 여야의 공식 반응은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여당의 일부 비윤계 의원들과 낙선자들의 목소리에서는 수직적 당정관계에 대한 회의감과 자성의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러나 이 역시 극단적인 진영논리에서 벗어나려는 반성의 움직임이라기보다 세태염량(世態炎凉)의 처세술로 해석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정치인들은 능력과 비전으로 승부해야 하는 선거에서 매번 시대정신 운운하다가도 결국은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케케묵은 지역감정이나 진영논리로 빠지고 만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선거판에서 유권자들이 시대정신이라는 거창한 수사로 정의의 탈을 쓴 부정의를 구별해 낼 수 있을까. 정의인가 부정의인가에 대한 대중적 판단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영향받기 쉽다. 또, 부정의가 그럴싸한 대의로 포장될 때는 설사 그것이 부정의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해도 개인적 이익에 부합한다면 부정의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인들은 바로 이러한 유권자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고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도 여지없이 동서를 정확히 반으로 나눈 당선자 지도는 우리나라 정치 현주소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양치기 개가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늑대와 같이 양들의 위험이 되는 것을 크게 경계한 바 있다. 정치인들이 그들의 명리(名利)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유권자들을 이용하는 한국의 정치 현실이 오버랩된다.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읽히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그는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거나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기 전에는 사회가 개선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이데아를 통찰할 수 있는 철인만이 통치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통치자의 타락을 막기 위해 재산 소유를 금지하고 인간적인 유희를 차단하는 등 세세한 조건으로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적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를 통치자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총선은 지났지만, 그 후가 더욱 혼란스러울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이 엄습한다. 또다시 진영논리로 무장한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극단으로 내몰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선택을 강요하는 악몽이 재연될까 두렵다. 스스로 세운 통치자를 그 손으로 다시 끌어내렸던 아픈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다.

국민들이 정치권에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통합과 화합의 정치다.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모든 세력이 공공의 선(善)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대다수 국민에게 유익한 모범 답안을 도출해 줄 것을 기대한다.

몇 년 전 광화문의 대형서점에서 평소 집어 들지 않을 것 같은 책을 한 권 구입했다. 저녁 약속까지 남는 시간이 애매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라는 스웨덴 사람의 책이었는데, 저자의 특이한 이력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다국적 기업에 근무하며 불과 스물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임원으로 지명된 인물이었다. 여기까지야 드물긴 해도 가끔 접하는 ‘잘나가는’ 비즈니스맨의 스토리 정도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모든 사회생활을 정리하고 태국 밀림의 숲속 사원에 귀의해 파란 눈의 스님으로 17년간 수행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마흔여섯의 나이에 환속하고 일상으로 복귀해, 사람들에게 마음의 고요를 지키며 살아가는 법을 전하다 2018년 루게릭병 진단 후 2022년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남긴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에서 찾을 수 있다는 깊은 울림의 메시지는 이후 한동안 내 마음속을 뒤흔들어 놓았다.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택이 항상 공정하고 정의로울 수 있을까. 혹시 나의 개인적 이해(利害)가 작용하며 바르지 못한 선택을 할 수 있지는 않을까. 나티코의 책처럼 정치인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배려와 존중의 자세로 상대를 바라봐야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는 상대도 내가 몸과 마음을 다해 봉사해야 하는 또 다른 국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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