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가정 청년 2인 인터뷰...그들의 ‘삶’을 묻다
‘이방인·셋방살이’ 벗어나고자 성년 이후 자립
세 단어로 표현한 한가위...혼자·막막함·고립
그럼에도 지킨 꿈...탈가정 당사자 도움주고파
【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벼가 노랗게 무르익고 집집마다 음식 냄새가 피어오르는 계절. 가을의 시작을 여는 한가위는 오랜 역사 속에서 풍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2025년 추석은 주말 사이에 적절히 위치해 ‘역대급’ 장기간 연휴로 알려져 연초부터 전국민의 기대를 받았다.
먹거리와 이웃 간 인심이 넉넉해지는 이 시기면 우리 국민이 떠올리는 장면들이 있다. 뒷짐을 지고 부지런히 부엌으로 향하는 발걸음, 상다리가 휘어질 듯한 진수성찬, 커다랗게 떠오른 보름달, 아이들의 재롱과 웃어른의 설교까지. 전통과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족’이란 명절 풍경에 빠뜨리기 어려운 단어다.
명절은 한국 사회가 정상 가족을 절대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인식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시기 중 하나다. 미디어에서는 항시 명절 특선 가족 콘텐츠를 상영하고 온라인에는 가족 갈등을 비롯한 갖가지 일화들이 범람한다. 귀성길로 꽉 막힌 도로는 ‘모두가 가족의 품으로 향한다’는 사회적 통념을 나타낸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 풍경에 소속돼 있지는 않다. 누군가에게는 이렇다 할 고향이 없고, 혹자에게는 찾아갈 가족이 없다. 어떤 사유로든 더 이상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기로 한 이들도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이유가 다르다는 유명 소설의 첫 문장처럼 이들이 예외가 된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명절은 여전히 가족 중심 질서를 전제로 두지만 그 틀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은 좀처럼 주목받지 못한다. 이들의 선택과 삶에는 각기 다른 이유와 감정이 얽혀 있으며, 그만큼 복합적인 사회적 맥락이 존재한다. 정상성의 경계를 확장하고 다양한 삶의 형태를 포용하려는 논의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 있다.
투데이신문은 추석을 맞아 더는 스스로를 불행 속에 방치하지 않기로 결심한 두 탈가정 청년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여기서 탈가정 청년이란 폭력·방임·학대·갈등 등의 이유로 가정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가족 관계를 단절한 청년을 의미하며, 인터뷰는 당사자들의 요청에 따라 가명(수지·성환)을 사용했다.
삶의 고향, 집...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방임과 폭언을 비롯한 모든 인간적이지 않은 대우. 스물넷 수지씨와 성환씨가 집을 떠나오게 된 이유에 대해 입을 모아 말했다.
“이 집에서는 내가 이방인이구나 싶었죠.” 수지씨는 자고 일어나 방문을 열면 펼쳐지는 풍경, 자신을 빼놓고 식사하고 있는 부모가 가장 심적으로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것은 식구(食口)라는 정체성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일이었다.
자식을 투명인간처럼 대하는 부모의 언행에 수지씨의 친언니는 이미 집을 나간 뒤였다. 수지씨는 그가 둘째 딸이었던 자신보다 부모의 폭언과 폭행에 장녀가 더 많이 노출됐으리라고 담담히 유추했다.
4만원과 카메라 장비. 집을 나올 당시 수지씨가 수중에는 그들이 전부였다. 그는 온라인으로 만난 지인들에게 거처와 식사를 빚지며 사진 촬영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렇게 가진 것은 후련하지만 불안한,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최근 부모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성환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스로의 유년기에 대해 ‘셋방살이’ 같았다고 회상했다. 어머니의 아들로서 그의 역할은 청소와 빨래, 설거지 담당이었으며, 아버지는 그를 폭력의 대상으로 삼았다.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 장소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만 19세 겨울, 새로운 집을 찾기 위해 과거를 벗어나기로 했다.
발길 닿은 적 없는 타지로 향했다. 학자금 대출로 나쁘지 않은 대학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최근 학창시절 받았던 학대에 대해 소송을 진행해 승소했다. 드디어 절연을 하다니. 마치 염전 노예 신분으로부터 탈출한 것 같다. ‘가족 탈출기’를 이뤄낸 그의 감상평이었다.
한가위의 중심, 홀로서기한 그들의 ‘긴긴 명절’
독립적인 성향의 지수씨도 열흘이나 되는 이번 명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다고 털어놨다. 이십 대 초반의 지수씨는 일을 하면서 연휴를 보냈지만 이번 휴일에는 일하던 사업장들이 문을 닫기 때문에 계획이 틀어졌다는 설명이다. 그는 친한 친구에게 농담조로 할머니댁에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가 거절당한 경험도 있다며 자조했다.
