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가방 - 보험조사원
박종민
그의 가방 속은
시한폭탄으로 가득하다.
순서를 기다리는 폭탄들.
어제는 배달음식을 먹고 식중독이 난 사고가
오늘은 반려견이 지나가는 사람을 문 사고가 있었다.
한 달 전 식당에서 미끄러져 다친 사고는
이미 물기가 말라버려 확인할 방법이 없다.
사고는 크건 작건 의심을 품고 있다.
참과 거짓의 갈림길에 놓인
난해한 방정식이다.
물음표는 탁월한 탐지견(犬).
실오라기 하나라도
귀를 세우고 코를 킁킁댄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진실은 가면 속에 꽁꽁 숨어 있다.
더 높이 뛰려고 작심한 선수들도 있다.
넘지 못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진술을 거부하는 사각지대.
CCTV를 돌릴수록 물음표는 커진다.
직감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그는 가짜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
공정은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이다.
가방은 오늘도 그를 현장으로 끌고 다닌다.
■ 당선소감 / 박종민
귀를 의심할 만한 따스한 봄소식
2월의 끝물 월요일 오후. 꺾이지 않는 추위 탓으로 마음마저 쪼그라져 있던 중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귀를 의심할 만한 따스한 봄소식이었습니다. 올해 봄은 꽃보다 전화로 먼저 왔습니다.
외출할 때, 가방 속에 시집 한 권은 꼭 넣고 다니거나 책방에 가면 시집이 꽂힌 서가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시상이 떠오르면 스마트 폰 메모 웹에 기록도 해가며 오랫동안 시를 향한 구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시가 찾아오는 속도는 나비의 날갯짓이나 달팽이 걸음처럼 더디기만 했습니다. 한두 줄을 쓰는데 하루가 걸리기도 하고 소설 한 권 읽을 수 있는 시간에 시 한 편 쓰기조차 힘들었으니까요. 그 점이 시를 놓지 못했던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시는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 밀당의 고수 같았습니다.
시인이란 이름을 달고 세상과 소통하는 것도 폼나 보일 것 같아서 신춘의 계절이 올 때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신춘의 문은 제겐 뚫을 수 없는 벽이었습니다. 그 실력 가지고 어딜 감히 넘보냐는 듯 냉정했습니다. 이번 생에는 힘들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 접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이번에도 문을 다시 두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고맙고 기쁩니다.
시 쓰기도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주신 이병일, 이소연, 김은지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때 이후 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시에 다가갈 때는 어깨에 힘 빼고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해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일상의 사물에서 시를 길어 올리는데 탁월하신 마경덕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시가 삶과 비슷할 때 가장 빛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합평을 통해 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보여주신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 하린, 류근, 황인찬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수업을 함께 한 학우님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수업에서 느껴지는 열기를 통해 좋은 기운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며 응원해 주신 삼성화재 선후배님들께도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저에게 한번 마음껏 날아 보라고 날개를 달아주신 박덕규, 김흥기, 최대순 시인님과 투데이신문, 한국문화콘텐츠21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좋은 작품을 쓰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 심사평 / 박덕규(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현실의 삶을 추리해서 읽게 하는 묘미
28인의 작품을 두고 본심에 임했다. 그중에서 「검은 가방 - 보험조사원」(박종민), 「가옥의 장례」(장정순), 「출렁거리는 돌」(홍진영), 「액정호수」(이세미), 「레미콘 부장님」(최은지), 「나이테」(신수현), 「칼날 아래」(황봉남) 등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다들 개성이 넘쳤고, 상상력이 빛났다. 이번 직장인신춘문예가 이전에 비해 고르게 수준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액정호수」, 「레미콘 부장님」 등은 대상을 새롭게 드러내는 참신성이 빛났고, 「칼날 아래」는 맺고 끊는 간결함이 돋보였다. 「출렁거리는 돌」은 자연의 현상을 다시 보게 하는 깨달음을 안겨주었고, 「나이테」는 익숙한 것을 들추어 의미를 되새김하는 여유를 보였다. 「가옥의 장례」은 대상을 비유적으로 관찰하는 힘을, 「검은 가방 - 보험조사원」은 대상을 객관화하는 힘을 드러냈다. 다들 그만큼 시적 역량이 있다고 판단되었다.
반면 시적 정체성이랄까, 대상을 드러내는 시적 자아의 일관성이랄까 하는 게 옹골차게 유지되지 않는다는 약점을 보이기도 했다.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시적 논리가 충분히 유지되고 있지 않거나, 응축되지 않은 느슨한 산문성, 표현한 것을 엇비슷하게 되풀이하는 중복 등이 나타났다. 다들 한 차례씩만 더 고민하고 다듬는 과정을 겪었으면 훨씬 완결성이 높은 시로 격상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가옥의 장례」와 「검은 가방 - 보험조사원」을 두고 저울질했다. 사유를 비유로 드러내는 능력을 산다면 「가옥의 장례」을, 대상을 감정 없이 부각하는 냉철함을 인정한다면 「검은 가방 - 보험조사원」을 택해야 했다. 전자는 수식하고 변주하는 과정에서 이미지가 풀어지는 약점을, 후자는 설명하고 풀이하는 표현이 잦은 약점을 보였다. 후자가 시에서 현실의 삶을 추리해서 읽게 하는 묘미를 느끼게 한 것, 그리고 그것이 동봉한 다른 2편 시에서도 고르게 유지된다는 점에서 유리했다. 「검은 가방 - 보험조사원」을 당선작으로 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