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섭

앗! 불쏘시개가 없다. 한뎃솥 걸린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 좀 데워 보렸더니 장작만 있고 불쏘시개로 쓸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열두어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아궁이에 불 지핀 경력이 수십 년이건만 장작개비에 바로 불붙이는 재주는 여태껏 익히지 못했다. 낭패다.

마당을 도닐며 불쏘시개가 될 만한 것을 찾는다. 텃밭머리에 길이가 반 발가량 되는 마른 섶 두어 다발이 놓였다. 지난봄 고춧대 옆에 세웠던 것들이다. 장모님의 텃밭에 서서 가을까지 세 계절을 오롯이 버틴 놈들은 햇볕과 바람에 바짝 말라 부석부석하다. 색은 이미 회색으로 풍화되고 껍질은 거슬거슬하다. 섶을 분질러 성글게 쌓아 놓고 신문지를 구겨 불을 댕긴다. 부채를 들어 살살 바람을 일으키니 타닥타닥 불티를 튀기며 금세 불길이 솟는다.

섶은 덩굴지거나 줄기가 가냘픈 식물이 쓰러지지 않도록 그 옆에 매거나 꽂아서 세워 두는 막대기다. 오이나 고추를 키울 때 쓰는데 요즘은 대부분 온실에서 키우니 보기 어렵다. 온실 골조에 끈을 매달아 덩굴손이 붙잡고 올라가게 하거나 집게로 줄기를 집어 가며 키운다. 한데서 키울 때도 섶 대신 양은으로 만든 지지대를 쓴다. 꽂기도 수월하고 햇볕과 비바람에 삭지 않으니 여러 해 되쓸 수 있어 섶을 장만하는 수고를 덜어준다.

오이나 고추를 키우려면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에 섶부터 준비해야 했다. 겨우내 땔감을 마련하는 틈틈이 섶으로 쓸 우죽이나 가는 대나무를 잘라 땅에 박을 수 있도록 끝을 뾰족하게 다듬었다. 농사가 큰 집은 수백 수천 개를 마련해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섶은 반드시 생나무를 잘라서 만들었다. 삭정이나 말라 죽은 나무는 신산한 여름의 비바람과 햇볕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한 목숨 바쳐 태어난 숭고한 놈들이다.

오이밭이나 고추밭의 푸른빛은 이파리들의 색이다. 섶은 그 속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거친 비바람에 고추가 쓰러지지 않도록 함께 버텨 주고도 공치사하지 않는다. 버티지 못해 쓰러져도 스스로를 책할 뿐 고추를 탓하지 않는다. 한 줌의 햇볕이라도 더 받으려는 오이가 자신을 바투 잡아당기며 밟고 올라도 불평하지 않는다. 간짓대나 바지랑대처럼 길고 튼튼하지는 않아도 한살이 자신의 소임을 묵묵히 다한다.

오랫동안 사람을 돕는 일로 밥벌이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직업이다. 사회복지를 배웠으니 숙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를 돕지는 못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느라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지도 못했고, 늦깎이로 학위를 받겠다고 아등바등하던 아내도 돕지 못했다. 객지 생활과 장거리 통근 탓에 자식이 자라는 모습도 오롯이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누나가 모셨고, 아내는 아이를 둘러업고 학위를 받았다. 아이의 첫걸음마도 휴대전화 화면으로 보았다.

소외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으니 보람되지 않았냐고 위무해 보지만 삼십 수 년 직장생활이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 고통이 전염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는 공감이라는 스위치를 잠시 꺼 두어야 한다. 비를 함께 맞더라도 같이 울어서는 안 된다. 감정을 서툴게 다루다가는 소진되거나 우울해진다. 그렇다고 애써 강해지려다가는 감정이 무디어져 스스로 삭막해진다. 이래도 어렵고 저래도 힘들다. 하소연도 어려운 직업병이다.

장애인이 일자리 찾는 것을 오래 도왔다. 패기 넘치던 젊은 날에는 장애인도 능력이 있다고,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권리가 있다고 책에 나올법한 주문을 외치며 여기저기 기업들을 들쑤시고 다녔다. 하지만 인사노무 담당자를 만나 말을 건네 보기는커녕 경비실 문턱을 넘기도 어려웠다. 동냥 온 거지 대하듯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며 손사래를 치는 경우도 있었다. 어린 마음을 많이 다쳤다. 계속되는 거절에 지친 날에는 바닷가에 주저앉아 무연한 바다를 보며 마음을 달랬다.

가지에 잎이 붙은 잎나무나 손으로 부러뜨릴 수 있는 가는 땔나무, 띠나 억새 같은 새나무도 섶이라고 한다. 불이 쉽게 붙는 땔감들이지만 불꽃만 거셀 뿐 장작처럼 불땀이 좋지는 않다. 화르르 타올라 얼핏 강해 보이지만 섣불리 다루면 금세 꺼진다. 때를 놓치면 장작에 불이 옮겨붙기 전에 불티만 날리다 사그라진다. 섶 불이 사그라들기 전에 조심조심 장작을 올린다. 불이 조금씩 장작으로 옮겨붙는다. 어느새 뭉근하게 타오르는 모습이 오지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때가 있다. 기다림은 때때로 무위가 아니라 적극적 작위로 작용한다.

