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건진법사 신당 압수수색에 관한 <중앙일보>의 기사에서 일제강점기 한국 무속이 일본 신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논조다.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무속에 대한 정책에만 초점을 맞추고, 실제 무당의 종교적 정체성에 대한 검토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한국 무속을 신토(神道)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 것은 맞다. 조선총독부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굿이나 마을 제사를 엄격하게 금지했고,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통치’라고 평가받는 온건한 정책을 전개했을 때 숭신인조합(崇神人組合)을 비롯한 무당들의 조합을 용인하면서 그 대가로 신토의 주신인 아마테라스를 존숭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총독부가 무속을 강력히 억압했던 이유는 다양하다. 식민지 조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했고,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무속을 미신으로 규정했고, 그 의도 속에 민족정신의 말살이 있었을 수 있다.
문제는 무당들이다. 일제강점기 무당들도 나름대로 생각과 야망과 종교관이 있고, 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표출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의 무당에게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당대 무당들 가운데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따른 사람도 있었고, 이것을 반대한 사람도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따른 한국 무당들은 천신(天神)을 존숭하는 신격 중 하나로 모시기 때문에 태양의 신이자 하늘의 신인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을 수 있다. 반대로 따르지 않은 무당들은 민족 정체성 때문에, 또는 무당 각자가 자신의 몸주신이 있고 그 신에 대한 무당의 신앙심이 강하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문제는 한국 무당 가운데 여전히 아마테라스를 몸주신으로 모시는 한국 무당의 존재 유무 파악이 문제다.
적어도 종교문화사를 연구자로서 필자는 아마테라스를 몸주신으로 모시는 무당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다른 신격으로 가장하고 몰래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무당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무당이 될 때 자신의 몸주신을 정확히 찾고 그 신령을 받아 모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혹시 소위 잡신(雜神)을 몸주신으로 모실 경우 성공한 무당, 소위 “불리는” 무당이 될 수 없고, 그러한 신을 모신 무당의 삶도 피폐해질 수 있다.
건진법사와 일본 종교 사이의 연관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일광(日光)’이라는 이름이다. 과거 일광법사가 주관한 굿에 가죽 벗긴 소를 제물로 사용했다는 의혹에서 “건진법사의 소속이 ‘일광조계종’이라는 이름의 종단”이라는 기사가 등장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중앙일보> 기사에 공천개입 관련 압수수색 장소 중 하나로 충주에 소재한 ‘일광사’라는 곳도 등장한다. 일광조계종은 이름만 들으면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한 교파 중 하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일광조계종은 무속 조직이다. 실제로 불교 교파처럼 보이는 이름을 앞세우고 활동하는 무당들은 많다.
또한 한국 불교와 무속에서 ‘일광’이 아주 어색한 말은 아니다. 칠성여래(七星如來)의 양옆에 있는 보살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고, 대일여래(大日如來)는 부처의 여러 위격(位格) 중 하나다. 또한 무속의 무가(巫歌)에서 ‘일광보살’과 ‘일광제석’이라는 위격이 등장한다. 그런데 ‘일광’이라는 용어가 한국 불교와 무속에서 널리 통용되는 용어도 아니다. 일광보살이 보좌하는 칠성여래는 불교, 도교, 무속이 습합(習合)하면서 생긴 부처의 위격이고, 사찰에서 칠성여래가 봉안된 전각(殿閣)인 칠성각 역시 불교와 무속이 습합(習合)하면서 생긴 한국의 독특한 전각이다. 또한 무당이 자신의 이름이나 신당의 이름에 ‘일광’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일광이라는 말이 ‘태양의 빛’이라는 뜻이고, 일장기의 가운데 붉은 원이 태양을 상징하며, 아마테라스가 태양의 신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일광’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 오히려 일본의 신격을 향한 신앙심의 상징일 가능성이 높다.
필자의 생각에 건진법사의 종교적 정체성은 다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무당의 외피를 두른 신토의 신자거나 종교인일 수 있다. 사찰이나 무속의 신당 형태로 신사(神社)를 만들고, 신토의 종교인 대신 무당으로 행세하면서 신토 신앙을 이어갔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신사처럼 도리이(鳥居. 신사의 입구에 “开” 모양의 구조물)를 비롯한 각종 구조물을 만들기 힘들고, 겉으로 무당인 척하면 내담자를 받아서 점이나 굿으로 수입을 창출하고 인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기사대로 건진법사가 아마테라스를 몸주신으로 섬기는 한국 무당일 수 있다. 무당은 자신이 모시는 몸주신을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당이 모신 신령을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다른 무당의 신령을 잘못 지적했다가 무당 사이에 큰 마찰이 일어날 수 있다. 무당이 모여 있을 때 무당들이 서로의 신령을 감응하고 공감하는 것이 무당이 제대로 된 신령을 몸주신으로 모셨는지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이 과정에서도 많은 싸움이 일어난다. 이것은 무당이 모시는 몸주신이 천신이건 조상신이건 맥아더 장군이건 아마테라스건, 그 신령의 실체나 진위를 파악하기 어렵고, 건진법사가 “나, 아마테라스 모시는 한국 무당이오!”라고 주장하면 비난은 할 수 있지만 반박은 거의 힘들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수사를 받는 건진법사의 모습을 보면, 잘못된 신령인 아마테라스를 몸주신으로 섬긴 한국 무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건진법사가 제대로 무당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신내림을 받지 못한 가짜 무당일 가능성도 있다.
건진법사와 아마테라스 관련 보도는 한국 언론이 한국 종교에 관해 얼마나 모르는지, 그리고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담자를 위로하고 신을 향해 정성을 올리는 무당들이 우리와 공존한다. 윤석열-김건희 부부와 건진법사의 각종 범죄 의혹, 그리고 빈곤한 지식으로 기사를 쓰는 기자들로 인해 선량하게 사는 무당들이 피해 보는 일은 없길 바란다.
참고로 무당도 무당이기 전에 한 인간이기 때문에 나름의 정치적 성향이 있고, 그 정치적 성향을 실천할 때 본인의 직업을 동원한다. 10.29 참사, 채해병 순직 사건, 윤석열의 계엄 선포와 탄핵, 구속이 발생했을 때 무당 중 일부는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고 심지어 영적 전쟁의 성격도 보였다. 물론 현재 상황이 무당의 영적 전쟁의 결과라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무당들 역시 생업이 있고 시국에 관한 생각이 있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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