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OLDs)>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소식, ‘을지OB베어’ 최수영 대표
1980년 문을 연 가게, 지난해 4월 강제철거 당해…가족 1명 부상입기도
서울시 ‘미래유산’·중기부 ‘백년가게’로 선정됐지만 집행 당시 대응 전무
지난해 11월 시위 종료 후 매주 금요 예배 진행…만선과 법적 공방 여전
최 대표 “만선호프 독식으로 42년 전통 잃어…소상공인 존속 제도 절실”
“지금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언론은 ‘뉴스news’가 아니라 ‘올드스olds’에 있어요. 얼마만큼 희석되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한 노동자가 죽은 사건을 10년 이상 들여다보는 언론이 필요한 거예요. 세월호 참사를 20년, 30년 취재하는 언론이 필요해요. 그런데 조회 수에 의존하는 언론이 그게 가능할까요? (중략) 2000~3000년 전에도 가능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얘기해야 돼요. 이제는 뉴스의 시대가 아니라 올드스의 시대니까요.” - 도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中
올드스(OLDs)는 ‘오래된’이라는 뜻의 ‘Old’와 ‘소식’이라는 뜻의 ‘News’라는 뜻을 담아 만든 단어입니다.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고 반복되지 말아야 할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속보 경쟁에서 벗어나 ‘그때’와 ‘지금’을 짚어봅니다. 신문 헤드라인에서 지금은 한 모퉁이로 자리는 옮겼지만 마음 한 가운데 남아야만 하는 뉴스를 찾아 소개하겠습니다.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주점 골목 사이, 그와 상반되게 어두운 표정으로 ‘상생’을 외치고 있는 최수영 대표를 만난 건 지난해 5월이었다.
당시 현장에는 최수영 대표를 비롯한 그의 가족, 그리고 을지OB베어와 같은 소상공인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을지OB상생공동대책위원회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미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매일 모여 생존을 외치고 있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상생 대상은 서울시, 중구청, 중소벤처기업부와 무려 10개 이상의 점포를 가진 경쟁주점이었다.
이에 앞선 그해 4월 매일 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서울 중구 을지로 노가리골목의 터줏대감으로 ‘서울미래유산’, ‘백년가게’라는 수식어와 함께 42년간 우리 곁에 있던 ‘을지OB베어’가 한순간에 거리로 나앉게 됐다. 이후 이들은 간판이 내려간 가게 앞, 수많은 주점 사이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약 8개월 만에 길거리 시위는 멈췄지만 이들은 그때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이어오던 중구청 앞 금요집회를 꾸준히 진행하며 상생을 외치고 있다.
그저 가게 하나가 문을 닫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인생이, 추억이 혹은 아름다운 시간이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냈음에도 결국 을지OB베어는 제일 먼저 터전을 잡은 그 골목을 떠나야만 했다.
현재 긴 세월 노가리골목에 자리 잡아 많은 고객을 울고 웃게 했던 ‘을지OB베어’는 사라지고 이내 새로운 가게가 들어섰다. 을지OB베어와 비슷하게 맥주와 노가리를 파는 곳이었다. 새로운 가게가 빈자리를 메꿨지만, 과연 함께 쌓아갔던 추억마저 다시 담아냈을지는 미지수다.
<투데이신문>은 끝까지 가게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최수영 대표를 만나 을지OB베어의 시작부터 끝, 그리고 새 출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Q. 을지OB베어라는 가게에 대해 소개를 해준다면.
지난 1980년 12월 6일 개업한 을지OB베어는 대한민국 첫 번째 프랜차이즈 생맥주 가게다. OB베어라는 OB맥주 전신인 동양맥주가 모집한 프랜차이즈가 생기면서 1·2호점이 탄생했는데 1호점은 직영점으로 운영돼 몇 년 안가 문을 닫았고, 2호점이 우리가 운영한 가게다. 유명한 상징인 곰돌이 캐릭터도 우리가 만들었다.