땅에 붙박여 비바람과 햇볕에 시달린 섶은 늦가을 서리가 내릴 무렵이면 속까지 삭아 푸석푸석해진다. 조그만 힘에도 툭툭 부러진다. 걷이가 끝나 쓸모를 다하면 밭둑에 내뜨려져 썩어 가다가 기어이 장작불 지피는 불쏘시개로 한살이를 마친다. 긴 시간 남을 도운 대가치고는 허망하지만, 후회도 불평도 하지 않는다.

세월 흘러 내 머리에도 서리가 소복하게 내렸다. 그간의 노력이 직장을 찾는 이들에게 가냘픈 섶 하나만큼의 도움은 되었을까. 장애인에 대한 세간의 인식도 좋아지고, 여러 정책 지원 덕에 일자리를 찾는 일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여전히 차별은 있지만, 예전처럼 대놓고 차별하는 일도 줄었다. 기세 좋게 타오르는 화톳불은 아니어도 뭉근한 아궁이 속 장작불 정도는 일군 것 같아 그럭저럭 하뭇하다. 내세울 업적은 딱히 없어도 세상을 바꾸는 데 작은 불쏘시개 정도는 되지 않았을는지.

물이 끓는다. 솥뚜껑 아래로 휘파람 소리를 내며 첫 김이 터져 나온다. 어느새 장작은 다 타고 잉걸불만 남았다. 헤집어 고구마 너덧 개를 묻는다. 오랫동안 기다려준 가족들과 숯검정 입가에 묻혀가며 도란도란 군고구마 까먹는 작은 행복을 상상해 본다. 

■ 당선소감 / 우동섭

△ 수필부문 당선자 우동섭
△ 수필부문 당선자 우동섭

스스로를 연민한 나날 끝에

몸속 어딘가에 각인되어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최루가스 냄새 가득 밴 대학교 운동장에 서서 담벼락에 걸린 합격자 수험번호를 보았던 때가 그렇고, 벚꽃잎이 비처럼 내리던 날 아버지의 마지막 들숨소리를 들었던 때가 그렇습니다.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받은 순간도 어딘가에 새겨져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지역의 장애인 이용 시설 하나가 지방정부의 지원 중단 결정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대책을 의논하던 중에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큰 기쁨은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그런 순간에 찾아오나 봅니다.

지난해 여름, 직장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대단한 의지나 사명감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소박한 보람으로 지내 온 날들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허우룩하여 오래 잠을 설쳤습니다. 쓸모를 다해 밭둑에 내뜨려진 섶처럼 느껴져 스스로를 연민하였습니다.

그런 날들 끝에, 이렇게 너부러져 있을 것이 아니라 인생에 작은 매듭 하나를 지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살아온 이야기를 엮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남으로 난 창가에 서안을 놓고 앉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책상머리를 붙들고 있어도 글은 좀체 써지지 않았습니다. 기안문이나 보고서를 쓰는 일과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것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실망이 절망으로 변해갈 무렵, 문화 강좌에서 이상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가감 없는 비평과 조언이 문장과 구성을 다듬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함께 강좌를 듣는 문우들의 합평도 독자의 시선으로 제 글을 들여다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엉성궂은 글에도 언제나 칭찬으로 용기를 준 누나와 동생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신춘문예에 응모해 보라는 호들갑이 동기간의 바이어스가 걸린 평가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도전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의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 덕분입니다. 믿고 응원해 준 아내, 아들과도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부족한 글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투데이신문과 심사위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 나은 글을 쓰도록 정진하겠습니다.

■ 심사평 / 권남희 (수필가)

오랫동안 사람 돕는 일을 한 자화상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을 읽으면서 글쓰기의 평준화를 느꼈습니다. 문장력, 소재 선택, 형상화를 통한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본심에 오른 열두 분의 수필 25편은 무난한 문장력과 주제의 일관성, 의미부여 등 손색없는 실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춘문예라는 공모의 틀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니 무미건조하다는 약점도 보입니다. 관념어의 나열로 개인의 삶을 지나치게 일반화 논리로 억압하기도 합니다. 독자들을 갑갑하게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치열성은 문장 다듬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수필 쓰기도 N프로필 쓰기처럼 살아가는 이야기의 극적 구성이 필요합니다. 반전과 극복 이야기도 들어가야지요. 짧은 분량에 부모님 일대기를 채운다는 것도 무리입니다.

<스토리 쓰기>의 로버트 맥기는 수필가를 ‘극적인 이야기도 평범하게 만드는 천재들’이라고 평했습니다. 수필 장르가 반드시 평화롭고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만 노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동섭의 「섶」은 수필 쓰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이, 고추 등 농작물의 지지대 역할을 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다가 불쏘시개가 되는 섶을 통해 인생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섶」은 오랫동안 사람을 돕는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해온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김희철의 「우황」은 복선을 깔고 긴장감을 주는 형식으로 소설 한 편을 읽는 느낌입니다. 소의 담낭에 병이 들어 생긴 응결물 우황을 먹고 살아난 지체장애 3급의 형은 어머니에게 우황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칼을 벼려 소고기를 부위별로 잘라내는 작업을 긴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박신호의 「방주」는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지만 가장의 책임을 다한 아버지와 그 뒷바라지로 젊음을 삭힌 어머니에 대한 고찰입니다.

이제 AI가 글을 써주는 시대입니다. 땀 흘리는 사람의 손맛과 진정성이 높은 기록들은 문화유산으로 남겨져야 합니다. 이런 공모전을 통해 작가들을 키우고 열정을 주시는 투데이신문사에 감사한 마음을 올립니다.

당선 수필가 우동섭 님에게 축하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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