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사진제공=뉴시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사진제공=뉴시스]

【투데이신문 정인지 기자】 한 남성이 15년 전 집단 성폭행을 자백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숨져 공범으로 추정되는 일행이 재판에 넘겨진 가운데 대법원이 해당 내용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8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옛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특수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남성 3명에게 각각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환송했다.

앞서 A씨는 지난 2021년 3월 서울 양천구 소재의 아파트에서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

A씨는 문서에 ‘너무나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지난 2006년 친구 3명과 함께 중학생 후배에게 술을 먹이고 집단으로 강간한 사실을 고백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유서는 사실상 사건의 유일한 증거로 거론됐다.

이후 경찰은 A씨의 사망을 변사 처리한 뒤 그가 작성한 유서를 바탕으로 특수준강간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피해자는 수사 기관이 범행일로 추정하는 날 실제로 술에 취한 채 귀가했으며 속옷에 피가 묻어있었다는 진술을 했다. A씨의 유서 내용과 부합하는 내용이다.

범행 추정 다음날 피해자가 산부인과를 방문하고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았으나, 성범죄 피해와 관련한 의사의 판단은 별도로 나오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A씨가 유서에 공범으로 추정되는 동행인 3명을 언급해 경찰이 이들을 상대로 수사를 벌였으나, 모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범행을 부인한 것으로 파악된다. 경찰은 9개월의 수사를 거쳐 지난 2021년 12월 이들을 재판에 넘겼다.

재판의 쟁점은 A씨의 유서가 형사재판의 증거가 될 수 있는지였다. 현행 형사소송법에 따라 사건관계인이 사망해 재판에서 직접 진술할 수 없는 경우, 그가 남긴 진술서 등 증거물은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특신상태)’에서 쓰였을 때만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이는 진술 내용이나 작성 과정에 허위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고, 내용의 신빙성이나 임의성(자발성)을 담보할 구체적 외부 정황이 있는 경우를 뜻한다.

1심은 유서를 신뢰할 수 없다며 일행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나, 항소심 법원이 유서 내용을 증거로 쓸 수 있다고 보고 피고인 3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을 뒤집고 유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원심판결을 파기한 대법원은 “유서 내용이 법정에서의 반대신문 등을 통한 검증을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신빙성이 충분히 담보된다고 평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망인이 자신의 범행을 참회할 의도로 유서를 작성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A씨가 사망 전날 술을 함께 마신 친구를 비롯해 사건 이후 14년 동안 누구에게도 이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피고인 3명에 대한 형사처벌을 목적으로 유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A씨의 기억이 과장·왜곡됐을 가능성이 있어 진실만 기재됐음을 단정할 수 없으며 수사기관이 A씨를 조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의미를 따져볼 수 없음도 함께 고려했다.

아울러 유서 내용이 불분명해 구체적인 공소사실을 구성하기에는 미비하고, 일부 내용이 피해자의 진술과 다르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에서 피고인 3명의 유죄 인정 여부를 재심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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