또한 지난 42년 동안 6평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우직하게 버틴 가게다. 처음 을지로 골목에 가게를 열었을 때 인쇄소, 산업용품점 등이 전부였다. 당시 사람들은 생맥주를 처음 접했을 뿐만 아니라 술을 파는 가게가 그 골목에 입점한 것에 매우 낯설어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많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고, 유대감을 쌓았고, 퇴근 후 적은 돈으로 간단하게 한 잔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사람들이 찾게 됐고, 지난 1988년 올림픽부터 사람들이 경기를 보기 위해 맥주집에 오는 문화가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처럼 자리 잡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인내하며 묵묵히 골목을 지켜왔다.
Q. 가문이 2대째 가게를 경영해온 것으로 안다.
장인어른이 먼저 가게를 운영하셨다. 사실 제 전공이 토목이다보니, 처음엔 현장 근무를 위해 싱가포르에 있다가, 다시 한국으로 와서는 KTX 신경주역에서 일했다. 그래서 가족들과 경주에서 살고 있었는데, 지난 2013년경 장인, 장모 두 분이 갑자기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편찮으시게 됐다. 사실 장인어른은 하루도 가게 문을 열지 못하면 몸에 가시가 돋치는 사람이었다. 두분을 보살피는 것은 간병인을 두면 된다지만, 가게는 주인의 부재로 당장 문을 닫아야만 했다. 무엇보다 장인어른이 가게에 쏟아 부으신 정성, 쌓아올린 입지가 쉽게 사라질까 염려됐다. 운 좋게도 그 시점이 저의 정년퇴직과 맞물려 가족 모두가 서울로 올라왔고, 제가 대표직을 맡게 됐다. 엔지니어로 오랜 기간 근무하다 보니, 처음엔 장사 일에 익숙치 않아 2~3년 간은 애를 먹었다. 아내도 많이 힘들어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일궈낸 가게를 위해 장인부부와 함께 근무하던 분들께 업무를 하나둘 배워가며, 을지OB베어를 가꿔 나갔다.
Q. 냉장 숙성한 생맥주와 저렴한 안주를 파는 경영방식으로 유명하다.
을지OB베어는 맥주를 냉장 숙성해 파는 비법으로 유명하다. 시골 동네에 가면 조그마한 구멍가게에 한 번에 먹을 수 있게 땅콩, 멸치를 소량으로 파는 곳이 있다. 우리의 안주가 딱 그거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은 시원한 생맥주에 멸치, 땅콩을 집어 먹거나 직접 안주거리를 사와 맥주와 곁들이곤 했다.
하지만 개업 1년 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술만 파는 것은 위법이라고 규정했다. 가게를 연지 얼마 되지 않아 경영방식을 바꿔야 했다. 이에 장인어른이 직접 중부시장에 가 맥주와 잘 어울리면서도 저렴한 노가리를 발견했다. 이후 노가리를 굽는 방법, 비법 고추장 등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해 100원에 안주를 팔았다. 저렴하고 접근성이 좋다 보니 근처 근로자들이 퇴근하고 간단히 노가리에다가 맥주를 마셨다. 이 조합은 을지로 동네 사람들한테 쉽게 녹아들었다. 우리는 욕심을 내지 않고 천천히 고객들에게 다가갔고, 그 결과 노가리골목의 원조가 됐다.
Q. 과거 인근 가게, 공장 근로자들만 찾던 노가리 골목은 지난 2019년부터 ‘레트로’ 열풍을 타고 젊은 세대까지 즐겨 찾아오는 명소가 됐는데, 당시 기분은 어땠나.
사실 미래가 뻔히 보였기 때문에 걱정부터 앞섰다. 기존에 노가리골목을 찾던 손님들, 그리고 을지로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사장들이 밀려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더욱이 사람이 많아지면 소박하고, 퇴근 후 휴식 공간 같던 골목 자체의 색이 변할까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20개 남짓한 가게가 이제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 골목 상인들이 기뻐할 것을 알기에 쉽게 반대 의사를 내비칠 수 없었다.
