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lt;젤리피쉬&gt; 공연 장면. [사진제공=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옥상훈]<br>
연극 <젤리피쉬> 공연 장면. [사진제공=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옥상훈]

【투데이신문 최두진 객원기자】 극장에 들어서자, 무대가 달랐다. ‘ㄷ’자 형태의 관객석, 무대는 가운데 놓여 있었다. 배우와 관객 사이엔 그 어떤 벽도 없었다.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 이것은 단순한 무대 배치가 아니었다. 연극은 시작 전부터 관객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경계를 허무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갑니다’라고.

공연 전에 프로그램북을 먼저 읽었다. 장애예술, 배리어프리, 릴렉스드 퍼포먼스, 프롬프터 같은 단어들이 설명돼 있었다. 알고 본 덕분에 이해는 훨씬 깊어졌지만, 그렇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이 연극은 설명보다 감정으로 먼저 다가왔고, 장치보다 사람이 앞섰다. 이것은 준비된 연극이 아니라, 준비된 마음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주인공 켈리는 다운증후군을 지닌 27세 여성이다. 이 역할을 맡은 백지윤 배우 역시 실제로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켈리를 연기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 선 건 ‘연기된 켈리’가 아니라, 켈리 자신이었다. 딕션이나 성량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감정은 분명했고, 진심은 충분했다. 그녀 곁에는 프롬프터가 조용히 움직이며 대사를 전달했고, 심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든든한 동반자처럼 함께 있었다. 이 연극에서 프롬프터는 단순한 보조 수단이 아니었다. 하나의 역할이었고, 하나의 감정선이었다.

이야기는 켈리의 자립으로 시작된다. 엄마의 보호 속에 살던 켈리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선택하려 한다. 닐과의 연애는 그 출발점이었다. 남자친구 닐은 비장애인이다. 이라 공연에서는 이휘종 배우가 닐을 연기했다. 조심스럽고, 따뜻한 인물이었다. 그는 켈리를 연민으로 보지 않았다. 동등한 사람으로 바라봤다. “같이 키우자.”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 닐은 그렇게 말했다. 이 대사는 단지 극적인 감동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 어떻게 사람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는지를 보여주는 문장이었다.

정수영 배우가 연기한 엄마 아그네스는 복잡한 인물이다. 딸을 사랑한다. 딸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동시에, 그 딸이 자신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려워한다. 보호와 억압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아그네스는 그 경계에서 흔들리다가, 끝내 딸의 선택을 인정한다. 그 장면은 묵직했다. 현실적인 감정이었고, 동시에 한 부모의 용기였다.

연극 &lt;젤리피쉬&gt; 공연 장면. [사진제공=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옥상훈]<br>
연극 <젤리피쉬> 공연 장면. [사진제공=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옥상훈]

이 연극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는 도미닉이다. 조연이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범진 배우는 짧은 장면마다 명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도미닉은 유쾌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감정의 중간 지점을 붙잡고 있는 단단함이 있다. 켈리와 닐 사이, 혹은 아그네스와 켈리 사이에서 갈등을 조율하는 인물. 그는 단순히 등장하는 장애인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의 사람’으로 그려졌다.

켈리는 선택한다. 아이를 낳겠다고. 그 선택은 단호했고, 동시에 두려웠다. 임신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녀도 흔들렸지만, 남자친구 닐은 함께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닐의 진심은 아그네스를 움직였다. 결국 아그네스는 딸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응원하게 된다. 이 장면들은 장애 여부를 넘어선 인간 관계의 진심을 조용히 보여준다.

공연 마지막, 켈리는 해변에 선다. 엄마와 함께 걷는다. 그 바닷가에서, 커다란 해파리 한 마리가 밀려온다. 젤리피쉬. 물렁하고 투명하지만, 자신만의 방향을 가지고 바다를 유영하는 생명체. 켈리는 자신이 바로 그 해파리 같다고 느낀다. 이제 보호의 껍질을 벗고, 자신의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존재. 이 연극은 그 아름다운 자립의 선언으로 마무리된다.

<젤리피쉬>는 단지 장애인의 자립을 다룬 연극이 아니다. 이 작품은 ‘차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연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냈다.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이다.

이 연극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닿기를 바란다. 이 작품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경계와 편견이 조금 더 느슨해지기를. 편견 없는 시선이, 누군가의 자립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 더 많이 이야기되기를. 그래야 비로소, 사람 사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연극 &lt;젤리피쉬&gt; 포스터. [자료제공=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김윤희]
연극 <젤리피쉬> 포스터. [자료제공=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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