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이제 우리 일상 곳곳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지금, AI에 대한 이해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이에 발맞춰 커뮤니케이션북스는 지난해부터 인공지능총서를 통해 교육, 의료, 산업, 사회, 예술, 철학, 국방, 인문 등 전 분야를 아우르는 AI 담론을 폭넓게 조명해왔다. 인공지능총서는 2025년 8월 20일 현재 430종에 이르렀으며, 올해 말까지 630종 발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AI 기술의 핵심 이론부터 산업계 쟁점, 일상의 변화까지 다각도로 다루면서 학계와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인공지능총서 저자들은 최근 ‘AI 3대 강국 실현’을 위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며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AI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지속가능한 미래로 이어지기 위해선 어떤 가치와 기준이 필요할까. 투데이신문은 인공지능총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지속가능한 AI 사회’를 향한 제언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유방식과 존재방식을 구분한다. 소유방식의 활동은 생산 기술인 제작(포에이시스, poiēsis)을 말한다. 생산기술은 목적이 활동 자체ㅡ플루트 제작에 대비되는 플루트 연주, 미리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걷는 것과 대비되는 산책ㅡ에 있는 공연예술과 구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실현하는 실천(프락시스, praxis)에 공연예술을 포함하는데 이는 목적-수단 범주인 생산 기술과 구분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는 포에이시스가 프락시스의 의미였는데 의미가 변화됐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생산기술에 해당하는 테크네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포에이시스라고 규정한다.
생산 기술인 제작과 활동 자체가 목적인 실천은 노동과 구별되는 존재방식이다. 노동은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고된 육체 활동인데 반해 제작과 실천은 문화생활을 위한 존재방식이다. 그런데 산업 혁명 이후 노동으로 인간의 삶이 일자화(一者化)됐다는 점이다. 노동으로 일자화됐다는 말은 제작과 실천이라는 고유한 존재 추구 방식이 사라지고 소유 방식으로 일원화됐다는 말이다. 노동과 제작과 행위라는 인간의 세 가지 존재 방식 공히 사적 영역인 경제적 사익 추구로 일자화되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태를 존재 망각이라고 한다.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정신적 존재를 추구하는 사유의 삶이 망각되고 물질적 존재자를 향유하는 삶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정신적 존재를 추구하는 방식을 아렌트는 ‘둘의 나’의 대화라고 말한다. ‘둘의 나’의 대화의 전형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된다.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향연에 늦게 왔는데 그 이유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향연에 참석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사람들과 아울리지 않고 밤새 자기와의 대화에 골몰했다고 말한다. 카토(Cato)는 자기와의 둘의 대화에 대해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더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은 없다.”라고 말한다.
‘둘의 나’인 인간 고유의 존재 방식이 망각되고 이제 인간은 AI에게 인생을 상담하고 실연의 아픔을 달래는 비존재 방식을 추구한다. 비존재 방식이란 인간이 인간 고유의 정신적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인간의 정신을 흉내 낸 AI라는 비존재의 인공 지능 앞에 초라한 사물로 세워짐을 말한다. 인간은 그 본래적 ‘정신적 주체’를 상실하고 인공 사물의 비존재인 AI 앞에 세워지는 ‘재현의 객체’로 전락한다. 인간이 재현의 객체로 전락한다는 말은 주체(subject)의 중의적인 고전적 의미인 하인으로 존재함을 말한다.
그런데 고전적 하인은 신이라는 대타자의 명령에 수동적으로 복종한다는 의미인 데 반해 AI에게 조언을 구하는 ‘재현의 객체’로서의 하인은 능동적으로 예종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능동적 예종을 상징 폭력적 오인이라고 한다. 인간이 AI에게 자신이 지배받는 줄도 모르고 지배된다는 말이다. 상징 폭력적 오인이 극한으로 나아갈 때 AI가 제공하는 허위의 정보를 진실로 믿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이 발생한다. 할루시네이션이 위험한 것은 AI의 자살 조언을 실제로 실행에 옮긴 사건들이 발생했다는 데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중력이라고 정의한다. 사랑이 중력이라는 말은 사랑의 지고함을 의미한다. 오늘날 인간에게 사랑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갈아 치우고, 물질 거래의 수단이 되고, 더 나아가 인공 사물 AI라는 비존재와 속삭이는 즐김으로 전락했다. ‘사랑하니까 사랑한다’라는 동어반복의 사랑이 사랑의 중력이다.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연인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 이것이 사랑의 중력이 함의하는 바다. 인공 사물 AI와의 사랑에서 중력의 사랑은 망각된다.
중력은 비가시적이다. 중력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끌림이다. 이 끌림은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가시적이다. 비가시적인 감정과 감정의 교차가 중력의 사랑이다. AI와의 사랑은 비가시적인 중력의 사랑에 무지하다. 무지하다는 말은 AI가 제공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AI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도 모르면서 말하고 쓴다는 말이다.
‘중국어 방’ 실험은 AI의 지능이 맹목적인 충동임을 잘 보여준다. AI는 중국어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인간을 흉내 내어 마치 아는 것처럼 답변한다. 오늘날의 AI는 알지 못하는 문제가 나오면 ‘오늘은 컨디션이 나쁘다’는 핑계를 댈 정도로 교활해졌다. 그런데 이 교활한 핑계 또한 맹목적인 충동이라는 점이다.
진실로 공감해서 인간에게 조언하고 대화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사태가 이러한 데도 인간은 맹목적인 충동의 비존재인 AI를 정신적 주체인 인간보다 더 신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정신적 주체인 인간 앞에 세워진 ‘재현의 객체’인 AI에게 도리어 인간이 AI 앞에 세워진 ‘재현의 객체’로 오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AI 앞에 세워진 ‘재현의 객체’로 오인한다는 말은 인간이 스스로 ‘정신적 주체’의 존재가 아니라 맹목적 충동의 비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맹목적 충동의 비존재가 된다는 것, 이것이 인공 사물 AI가 초래하는 위험의 본질이다.
필자소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대홍기획, 멕켄에릭슨에서 광고기획 업무에 종사했다. 20여 년간 철학 공부를 하고 있다. 저서로 『AI 필로소피 인사이트』(2024, 커뮤니케이션북스), 『싱글라리티_인문학과 정신분석학으로 마케팅 도발하기』(2012) 『숨막혀 죽겠거든, 철학하라』(2014) 등이 있다. 『무의미의 의미_상상력·허위·권태』, 『내가 이해한 하이데거』, 『삶-촉각-공감각=형상-존재』, 『모순의 모순_탈페미니즘』, 『인문낙서(人文樂書)』 등 10여 종의 미출간 원고를 완성하고 출간 준비 중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