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감독 기능 분리 구상, 정치·시장 갈등 속 ‘속도 조절’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 무산…금감원 자체 혁신 ‘시험대’
【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금융당국 개편 논의가 결국 멈췄다. 정부와 여당, 대통령실이 수개월간 추진해온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기능 재편 구상은 격론과 갈등 끝에 중단됐다. 정책과 감독 기능을 분리하고 금융소비자보호원을 신설하려던 계획은 ‘조직 안정’이라는 현실적 판단 속에서 보류됐다. 경기 둔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우려,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 등 복합 요인이 이번 결정을 이끌었다.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당정대(정부·여당·대통령실)는 전날 정부조직법 개정안에서 금융당국 개편 조항을 전면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금융위는 정책·감독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금감원은 기존 특수법인 지위를 이어가게 됐다. 그간 금융위 일부 기능을 재정경제부로 이관하고 금감원 감독권을 분리하며 금융소비자보호 전담 기구를 신설하려던 안은 모두 무산됐다.
매번 좌초된 금융당국 재편…시장 혼선 ‘장애물’
이번 개편 철회의 가장 큰 배경은 정치적 난항과 금융시장 불안이다. 실제 야당은 금융당국 재편을 ‘기재부 권한 강화’로 규정하며 강하게 반대해왔다. 실제로 개편안이 국회에 제출되면 필리버스터까지 불사하겠다는 입장까지 내비쳤다. 여당 내부에서도 금융시장 안정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시장에서는 감독 공백과 혼선을 가장 큰 리스크로 봤다. 금융위·금감원의 권한을 쪼개고 새 조직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책과 감독의 연속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특히 경기 둔화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우려가 겹친 상황에서, 감독기관의 불안정성은 곧 시장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현실적 우려가 당정에 작용했다.
한편 금융당국 개편 논의는 우리 금융정책사의 반복된 화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감독체계 전반에 대한 개혁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정책은 금융위, 감독은 금감원’이라는 이원적 체계가 자리 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체계가 정책과 감독의 책임소재 불명확, 기능 중복, 정책·감독 충돌이라는 문제를 낳았다. 이번에도 같은 문제가 지적되며 개편 논의가 불붙었지만, 결과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흐지부지됐다.
과거 2000년대 후반 금감원을 준정부기관으로 지정하려는 방안, 2010년대 초·후반 금융위와 금감원의 권한 조정 논의, 최근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 논의 모두 정치적 갈등과 시장 안정 우려로 결국 무산됐다.
이처럼 금융당국 개편 시도는 어느 정부에서든 되풀이됐지만, 늘 ‘효율성 제고’와 ‘감독 독립성 훼손’이라는 상반된 명분 논리에 부딪혀 좌초된 셈이다.
단기 안정 확보, 장기적 구조 과제는 ‘여전’
이번 백지화 결정으로 금융시장 안정과 내부 직원들의 불안 해소라는 단기적 성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는 금융정책과 감독 기능 경계 불분명, 소비자 보호 미비, 감독기관 투명성 부족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무엇보다 감독기관이 시장에서 독립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크다.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 감독 권한이 동원되는가 하면, 감독결과가 정책 과정에 반영되지 못하는 사례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 무산으로 별도의 기구는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소비자 권익 보호는 여전히 강화해야 할 핵심 영역으로 꼽힌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금감원은 자체적인 쇄신을 선택했다. 금감원은 내주 초 조직 운영 혁신 방향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번 발표에는 감독·검사 활동에 대한 반성과 성찰, 내부 조직문화 개편, 공공성과 투명성 강화, 그리고 소비자 보호 기능 확충 방안 등이 포함될 전망이다. 다만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제도 개혁책보다는 중장기 로드맵 성격의 대략적 방향이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번 결정을 단기적 상황 관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장기적 구조 개선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소재 한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는 “시장 안정이나 소비자 보호라는 본질적 목적보다 정권 운영 논리에 따라 논의가 흘러가면서 구조적인 문제는 여전히 방치되고 있다”며 “무엇보다 감독기관이 공공기관 지정 여부로 흔들리는 나라는 선진국 중 찾아보기 어렵다. 독립성 보장을 출발점으로 제도의 정교화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조직 설계가 아니라 기존 제도의 작동력을 높이는 것”이라며 “소비자 보호 강화, 감독 투명성 제고, 금융위와 금감원 간 명확한 역할 구분은 법적 장치와 운영 프로세스 개선으로도 충분히 달성 가능하다”고 짚었다.
이어 “백지화 이후 금감원의 자체 혁신이 단순한 현상 유지가 아니라, 근본적 개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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