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여성공감 엮음·나영정 외 20명 지음│292쪽│138×210│와온│1만7000원

ⓒ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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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시설은 대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잠시 머무는 곳으로 이해되곤 한다. 역으로 말하면 자립할 수 없으면 떠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시설이라는 기제로 불평등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세상에서 이들의 ‘자립’은 기껏해야 열등한 수준으로 한계 지어지기 쉽다. ‘자립’의 의미가 주류의 관점과 기준에서 기획되는 한, 그런 자립은 ‘주류같이’ 되어야 한다는 동화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도달 불가능한 조건일 수 있다. (…) 자립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류와 소수자 사이의 분리되고 계층화된 세계가 종식되어야 한다. _198~199쪽

【투데이신문 김지현 기자】 장애여성공감이 엮고 나영정, 김순남, 김호수, 변미혜 등 21명의 필자가 함께 쓴 <시설사회: 시설화된 장소, 저항하는 몸들> 개정판이 최근 출간됐다.

이 책은 장애여성, 노숙인, 난민, HIV 감염인, 정신장애인, 비혼모, 탈가정 청소년 등 한국사회의 ‘정상성’에서 이탈한 이들의 삶의 장소를 조명한다.

한국사회는 보호와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시설에 가두고 권리를 박탈한다. 어디에서,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당연한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시설은 어쩔 수 없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끊임없이 설득하며, 무력하고 통제 가능한 몸을 만들어간다. 시설을 통해 시설 밖을 정상화하고, 지배권력을 유지‧강화하는 사회, 그곳이 바로 ‘시설사회’다.

장애여성공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소수자 집단의 활동가 및 연구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해왔다. 이를 통해 사회에서 배제되고 은폐된 존재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억압의 구조를 밝히고, 함께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왔다. 이 책은 그러한 교류와 연대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시설의 소규모화나 민주화가 아닌 전면 폐쇄를 요구하는 탈시설 운동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 책의 필자들은 ‘시설에서 나오는 것’만을 탈시설 운동의 목표로 삼아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애초에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이에게, 자신을 경계하고 차별하는 지역사회는 또 하나의 시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 장소로서의 시설을 넘어, 시설화를 추동하는 이 사회의 정상성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설사회>는 총 5부로 구성돼 있다. 1부 ‘가족(집)’, 2부 ‘도시’, 3부 ‘보호소’를 통해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시설이 한국사회 곳곳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보여준다. 4부 ‘담론과 제도’에서는 시설사회를 구축하는/무너뜨리려는 최근의 담론과 제도를 살펴본다. 마지막 5부 ‘저항의 현장’에서는 지금 이 순간 탈시설을 시도하고 살아내는 이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항의 방식을 고민한다.

저자들은 ‘불구不具’라는 말을 뒤집어, 각자가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 ‘불구不救’로서 서로를 알아보고 정체성을 넘어 연대하자고 제안한다. 서로의 운동이 교차하는 지점을 연대의 출발점으로 삼아, 시설이라는 폭력적인 운명을 함께 거부하자는 것이다.

탈시설을 고민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시설화를 당연시해온 사회에도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이 책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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