소위 ‘레트로’ 열풍이 분 이후, 당초 소규모로 운영되던 가게다 보니, 몰려드는 손님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손님들 중 일부는 제 멋대로 테이블을 펼쳐 사용하고 의자를 꺼내 쓰거나 생맥주와 노가리만 팔던 가게에 ‘왜 소주가 없냐’, ‘배고픈데 다른 안주 없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더욱이 손님들이 주문할 때 노가리 안주개수를 1,2개씩 여러 번 시키다 보니 보니 다른 가게보다 주문이 많아 이를 감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생 6~7명가량을 고용하기도 했다. 고객들의 성화 끝에 소시지와 같은 간단 안주를 마련하기도 했다. 물론 수익은 그전보다 확실히 높아졌다. 다만 저렴한 안주와 술을 파는 이른바 ‘가성비’ 있는 술집이다보니 매출액 규모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Q. 지난 2015년 을지OB베어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고, 2018년에는 호프집 최초로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인증 ‘백년가게’로 지정되며 우수성과 성장가능성을 높게 평가받았다.
중소기업벤처부에서 주관하는 백년가게는 한 가게를 30년 이상 운영하고,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가를 이룬 점포에게 이 같은 수식어를 부여해 주는 사업이다. 원래 을지OB베어는 주로 음식이 아닌 술을 판매하다보니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단골들이 꼭 한번 지원을 해보라고 응원해줬고, 그 응원에 힘입어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던 2018년 8월경 발표가 났는데, 총 16개 가게 중 을지OB베어도 명단에 포함됐다. 중소벤처기업부(이하 중기부) 측에서는 ‘어느 집보다도 의미가 있다’, ‘있는 것 그대로 담담하게 보호해 왔던 부분을 높게 평가했다’며 가게의 본 의미를 인정해 줬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건 ‘이름’뿐이었고 별다른 혜택은 따로 없었다. 그리고 만선호프 측과의 갈등, 강제 집행, 이후 벌어진 시위 등에서도 아무런 보호, 대응을 받지 못했다.
Q. 지난 2019년부터 약 5년 동안 인근 점포인 만선호프와 갈등이 이어진 것으로 안다. 그 과정을 이야기해준다면.
을지OB베어 이후 두 번째 골목에 들어온 것이 1989년 개업한 뮌헨호프다. 그다음 만선호프가 들어왔다. 만선의 경우 처음에는 식료품을 파는 작은 가게로 시작했다가, 만선호프까지 개업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골목 자체가 유명하지 않아 지금처럼 큰 사업장은 아니었다. 만선호프가 점차 그 규모를 키워가고 있던 지난 2013년, 지금의 만선호프 대표가 기존에 있던 만선호프를 권리금을 주고 인수했다. 그리고 5년 뒤 이를 바탕으로 성장한 만선호프와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건물주와 5년 주기로 계약을 진행하는데 지난 2018년 10월 말이 그 ‘5년 계약’이 완료가 되는 시기였다. 과거 을지OB베어가 속한 건물의 건물주들이 유사 업종의 가게를 더 이상 안 들이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를 뒤집고 건물 지하 자리를 만선에게 내줬다. 알고 보니, 건물주 4명 중 1명이 만선과 손을 잡고 계약을 허락한 것이다. 당시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대로 내 것을 하자’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러다 계약이 만료되기 5일 전 일이 터졌다. 명도소송에 대한 우편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너무 당황스러웠고 심란했다. 어떻게 해서든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우리는 건물주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 ‘내건 조건을 다 맞추겠다’고 호소했다. 건물주와 지속적으로 협상을 시도해 결국 합의했는데, 며칠 지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점차 건물주 측은 뒷 공간을 내어달라, 몇 평 더 사용하겠다 등 각종 요구를 해왔다. 그러다 지난 2019년 3월 10일에 1차 강제집행이 들어왔다.
