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극 <젤리피쉬> 출연 배우 김범진
관객이 느끼는 낯섦, 아직 숙제로 남아 있어
장애 예술인이 함께 하는 국립극단이 생기길
“떠올렸을 때 기분 좋아지는 배우 되길 바라”
【투데이신문 김민수 기자】 “나를 정의하는 건 키가 아니라 감정이다.”
왜소증을 가진 세계적 배우 피터 딘클리지가 남긴 말이다. 그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저신장 캐릭터 ‘티리온 라니스터(Tyrion Lannister)’를 연기하며 신체 조건이 아닌 연기력으로 전 세계 관객을 사로잡았다. 장애가 있어도 무대 위 주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장애 배우의 등장이 낯설기만 하다. 정부 차원의 변화가 시도되고 있지만 출연 기획, 무대 접근성, 제도적 기반까지 장애 배우들이 마주하는 벽은 높기만 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장애 배우는 ‘배우’ 이전에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는 존재가 되곤 한다. 무대에 서기 전부터 연기와는 무관한 시선과 사회적 편견을 마주한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정은혜 작가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비전문 배우로 작품 속 진심 어린 연기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여전히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장애인 캐릭터는 비장애인 배우가 연기하며 장애 배우는 무대 밖에서 머물러야 하는 현실이 반복된다. 하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무대를 만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연극 <젤리피쉬>는 최근 서울 충정로 모두예술극장에서 무대에 올랐다. 실제 다운증후군인 배우 백지윤이 주연을 맡아 다운증후군 여성의 사랑과 자립을 다룬 이 연극은 관객에게 감동을 주며 우리 사회에 다양성과 포용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극에서 조연이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보이는 인물은 도미닉이다. 그는 왜소증을 갖고 있지만 그 모습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또한 유쾌하고 단단한 연기로 갈등으로 어두워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극의 중심을 이어준다. 작은 체구였지만 큰 존재감을 지닌 도미닉을 연기한 사람은 바로 배우 김범진(34)이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연기를 해온 그는 왜소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작은 키는 캐릭터를 꾸미는 외적 조건 중 하나일 뿐 특별히 강조돼야 할 대상은 아니다. 그는 자신을 ‘장애인 배우’로 소개하기보다 무대 위에서 관객과 감정을 주고받는 한 사람의 배우로 기억되길 바란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그의 연기 인생과 장애 예술인의 현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그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김범진 배우를 직접 만나봤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올해로 연기를 시작한 지 10년째 된 배우 김범진이다.
Q. 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는 개그맨을 꿈꿨다. 개그도 결국 연기가 바탕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연기에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 코미디 연극을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무대가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연극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렇게 연기에 빠져들게 됐다. 이후 연극 관련 학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게 됐다.
Q. 연기할 때 본인만의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외적으로 캐릭터성이 강한 편이다 보니 다소 판타지적인 설정의 인물에도 자신감이 있다. 또 특이한 음색을 가지고 있어 그 자체로도 캐릭터에 개성을 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Q. 연기를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
아무래도 관객을 만났을 때가 가장 보람차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에서 박수를 받는 순간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이 든다. 또 관객들의 반응을 직접 마주할 때면 더없이 뿌듯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Q. 장애를 가진 배우로서 연극 무대에 서기까지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아무래도 장애가 있다 보니 무대에 섰을 때 장애를 많이 접해보지 못한 관객들이 느끼는 낯섦이 전해지곤 한다. 그게 싫다기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상황을 계속해서 마주해야 한다는 점은 아직까지도 숙제로 남아 있는 것 같다.
Q. 어려운 순간이 있었을 때 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관객들의 반응은 물론이고 함께하는 동료들에게서도 큰 힘을 얻는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특히 무대 위에서 상대 배우를 믿고 함께 호흡하며 연기할 때 느껴지는 에너지와 신뢰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원동력이 된다. 연습이나 공연 뒤에 서로 조언을 주고받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큰 힘이 된다.
