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기능경기대회 출전을 앞둔 특성화고등학교 학생이 돌연 사망했다.
올해로 고3이 된 故 이준서군은 기능경기대회 준비를 위해 합숙 생활을 하던 중 이 같은 변을 당했다.
이군은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고, 그저 개인의 죽음으로 묻힐 뻔했다.
그러나 이군이 최근 대회 입상을 위한 학교 측의 고강도 훈련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가족과 주변 친구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교육계와 시민사회는 학생을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교육 구조가 낳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규탄했다.
관련 부처인 교육부와 고용노동부는 재발방지 등을 약속했지만 이군이 떠난 지 두달여가 된 지금도 구체적인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무엇이 이군을 죽음으로 몰았나
이군은 지난 4월 8일 자신이 재학하던 경북 경주 S공업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서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주변 증언을 토대로 이후 이군이 최근 준비 중이던 기능대회로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이것이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특성화고등학교권리연합회 등에 따르면 이군은 사망 전 5월로 예정돼 있던 지방기능경기대회 출전을 위해 1월부터 학교에서 합숙 훈련을 받았다.
S공고 기능반에 들어가면 교과목보다는 기능대회 준비에 집중하게 된다. 대회가 얼마 안남은 시점에는 수업까지 빠져가며 하루 12시간 가까이 밤낮없이 연습에 매진해야 한다. 이군 역시 매일 고된 훈련에 시달려야 했다.
이군은 지난해 입상 성적이 이미 있기 때문에 또다시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메달을 획득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어 기능반을 관두길 원했다.
그러나 기능담당 교사는 “네가 잘 하니까 파트너를 이끌어 줘야 한다”, “그 실력이면 국제대회도 나갈 수 있다”, “지금 나가면 아깝다”, “이번 대회만 끝나고 나가라”등의 말로 이군을 회유했다.
기숙사에서 일으킨 사고를 빌미로 “기능반을 나가면 징계를 내리겠다”고 협박도 했다.
학교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훈련을 받아오던 이군이 최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됐다는 게 유족의 주장이다.
같은 학교 학생들도 이군이 기능반에 들어간 이후 학교와의 갈등·동기 간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았고, 기능반을 나가길 원했지만 이를 거부당하며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힘들어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이에 대해 학교 측은 훈련에 대한 압박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경북교육청 역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합숙훈련은 본인 동의하에 진행됐으며 힘들면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었고, 특히 이군은 지난해 지방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기 때문에 전국대회 출전이 가능해 훈련에 스트레스 받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경쟁의 장으로 변질된 기능경기대회
기능경기대회는 기능인의 사기를 복 돋우고 근로의욕 고취를 목적으로 기술 수준 향상 등을 도모하기 위한 행사로, 숙련노동자의 기술적 기능 능력을 평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내에서는 1966년에 처음으로 열렸다. 당초 기업 소속의 기능공들의 참여와 입상률이 높았지만 대회 참가로 인해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많아지며 점차 학생 참가자 및 입상자 수가 늘어났다.
입상자를 배출한 지도교사에게는 특별수당이나 근무 가산점 등이 주어졌고. 학교에게는 재정적 혜택이 돌아갔다. 학생으로서도, 학교로서도 대회 입상은 상당한 명예였기 때문에 실습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선수반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구조는 교사·학교 간 경쟁을 심화시켰고, 학생들은 지도교사와 학교의 기대에 부응하고 개인의 성공을 위해 고강도 훈련을 견뎌야 했다.
숙련된 기술인 육성이라는 당초 목적과는 달리 학교와 학생 간 과도한 경쟁의 장으로 변질돼 버린 현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 것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기능대회가 특성화고 학생들을 메달 사냥 기계로 내몰며, 생명까지 위협하는 대표적인 교육 적폐라고 지적한다. 전교조가 현직 교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1.7%가 현재 기능대회 방향에 반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교조 경북지부 이용기 지부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경제 발달과 서비스 산업 확장 흐름에 따라 기능경기대회 학생 참여 비율이 높아졌다, 현재는 참가자의 95%가 학생”이라며 “입상자를 배출한 학교에게는 재정 지원을, 지도 교사에게는 승진 가산점 등 혜택을 주다 보니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교육이 이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2% 밖에 안 되는 학생들을 모아 놓고 수업도 멀리한 채 기술만 연마하도록 하는 게 현재 기능반의 전체적인 구조 문제”라며 “다른 소양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게 과연 올바른 교육인가라는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사고 두달, 대책은 아직 無
이군의 사망 이후 ‘경주 S 공고 이준서 학생 사망사건 진상규명과 직업계고 기능반 폐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공대위는 △이군 사망 원인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 및 수사 △학교와 교육당국의 사과 및 책임자 처벌 △기능반 폐지 △민간전문가가 참여한 기능대회 특별조사 실시 △특성화고 차별적인 교육 중단 등을 촉구했다.
공대위는 “기능대회는 교육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기능대회 참여 학생들은 죽음의 메달 경쟁이라고 불릴 정도의 가혹한 훈련에 시달렸다”며 “메달과 실적을 우선해온 학교와 교육당국은 이 같은 문제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무시해 왔다”고 규탄했다.
이어 “이군의 죽음은 어느 한두 사람의 잘못으로 떠넘길 일이 아닌 S 공고를 비롯해 뿌리 깊은 특성화고 차별 정책을 혁신하지 않는 교육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4월 22일 노동부는 과도한 경쟁을 예방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등 기능경기대회가 본연 취지에 맞게 운영될 수 있도록 특성화고 학생 등 대회 참가자, 교사,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제도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지난달 22일 교육부는 노동부와 함게 학생의 학습·건강권 보장 및 건전한 경쟁을 위해 기능경기대회 지원·개선안 마련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군이 사망한 후 2달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라는 말뿐 구체적인 그림은 나오지 않고 있다.
공대위 상임대표직을 맡고 있기도 한 이 지부장은 “교육부가 기능경기대회와 관련해 내놓은 입장은 ‘노동부와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한줄뿐이었다”며 “이군 사망 40여일 만에 나온 대책이라고 하기엔 매우 무성의했다. 아직까지도 어떠한 말이 나오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국제올림픽과 연관 있기 때문에 대회를 없애는 것은 어렵겠지만 특별한 학생들만 뽑아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는 기능반 폐지는 필요하다”며 “교사는 학생이 대회를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여건만 마련해주는 구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성적 서열화 사회 바뀌어야
특성화고 학생들의 안타까운 사연은 매년 끊이지 않고 있다. 교육권 보장은커녕 학교 명예를 위한 메달 사냥 기계로 전락되고, 학교 취업 실적을 높이기 위한 죽음의 일터로 내몰리는 게 그들의 현주소다.
이 지부장은 “지금까지 관심이 없었던 것이지 새롭게 일어난 일은 아니다. 한국 교육 분위기가 오로지 성적과 입시에만 집중돼 왔던 것”이라며 “학생들이 죽어나가면서 이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한 각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학 서열화에 따라 상위권 학생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형태가 계속된다면 특성화고와 관련된 문제는 계속 반복될 것”이라며 “졸업 후 취업전선에 뛰어든 특성화로 학생들을 ‘고졸’이라는 꼬리표로 폄훼하는 분위기가 해소돼야 한다. 또 특성화고는 학생들을 민주시민으로 육성하는 것과 동시에 직업기능을 키워주는 곳이라는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