다만 첫 강제집행 때에는 미리 공지가 내려져, 대비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있었다. 당시 용역이 와서는 가게를 둘러보고 ‘오늘은 취소됐다’라는 식으로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이후 지난 2020년 11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5회에 걸쳐 강제집행 시도가 있었지만 우리 가족과 연대인들, 주변상인들이 가게에 상주해가며 지켜내 그들의 시도가 무산됐다. 알고 보니, 사실 이 행위는 자신들이 여러 번에 걸쳐 퇴거 요청을 했음에도 통하지 않아 ‘을지OB베어에 대한 강제철거를 진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추후 진행할 강제철거를 위한 발판이었던 셈이다.
Q. 지난해 4월 새벽 4시경 서울중앙지방법원이 고용한 용역업체 직원들이 을지OB베어에 대한 야간 강제철거를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몸싸움까지 발생했다. 당시 상황과 심경을 말해줄 수 있나.
지난 2020년 명도 소송에서 패소한 이후 우리는 당시 법원에서 판시한 일정 금액을 달마다 건물주 측에 송금했는데, 갑자기 지난해 1월경 보낼 계좌가 없어진 거다. 그리고 2월, 3월을 지나 약 3개월이 좀 넘는 시간이 흐른 뒤 4월, 2차 강제 철거가 이뤄졌다. 이를 통해 건물주 측이 우리와 더 협상할 생각이 없고, 강제철거를 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3월 경 만선호프 및 건물주 측과 인상된 보증금과 임대료를 내고, 강제집행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상호합의를 했지만, 돌연 을지OB베어 소유 부지에 화장실을 새로 지을 공간 등을 요구했고, 이후 갈등이 심화됐다. 이후 강제집행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고, 그해 10월부터 침구류를 구비해 두고 두세 명씩 교대로 자면서 새벽에 찾아올 용역을 대비하면서 가게를 지켰다. 사실 이러한 준비가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꿋꿋하게 가게를 사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외에도 가게 자리에서 보이는 라디오 등 우리만의 행사를 하며 가게의 영원을 소망해 왔다. 그러던 4월 21일, 여느 때처럼 장사를 한 뒤, 아들하고 연대인 두 사람이 가게를 지키며 자고 있었는데, 새벽 4시경 갑작스럽게 용역이 쳐들어와 강제철거를 진행했다. 그들은 가게의 간판을 내리고 내부 시설, 식기 등을 훼손한 것은 물론 옷도 제대로 안 입은 채 자고 있는 세 사람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가했다. 연락을 받고 아내랑 곧바로 현장에 갔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상태였다. 가게는 망가지고 집기류가 나뒹구는 처참한 현장과 찬 아스팔트 위에서 속옷 바람으로 방치돼 있는 아들과 연대인들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그날 이후, 아들은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우리 부부는 아들을 시위에 절대 불러내지 않기로 약속했다.