Q.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봤을 때 ‘참 잘해왔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2~3년 동안은 금전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다른 일을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많이 했었다. 진로에 대한 불안도 컸다. 그럴 때마다 돈을 떠나 크든 작든 공연 무대에 서려고 애썼다. 어떤 형태든 연기를 계속하려고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런 기회들과 순간들이 참 소중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계속 무대에 서려고 했던 선택이 참 잘한 일이었다고 느낀다. 만약 그때 돈만 보고 판단했다면 아마 지금쯤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Q. 장애 예술인을 위한 제도나 지원이 연극계나 예술계에 어느 정도 마련돼 있다고 느끼는지. 또 실제로 도움이 된 적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많은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 예술인을 위한 지원 사업이 해마다 정부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연극 <젤리피쉬>가 상연된 모두예술극장 자체도 장애 예술인을 위한 전용 극장이다. 이런 극장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 사회가 이전보다 다양성과 포용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전에 ‘장애예술인 창작활성화지원 사업’에 선정돼 창작 지원금을 지원받아 1인 창작진으로 공연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연장과 연습실을 구하는 일부터 일정 조율까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스케줄이 도저히 맞지 않아 아쉽게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스케줄 문제로 지원받진 못했지만 이와 같은 지원 사업이 장애 예술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Q. 현재 제도적인 지원 외에도 장애 배우들이 활동하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개인적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전용 극단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마치 ‘국립 장애인 극단’처럼 말이다. 지금은 장애를 가진 배우들이 각자 힘을 모아 소규모 극단을 꾸려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국립 단위의 장애인 극단이 생긴다면 장애 배우들이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을 것이고 더 많은 무대 경험을 쌓을 기회도 생길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국립극단에서도 장애인 배우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주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더 많은 장애 예술인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을 것 같다.
Q. 연극 무대가 주로 대학로 소극장 중심으로 이뤄지다 보니 장애가 있는 배우나 관객에게는 공간 접근성에서 많은 제약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건 이해한다. 모든 극장이 장애인 배우나 관객이 접근하기 쉽도록 바뀌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몇몇 극장을 지정해서 아예 장애 접근성이 보장된 시설로 만들어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의 모두예술극장처럼 의미 있는 공간이 생긴 건 반가운 일이다. 다만 이런 극장이 다른 지역에도 더 생겨서 장애 예술인이나 관객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면 훨씬 좋을 것 같다.
Q. 장애인 배우로서 대중에게 다가가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생각보다 크게 어려운 점은 없다. 대중이 처음에 느끼는 낯섦이나 반응은 이제 어느 정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됐다. 그 순간이 어렵게 느껴지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인정하며 넘기고 있는 것 같다.
Q. 장애를 주제로 한 연극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장애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연극을 포함해 여러 분야에서 장애를 구분 짓고 거리를 두는 경향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연극이 가진 메시지와 영향을 가까이서 느껴보니 장애와 삶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고 결국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Q. 연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혹은 연기를 통해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싶은지.
물론 배우로서 자신을 알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바라는 건 내 무대를 지켜보는 분들이 어느 순간 장애라는 걸 잊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외적으로 눈에 띄는 편이지만 함께 있다 보면 ‘결국 우리와 다르지 않네’, ‘네가 장애인인 줄 몰랐어’와 같은 자연스러운 반응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이 참 좋으며 이 일을 계속해 나가는 이유가 되는 것 같다.
Q. 꿈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은 것 같다. 지금도 비슷한 이유로 꿈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 있다면.
포기하는 것에도 분명히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어떤 일을 포기했다면 그 선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포기를 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다. 그저 하려고 했던 어떤 것을 내려놓은 것이므로 그만큼 더 책임감을 갖고 다음을 살아가야 한다고 본다. 단순히 ‘포기했다’는 이유로 앞으로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삶 자체가 조금은 더 부드럽고 단단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Q. 현재 출연 중인 연극 <젤리피쉬>가 각박한 현대 사회 속에서 가슴 따뜻한 내용으로 감동을 주며 호평받고 있는데 극의 간단한 줄거리와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작품은 ‘켈리’라는 20대 다운증후군 여성이 비장애인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임신과 출산을 앞두게 되면서 어머니와 함께 사회적인 고민과 갈등을 겪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연극을 보며 장애를 가진 사람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했을 법한 고민과 상황들이 더욱 깊이 있게 다가온다.
특히 다운증후군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됐을 때 그 안에서 생겨나는 걱정과 불안은 분명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문제들을 풀어가는 과정은 결국 모든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 역시 이 이야기를 보며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Q.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나 작품이 있는지.
따뜻한 역할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면서 그 안에서 같이 싸워주는 그런 인물 말이다. 단순히 대사나 행동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캐릭터를 맡아보고 싶다. 인간적인 면모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역할을 통해 관객에게도 그런 따뜻함이 전해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Q.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배우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이야기해 준다면.
배우로서는 ‘김범진’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괜히 미소 지어지는 그런 배우로 기억됐으면 한다. 작품 속 모습이든, 무대에서든 편안하게 스며드는 사람. 떠올렸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배우였으면 좋겠다.
사람으로서는 그냥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며 소소하게 살고 싶다. 사회에서 뭔가 대단한 걸 이루는 것보다 내 자리에서 살아가면서도 나름의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