성환 씨는 금전적 부담으로 끼니를 거르다 냉장고에 있던 주인 모를 삼각김밥을 꺼내 먹은 일이 발단이 돼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이를 계기로 자립지원관을 통해 도움을 받아 현재는 LH 전세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있지만 친구 없이 홀로 지내는 생활은 종종 쓸쓸함을 안겼다.
그는 “기숙사에 살 때는 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않은 친구와 함께 식사하고 어울릴 수 있었다”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이어 “혼자 있다 보면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가 많은데, 명절처럼 친구도 만날 수 없이 고립되는 시기에는 불안한 마음이 특히 커진다”고 덧붙였다.
혼자. 막막함. 고립. 그들의 명절을 함축한 단어들이다. 아물지 않아 공유할 수 없는 아픔과 상처가 탈가정 청년들을 뿔뿔이 흩어놨다.
명절에 어디를 향하냐는 질문 자체가 상처를 건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수지씨와 성환씨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서로 자립을 한 이유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은 탈가정 청년들의 불문율이 됐다.
폭력의 연속...사회 진입의 첫걸음도 어렵다
또래 관계에서 존재하는 ‘불문율’과 우리 사회에 짙게 깔린 사회적인 편견은 탈가정 청년들에게조차 서로를 편하게 대하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정폭력에 장기간 노출된 탈가정 청년의 경우, 정신적·사회적 성장이 또래에 비해 더딘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유년기부터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규칙이나 의사소통 방식을 학습하지 못한 데 따른 결과다.
사회 문제 당사자들의 심리·정서적 자립을 돕는 사회적기업 282북스의 강미선 대표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가정폭력의 트라우마는 사람을 정서적으로 몰아간다”며 “이 트라우마가 해결되지 않으면 건강한 관계를 맺거나 삶을 계획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282북스를 운영하며 만난 탈가정 청년 10명 중 8명은 가정폭력 경험과 학교폭력 경험이 동시에 있다고 증언했다. 이같이 연속된 폭력 경험은 추후 직장 내 괴롭힘으로까지 이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강 대표는 “명절이 다가오면 4주 전부터 282북스가 운영하는 탈가정 청년 커뮤니티에 정신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글들이 올라온다”며 “서로 지지해 주는 환경이 있으면 어려움을 잘 견딜 수 있겠지만, 이분들은 주변에 탈가정 사실을 얘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강조했다.
경제적 자립의 문제도 심각하다. 강 대표는 “탈가정 청년과 청소년들이 집을 나오는 시점에 자립 준비가 돼 있는 사례는 10%도 되지 않는다”며 “대부분이 긴급한 상황 속에서 집을 나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꾸려갈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들은 당장의 생계를 위해 단기 일자리에 매달리며, 장기적인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282북스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탈가정 청년 지원 조례안을 서울시에 제안했으나 해당 안건은 의회에서 매 회기마다 계류되고 있다. 탈가정 청년의 수가 정확히 집계되지 않아 제도적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강 대표는 탈가정을 한 청년들의 수를 정확히 집계하면 청년들의 고립·은둔 문제가 일부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아울러 탈가정 청년들이 더 많은 목소리를 내줄 필요성이 있다고도 강조했다.
집 밖에서 발견한 꿈...가장 빛나는 자립을 향해
열악한 현실과 통계 속에서도 그들은 끝없이 꿈을 꾼다. IT 기업 입사를 꿈꾸는 성환씨는 대한민국 시스템 반도체 분야가 전 세계를 선도할 수 있도록 혁신을 주도하고 성장 동력을 만들고 싶은 유망주다. 최근에는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최근 수지씨는 탈가정을 경험한 청소년과 청년을 위해 공개된 공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리우스’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정보를 얻고 희망을 품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시리우스’는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별 중 가장 밝은 천체로, 동시에 항성 진화의 마지막 단계인 백색왜성이기도 하다. 백색왜성은 핵융합이 멈춰 더 이상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며 차차 식어가는 별이다.
수지씨는 “블로그를 찾아오는 탈가정 친구들에게 ‘다 타 버린 별이라도 밝게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말해주길 바라고, 그게 나여도 좋을 것 같다”며 웃었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직접 말한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과 위험에 닥쳐도 언제나 도움을 주는 사람은 다가오기 마련이라고. 포기하기에는 이르고,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아직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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