당시 경찰에 신고도, 호소도 해봤다. 하지만 강제철거 용역 명단이 19명 이하다 보니, 신고도 안 될뿐더러 명단조차 받는 것도 불가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20명 미만의 사설용역을 고용할 경우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고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했다. 거친 방법으로 가게를 망가뜨린 그들에 크게 분노가 일었다. 또한 나의 소중한 가족이 다치게 된 이상 도저히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당일 저녁부터 우리만의 문화재, 예배 등을 포함한 시위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지난 4월 21일 새벽 3시, 용역 깡패 70여명에 의해 을지OB베어의 사람과 집기가 모두 들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날을 기억한다. 42년 전, 골목을 쓸고 닦으며 첫 맥주를 따른 을지OB베어의 간판이 처음으로 떼진 날이며, 상생의 가치로 골목 문화를 일군 첫 가게와 그 가게가 상징하는 모든 문화가 철거당한 첫 날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같이 이 골목에 모여 잃어버려선 안 될 가게와 골목 문화를 지키기 위해 건물주 만선호프와의 ‘상생’을 외쳤다.” (을지OB베어와 연대인 골목선언 中)
Q. 강제 철거 이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시위를 통해 계속해서 목소리를 낸 이유는 무엇인가.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켜온 가게를 ‘쫓겨났다’라는 말 한마디로 끝낼 순 없었다.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전후 사정, 우리의 노력 등을 알리기 위해 나섰다. 일각에서는 실효성 없는 자존심이라 평가할 수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우리는 정신적인 충격뿐만 아니라 금전적인 타격도 심한 상태다. 시위 진행으로 영업을 방해했다는 명목으로 만선호프 측에서 많은 돈을 청구해 아직까지도 소송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변호사 선임 등으로 많은 비용을 지출한 상태다. 이처럼 너무나도 힘든 과정으로 인해 중간에 멈추고 싶다는 생각도 때론 들지만 우리의 행보를 응원해 주는 사람, 고객들이 있어 포기할 수 없다. 앞으로도 투쟁을 멈추지 않을 예정이다.
Q. 아무래도 골목길 주점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시위다 보니 소음으로 인해 시민들의 눈총, 만선호프 측 제지 등 어려움이 있을 거 같다.
물론 시위하는 저희 쪽 어려움도 있지만, 시위 과정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다른 손님들의 마음도 존중한다. 당연히 그들에게 죄송한 마음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만선호프뿐만이 아니라 그곳을 찾는 시민들에게도 정당한 방법으로 알리고 싶었다. 우리의 시위는 다른 가게의 장사, 시민들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닌 정해진 기간 안에 사전 신고한 형태대로 진행한 합법적인 행위였다. 우리는 투사처럼 앞장 서서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닌 담담하게 과거에 이런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는 독식없는 세상에서 여럿이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를 응원해 주시는 분들도 있어 힘을 얻는다. 현재 매주 금요일마다 중구청 앞에서 골목지킴예배를 진행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다. 우리의 목소리로 인해 많은 소상공인들이 힘을 얻고, 국회의원들이 을지OB베어의 사례로 토론을 하는 등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리를 계기로 소상공인 존속 등과 관련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했으면 좋겠다.
Q. 시위 과정에서 만선호프와 을지OB베어와의 상생을, 서울시와 중구청, 중소기업벤처기업부의 사태 해결, 보존 대책 마련 등 개입을 촉구하기도 했는데.
우리가 먼저 을지로에 들어오고 나서 서서히 하나둘씩 가게가 채워지면서 소상공인과 인근 근로자들이 함께 지금의 노가리골목을 만들어갔다. 골목 안에서 모두 상생하며 ‘같이 가는 골목’을 가꿔왔던 거다. 있는 사람을 쫓아내고, 서로 갈등하는 등의 행위 없이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담담하게 이 골목을 유지하자는 의미에서 ‘상생’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또한 우리나라의 정책 중 대부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처럼 내세우는 걸 좋아하지만, 실질적으로 소상공인을 보호한다던가 제도의 의미를 가지고 이어나가는 것에 대한 노력이 없다. 마치 ‘미래유산, 백년가게든 뭐든 상관없이 네 살 길은 네가 찾아’라고 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우리는 정책이 보다 탄탄하게 만들어지고, 재발되는 일이 없었으면 했고, 사태 해결과 보존 대책 마련에 대해 지속적으로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상생을 외치고 있다.
Q. 미래유산을 주관한 서울시 측은 본보에 “‘을지로 노가리골목’이지, 특정 가게를 단독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으며, 을지OB베어 측에서 어떠한 요청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을지OB베어가 노가리골목의 원조로 불렸지만 서울시미래유산에 대해 큰 관심은 없었다. 당시 만선호프 대표가 골목을 크게 한번 일으켜 보겠다고 공언했고, 골목 자체가 유산으로 지정받도록 힘을 합치자고 했다. 그래서 신청을 하게 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골목 전체를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게 만든 뒤, 특정인이 전부를 독식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부 및 지자체가 거리 자체에 대해 가치를 인정하고 유산으로 지정했으면, 그 이름에 맞는 보호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유산’이 아닌가. 또한 특정 가게가 됐건, 골목 전체가 됐던 안에 소속된 건 마찬가지인데, 문제가 생긴다면 이를 조정해 주고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방관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서울시 측은 우리가 어떤 요청도 안했다고 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강제 철거 이후 서울시를 향해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요청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면담 요구서, 시위 사진, 연락 기록 등을 꾸준히 남겨왔다.
Q. 마찬가지로 ‘백년가게’를 선정을 주관한 중기부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상황이라 개입하는 것이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고, 추후 관련 정책 등을 보강하겠다고 응답했다.
만선호프의 손을 들어준 대법원 판결 자체도 이해가 되지 않아, 그들의 답변도 탐탁지 않은 건 사실이다. 당시 우리는 정부청사가 있는 세종시까지 내려가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중기부는 ‘만약 가게를 옮기게 된다면 백년가게라는 현판은 가져갈 수 있게 해 주겠다’는 허무한 답변만 내놨다. 우리가 항의하자, 화장실이나 시설비 등을 보조해 주겠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원한 것은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었다. 제3자 입장이 아닌 가족이 당했다고 생각하고 공감하고 존중해 주길 원했다.
백년가게 중 우리처럼 피해를 입은 곳이 분명 더 있을 텐데, 말로만 보강하겠다고 하지 말고 재발을 방지하고 소중한 유산을 유지할 수 있도록 대책을 내놓는 것이 먼저 아닌가 싶다.
Q. 과거 명의소송 및 손해배상 법적 판결에서는 1심과 2심에서 패소했고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하며 만선호프 측의 손을 들어줬는데, 당시 심정이 어땠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법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법원은 골목에 누적돼 온 갈등, 뒷거래, 감정 등 ‘특이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약자 앞에서 더 차갑고 매몰찼다. 그러던 중 지난해 1월 만선호프 사장이 을지OB베어가 입점한 건물의 일부를 매입하면서 건물주가 된다는 소식까지 접했다. 우리를 점차 자본으로, 알 수 없는 힘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명도소송이 시작부터 패소까지 일관되게 수십 년간 지켜온 가게 영업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부탁했다.
사실 소송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만선 측은 우리의 시위가 방해를 했다며 두 번에 걸쳐 손해배상을 걸어 현재 재산이 압류된 상태다. 하지만 우리는 시위에 대한 신고를 절차대로 진행했고, 집회 기준 데시벨도 지켜가면서 행사를 마쳤다. 중부경찰서 측에서도 불법행위 없이 기준에 맞춰 진행했다고 인정했는데도 법원 측은 보상하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현재 만선호프 측이 가장 큰 근거로 내민 것은 소음 기준이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상 시위 소음 기준이 65 데시벨인데, 을지로 노가리골목 기준 바닥소음이 이미 75 데시벨이 넘는 상태다. 또한 노가리골목은 매일 밤 많은 인원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법원 측은 이를 고려하지 않고 법의 기준 하나만으로 소음 기준을 넘었다고 판결했다. 또한 트라우마로 인해 강제철거 이후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은 아들까지 소송 대상에 넣었다. 현재까지도 만선호프는 4명에게 손해배상 금액을 청구했고, 더불어 시위를 진행했던 날마다 일정 금액을 지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합법적으로 공정한 시위를 했음에도, 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위를 마친 사장님들과 시민들을 기다린 건 대화가 아니라 고소장이었습니다. 건물주 만선호프는 을지OB베어 사장님 가족과 연대인들이 그동안 진행한 문화제, 기도회, 시민들의 연대의 발걸음 등이 자신의 영업을 방해한다고 고소를 진행했습니다. ” (을지OB베어와 연대인 골목선언 中)
Q. 을지OB베어 말고도 ‘오래된’ 노포 가게들이 외부의 압력 등으로 인해 하나둘 씩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 ‘백년가게’, ‘미래유산’ 등을 포함해 소상공인의 존속 및 육성을 위해 정부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불합리한 문제가 생기면 중재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내 편 네 편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정확한 현재 상황, 피해 규모, 특이성 등을 존중 및 공감해야 하고 그를 바탕으로 제도를 법제화, 명문화돼야 한다. 더 이상의 탁상공론이 아닌 소상공인에게 실제 와닿는, 그러면서 상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법을 만들어 보장해줘야 한다. 더욱이 정부는 약자에게 더 귀 기울여야 한다.
Q. 향후 계획해둔 움직임이나 행보가 있는지.
기존 을지OB베어가 가지고 있는 색처럼 소소하게 맥주 한잔 마실 수 있는 가게를 다시 차릴 생각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대로 끌고 갈 예정이다. 물론 심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극복해 나가면서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 목표다.
우리 부부도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운영할 수 있는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을 거고, 1대 대표인 장인어른만큼 오래 할 자신도 없다. 다만 우리 아들이 대를 이어 가게를 맡고,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동안 힘들게 지켜왔던 것을 그대로 우리가 존속해 나갈 계획이다.
난 용맹한 투사도, 모든 것을 다 책임질 영웅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작지만 강한, 소소하지만 알찬 우리들의 목소리로 무언가에 기여할 수 있거나 힘을 주고 싶다. 오랫동안 평가받고 기억되고 싶다.
Q. 대표님에게 노가리 골목이란, 그리고 을지OB베어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삶이고 가족이다. 처가부터, 우리 부부, 그리고 아들까지 3대째 이어서 가족의 모든 것을 담은 가게를 이어나간 곳이다. 앞으로도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닌 흘러가는 인생처럼 가게를 가꿔나갈 예정이다.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인과 장모가 열심히 했고, 그런 모습을 보고 우리도 달려들었고, 또 우리 아이도 손을 뻗은 것이라 생각한다. 가게가 세상에 선보인 지 42년이 흘렀다, 오랫동안 많은 시간과 손님을 마주하며 우리는 신뢰를 굉장히 중요시 여겼는데, 그 믿음을 이어가고 사랑에 정성으로 보답하는 가게로 남고 싶다.
“골목 밖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을지OB베어와 같이 쫓겨나는 가게가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을지로 노가리골목 독점을 방관했던 중구청과 대책 없는 재개발로 골목을 무너뜨리고 있는 서울시에 대책과 책임을 요구하겠습니다. 서울미래유산, 백년가게, 상생의 골목이 말로 지켜지는 게 아니라 법과 행정과 문화로서 지켜질 수 있도록 널리 알려나겠습니다.” (을지OB베어와 연대인 골목선언 中)
을지OB베어 관계자들은 서민들의 푸근하고 소박한 장소가 외부 영향으로 인해 하나둘씩 사라지게 된다는 것에 누구보다 깊은 슬픔을 드러냈다. 이들에게 ‘을지OB베어’는 단순한 가게가 아닌 삶이었고,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최 대표는 만선호프와의 분쟁, 강제철거 등 힘든 이야기를 시민, 언론 등에 너무 많이 반복해서 말했지만 이제는 그 아픔도 잊혀지고 무뎌졌다며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가게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에 있어 누구보다 단호했고 담대했다.
“기자님, 을지OB베어는 제 삶입니다. 삶이 없어지면 ‘나’ 자체도 없는 거잖아요. 저희 가족이 지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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